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칭찬받는 방법

의도치 않은 '행위예술' - 종이신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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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mingming216)등록 2019.11.26 18:13
종이 신문을 본 지가 오래됐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반면 나는 신문을 돈 주고 구독한지 10년은 족히 넘는 것 같다. 대체로 나랑 비슷한 논조의, 내가 좋아하는 필진이 글을 많이 쓰는, 다소 힘겹게 운영되고 있는 한 언론사의 신문. 30대 중반인 나는 스마트폰 화면보다는 종이를 통해 활자를 읽는 행위를 더 선호하기도 하고, 또 그 신문사에 돈을 매달 구독료를 내는 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신문 구독을 취소한 적이 없다.

종이 신문만이 가진 장점은 '내가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종이 활자와 더 친해서'라는 이유 말고도 사실 엄청 많다. 첫째, 신문을 펼치는 순간,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아니 더 명확하게는 이 신문사가 어떤 내용에 관심을 가지라고 호소하고있는지 전체 레이아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관심이 살짝 덜 가는 페이지라 해도, 어떤 제목의 기사들이 얼마나 커다란 제목으로 실렸는지 훑어본다. 홍수같은 인터넷 뉴스 속에서 헤엄치기보단 내가 믿는 언론사의 '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소 수동적이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효율적일 수가 없다.

둘째, 첫째와 살짝 겹치는 부분이긴 하나 결국 내가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다. 인터넷 뉴스를 보다보면 아무래도 본인이 관심있어 하는 주제의 기사만 보게 되거나, 온라인 뉴스 편집권을 지닌 중간 매체의 전략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서 결국 흥미 위주의 기사만 보게 된다.(아님 낚시질 당하거나...)

셋째, 책보다 가볍고, 읽은 뒤에 버릴 수 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긴 하나,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는 절대 안 읽는다, 무겁게 들고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은 한 부 들고 올라타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쭉 훑어본 뒤 지하철역에서 나갈 때 재활용 통에 쏙! 던지면 끝이다.

넷째, 휴대폰 배터리를 및 데이터를 아낄 수 있다. 종이신문을 읽을 때에는 휴대폰을 잘 안 보고, 포털 뉴스를 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신문의 구독자이기 때문에 해당 신문 웹사이트에 들어가 pdf보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 상에서도 종이신문을 보듯 전체 레이아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없는 환경에서 다운로드를 받으면 데이터가 엄청 날아가고, 폰 내부 용량도 많이 먹는다. 배터리는 두말할 것 없다. (물론 스마트폰으로 신문을 읽을 때의 장점도 상당하다, 신문은 면적이 크다보니 페이지를 넘길 때 잘못 하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부시럭부시럭 하는 소리도 주변이 조용한 경우에는 소음이 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신문은 거의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본다. 가장 무언가를 읽으면서 집중하기 좋은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어렵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신문의 내용은 한 곳에 앉아 집중해서 읽기보다 어딘가를 이동하며 흡수하기에 딱 좋다. 
10년 전만 해도 지하철엔 나 같은 사람이 많았다. 하다못해 지하철역에서 나눠주는 무가지도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오다 5~6년 전쯤 대부분 폐간 절차를 거쳤다. 이제 지하철 모든 칸에서 신문을 읽는 이는 나 혼자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읽어왔다. 이동하면서 신문 보기, 그게 정말 꿀맛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 피곤했던지라 지하철 경로석 쪽에 몸을 사알짝 기대고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로석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날 툭툭 치시는 거다. '앗차, 내가 너무 기대있었구나' 싶어 잽싸게 몸을 떼고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한 마디,

할아버지 : 아주 현명한 아가씨네, 신문을 보고. 신문을 이렇게 봐줘서 고마워
나 : 음... 네? (신문사 사장이신가...??) 
할아버지 : 내가 지금 저녁먹으러 가서 친구들 만날 건데,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네. 신문 보는 아가씨를 다 보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될 거야!
나 : 아... 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보고있어서 그래요, 저는 그냥 이게 편해서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할아버지 : 아니 아니, 요즘 세상에 신문을 다 보고, 나중에 국회에도 가고 훌륭해질 거야!

좋게 얘기해주시니 뭔가 감사하면서도 왜 내가 칭찬을 받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떨떠름했다. 너무 그렇게 칭찬을 하시니 왠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제호 부분을 감추기도 했다! 사실 그 분이 좋아하는 신문이었을 수도 있는 건데... 

그리고 더더욱 떨떠름했던 건, 난 이미 30대 중반인데 훌륭한 사람 될 거란 얘기를 들은 거였다. 다른 나라에선 30대에 대통령도 하는데... 순간 초등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훌륭한 사람... 국회... 모두 넌센스였다. 하지만 기분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만한 칭찬 세례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받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어쨌거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종이 신문을 읽는' 행위 하나만으로 칭찬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약간의 아주머니가 이후 열 명은 족히 있었다. 다 읽으면 나도 좀 보게 달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이미 읽은 면과 묶여서 인쇄돼있는 뒷면을 잽싸게 읽은 뒤 떼어서 드리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어떤 분은 다짜고짜 "무슨 신문이냐"고 물어본 뒤 내가 대답하면 가타부타 아무 말도 대답도 없이 가던 길을 가기도 하셨다. 무례함에 짜증났지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가 훨씬 많았다. 암튼 그들의 칭찬 릴레이에 대해 아리송해하는 내게, 주변 사람들은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옛 것을 지키는 느낌이 들어서 고맙고 기특했을 거다"라고 얘기해줬다.

하지만 나의 행위는 옛 것을 지키려는 의지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저 내 취향일 뿐이다. 그리고 내 신문은 아무래도 그분들이 좋아하는 신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종이신문이란 미디어 하나만으로 이렇게 30대와 70대가 잠깐이나마 웃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재미지다. 마치 행위예술가가 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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