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단 한번만'을 눈감지 말자

중3 아들이 들려주는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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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미(gracecho)등록 2015.01.04 17:43
저희 가족은 이웃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2011년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가 새해 첫 책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골라서 소개해주었습니다. 제게는 새해를 맞으며, 힘겨웠던 2014년 이후에 오는 2015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을 다잡아 보는 계기가 되었기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래는 아이가 발표한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누가, 왜 유토피아를 꿈꿀까요 ?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기본형태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중에서)

모어는 일반 민중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모어는 깊은 크리스트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인간의 비참의 원인을 날카롭게 또한 현실적으로 분석하여 그 토대 위에 자신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였습니다.

당시 모어가 살던 시대는 어땠을까요.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항해는 신세계의 발견이었고 기존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를 구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배경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을 초래한 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절대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되고 있었고 잉글랜드의 경우 제1차 인클로저 (울타리치기) 운동이 일어납니다.

토머스 모어는 신교이든 카톨릭이든 간에 종교적 광신을 반대하고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설파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는 1478년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고 14세에 옥스포드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18세에 링컨 법학원을 입학하고 27세에 하원의원, 44세에 하원의장, 50세에 대법관이 됩니다. 당시 대법관은 권력의 2인자하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막강한 지위를 누린 그가 55세에 런던탑에서 처형됩니다. 발단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였고, 1534년 발효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모든 귀족과 공직자들은 이 법령의 준수를 공개적으로 선서해야 했는데,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고 침묵함으로써 반역죄로 기소를 당합니다.

<유토피아>는 세 사람 (토머스 모어, 페터 힐레스, 히슬로다에우스)의 대화를 옮겨 적은 형식으로 몇 가지 쟁점을 놓고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정의실현을 위한 공평하고 바람직한 방법(절도범 증가의 원인과 대책의 문제)이나, 사회 내의 범죄를 증가시키는 근본 원인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제도를 통해 인간의 욕심을 제어할 것인가, 종교를 통한 도덕적 생활 유지를 추구할 것인가의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였던 모어는 신흥 중산계급 출신의 출세한 사람으로서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이지만, 반면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구조와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통치형태를 반대했습니다. 유토피아는 모어의 이런 생각이 빚어낸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렇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는 고전적 유토피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고전적 유토피아란 아무런 법도 처벌도 없고 위협이 없이도 사람들은 올바른 일을 하는 황금시대를 말하며 이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유토피아를 꿈꿉니까 ?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더 나은 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평등입니다. 고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는 평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가까운 중국에서는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이 있었고 서양에서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마디로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 파멸로 끝났다.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中 일부)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 중 하나는 '올바른 생각 혹은 사상을 갖기만 한다면,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어느 정도 대중화는 가능하나 누구나 그렇게 높은 이상과 투철한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와 욕심을 뛰어넘고, 모두 공평하게 나누며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상당히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 이후 과학혁명, 모더니즘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성과 합리성을 갈고 닦은 서양 근대의 결과는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를 보여주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 등이 그 예입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인간이 이성과 의식보다는 감정과 무의식을 지배를 더 많이 받는 존재임을 폭로했습니다.

유토피아는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에 존재합니다. 조금 억지이지만, 세상사의 부정적인 면만 본다면, 언제나 불평을 할 것이고 긍정적인 면만 본다면 언제나 감사를 할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꿈과 관련해서 모어의 <유토피아>와 연관시켜 본다면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옳은 것이 아니라 두 개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바꾸려는 실제적인 노력 못지않게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논리, 그리고 마음이 달라져야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모어가 마음과 제도에 대해 질문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이 먼저가 아니라 붙어있다! 라고. 우리는 그것들이 붙어있다는 것을 간혹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정권이 변하면 내 삶과 내 마음의 평화가 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잡아 가카 밑에서 살아야지…라고 하며 사회적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마음을 바꿀 것인가, 사회제도를 바꿀 것인가 둘 중 어떤 것이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 시대에 따라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할 테지만, 판단의 주인은 자기자신이 되어야 한다.

토마스 모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회유하러 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국왕, 권력자들은 언제나 말한다, 단 한번만이라고, 단 한번만 서명해달라고, 단 한번만 싸인해달라, 단 한번만 함께 일하자. 단 한번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단 한번만 서명하면 그 다음에는 설득하라고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연설하라고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나아가 회유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 한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은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단 한번은 여러 번 찾아올 것입니다. 정치적 욕망, 사회적, 경제적 욕망… 그 욕망 중에 어떤 욕망이든 그 욕망이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의 단 한번을 요구한다면, 토머스 모어는 죽음을 불사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모어의 질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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