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한 바퀴 다 돌면, 파리로 이사갈테다

[마지막회] 바깽이의 인도 여행엽서

등록 2014.09.18 14:25수정 2014.09.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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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식당은 제각기 다른 공기를 품고 있다. 어떤 식당은 북적대고 활기가 넘쳤고, 어떤 식당은 너무나 고요해서 내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일깨워 주기도 했다. (바라나시에서) ⓒ 박경


어둠이 내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들어서면, 여행자가 되는 식당이 있었고 이방인이 되는 식당이 있었다. 훗훗하고 화기애애한 공기 속에서 여행자는 내일의 여행 계획을 세웠고, 형광등 불빛이 안개처럼 가라앉는 곳에서 이방인은 먼 미래를 꿈꿨다.

바라나시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의 벽은 꽉 차 있었지만 어쩐지 허전해 보였다. 그들이 존경하는 구루(정신적인 스승)의 사진과 함께 어울려 있는 내 고향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면의 부조화 때문일까.


그런 곳에서 나는, 조악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턱이라도 괸 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음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당장 내일 어디로 가야 할지 계획하기보다는 먼 훗날 마지막 여행지가 어디가 될지, 아득히 가늠해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파리로 이사를 갈 테다. 가서 꼭 백일만 살아볼 참이다. 그게 여행이지 무슨 사는 거냐고 비웃지 마시라.

가서, 호텔 말고 소박한 방을 구하고 냄비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널고 지내면 그게 사는 거지 뭐 사는 게 별건가. 아, 창가에 푸른 화분도 하나 놓아야지. 한 달 내내 저 혼자 잘 자라는 선인장 같은 거 말고 매일매일 물주고 바람 쐬어 주어야 탈 없이 잘 자라는 아주 까다로운 녀석으로. 어디 나갔다가도 그 녀석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그게 사는 거지 뭐 사는 게 별건가.

하루는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화초처럼 자란 손톱을 깎고, 하루는 말이 통하지 않는 헤어숍에서 머리를 자르고, 하루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다 늦은 나이에 탱크탑을 걸친 채 싸댕질(싸돌아 댕기기), 또 하루는 서점에 가서 그 나라말로 된 두꺼운 책을 골라, 마치 읽는 것처럼 마지막 장까지 들여다봐야지. 그 나라의 낯선 글씨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파리에서 백일, 베니스에서 백일, 페즈에서 백일, 이스탄불에서 백일...꼭 백일이어야 한다. 더도 덜도 말고 백일. 그렇게 석 달 열흘을 살아 볼 것이다. 마늘과 쑥만으로 버텨 마침내 인간이 된 곰탱이의 미련한 이야기에서처럼 진득하게.


그럼 혹시 아는가. 백 일째 되는 날, 나의 고단한 여행이 일상이 되고, 지루하고 이끼 낀 일상이 비로소 여행이 될지도.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세상 모든 여행은 그렇게 끝날 것이다. 떠나는 건 돌아오기 위한 것이니까.

p.s   못다 부친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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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의 어느 가트에서.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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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인도의 국민음식 중 하나인 뿌리. 만두피처럼 반죽한 것을 뜨거운 기름에 튀기면 금방 부풀어 오른다. 톡 터뜨려 속이 텅 빈 뿌리에 소스를 얹어 먹으면 바삭하고 고소하다. (아그라에서)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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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는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겁이 많거나 거만하거나. 어찌어찌 올라는 갔는데 내려오는 방법을 몰라 주눅 들었거나, 내려다보는 맛에 혹해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싫어졌거나.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둘 다 아닐지도. 어쩌면 저건 자기 방식의 명상이었는지도. 바라나시의 개들은 사람들을 향해 짖거나 구걸하지 않을 정도로 점잖았으니까.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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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죽은 자의 직계 유족으로서, 어떤 이는 속죄의 의미로, 어떤 이는 사원에 머리털을 공양하기 위해, 머리를 민다. (바라나시)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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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궁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그라)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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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라호에 간다면 하루쯤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관광객이 몰려다니는 서부 사원군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 보자. 그러면 한적하고 조용한 사원을 만날 수 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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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 사띠란, 남편이 죽으면 살아있는 부인도 함께 장작더미에 화장을 시키는 힌두교식 장례 풍습. 메헤랑가르 성의 문에 새겨진 31개의 슬픈 손도장은 한 철부지 마하라자가 거느렸던 부인들의 것으로 사띠를 거행한 증표. 아직도 인도에서는 공공연히 혹은 비밀리에 사띠가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조드뿌르)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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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음이 부처님 마음인 것을. (아잔타 석굴)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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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색깔만큼이나 인도 여행은 찐~했다. (아그라의 어느 시장에서) ⓒ 박경


덧붙이는 글 2013년 1월 한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습니다.
#인도의 식당 #바라나시 #인도 #인도여행 #찬단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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