[리뷰] 성숙한 사랑의 모습과 방식에 대한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어딘가에 있을 나의 반쪽, 그리고 그대로의 나와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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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lunekist)등록 2019.12.25 11:48
  낯선 이국 도시에 이방인인 두 사람이 있다. 한 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한물간 배우인 밥 해리스(빌 머레이)는 촬영을 위한 출장으로 도쿄에 방문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한물간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타지에서의 그를 더욱 외롭게 한다.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와서 살고있   다. 남편은 늘 바쁘고, 샬롯은 늘 혼자이며, 남편의  직업 때문인지 늘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느라 호텔에서 생활한다.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그들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호텔바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조금은 진부하지만, 남편이 출장을 간 며칠동안 그리고 밥의 출장기간 동안 그들은 더욱 가까워진다. 그들은 요즘의 흔한 방식처럼 가벼웁게 마음을 나누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마음을 확인하지도 않는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닮아있음'은 본능적으로 끌림을 이끈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외로움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도시와 낯선 문화 속 완전한 이방인으로서의 필연적인 외로움,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뒷전으로 밀려난 외로움이 있었다. 밥은 아내와 자녀에게서 이제는 그냥 보통의 가장일 뿐이었고, 오히려 아내에게는 자녀보다도 우선순위에서는 밀려난지 오래였다. 샬롯 또한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타국으로 무작정 따라왔지만, 그 때문인지 그 곳에서 샬롯 자신은 그저 남편을 기다리는 존재일 뿐이었고 공허함과 외로움 속에서 그저 무의미한 하루들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서로가 발견된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누군가의 남편인 그들, 옛날 좀 잘나갔던 한물 간 배우 그리고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였던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 그런 수식어는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냥 그들에겐 단지 그들 그대로 일 뿐이다. 나이도, 사는 곳도, 배경도 모두 다르지만 그런 것은 다 차치하고 그냥 그들 서로 그대로를 봐주는 사람, 그들 서로 앞에서 그들은 그냥 자기 자신 그대로의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자연스러운 끌림은 오히려 필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 그대로를 봐주는 사람에겐 마음을 열기 쉬우니까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 그대로이기 보다 수 많은 다른 역할들이 요구된다. 사실 그것이 삶의 당연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누구나 자연스레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공허함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런 공허함 속에서 우리는 늘 충만함을 갈구하며,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사랑으로 그것을 채우려 한다.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2000)'의 OST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 정확히는 '에로스'에 대한 담론의 일부이다. 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평생 사랑을 찾아 헤메이는지, 평생 자신의 반쪽에 대한 갈구함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지 등에 대한 사랑의 기원을 이야기 한다.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원래 세상에는 남자와 남자가 합쳐진 태양의 인간, 여자와 여자가 합쳐진 땅의 인간, 남자와 여자가 합쳐진 달의 인간이 있었으나, 인간의 오만함으로 신이 그들을 모두 반 씩 갈라놓았다. 원래 둘씩 합쳐져있던 그들은 팔도 두개, 머리도 두개 등 모든 것이 두개였으나 갈라져 지금 현재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이 서로 결합하려는 것은 갈라진 이들의 선천적인 의지이고, 사랑하는 것은 갈라진 상처를 보듬고 위로 하려는 회복의 의지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요한 내용이다. 
  
 결국 신에 의해, 반쪽을 잃은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반쪽을 찾아헤매이고, 찢어진 자리의 흉터를 매만지며 늘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 어딘가에는 신이 찢어 놓은 나의 반쪽이 살고 있을수도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았거나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샬롯과 밥이 서로에게 그런 운명의 상대였다면 조금 식상한 일일 수도 있겠고 또 그들의 지금 배우자들에게는 너무 슬픈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밥과 샬롯이 서로에게 그런 반쪽의 존재였다면, 인생에서 단 한번의 순간이라도 한번쯤 진짜 나 자신 그대로를 봐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행운이며, 행복한 일인가. 

그들의 감정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그토록 저릿하고 아름다웠던 것에는 그들의 성숙한 사랑의 방식이 기여했다고 믿고 싶다. 나의 감정과 나 자신이 중요했던 만큼, 그들은 타인의 것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배려가 있었다. 너에게 빠져드는 지금 현재의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의 삶도, 그리고 너의 삶에 함께 하고 있는 그 가족과 또 나의 삶에 함께 하고 있는 그 가족들 모두의 삶에 대한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청춘들에게는 용기없고 답답한 결정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과 결정에 얼마나 큰 고심과 머뭇거림이 있었는지를 안다.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것, 그리고 그와 얽힌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해야야한다는 점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은 서글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벼운 만남과 말뿐인 사랑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서,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은 답답할지 모르지만 성숙과 배려가 있는 사랑의 방식을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미국 밴드 너바나(Nirvana)의 1991년에 발표되었던 노래의 제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Come As You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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