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머니는 왜 우유를 마시지 못할까

조용히 생색내지 말고 일본을 품위 있게 도와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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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parkdo45)등록 2011.03.23 11:27
일본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 유감

요즘 내 일과는 매우 팍팍하다. 지난해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국치일에 맞춰 <일제강점기>를 펴낸데 이어, 금년 8월 15일에는 <대한제국>(가제)이라는 책을 펴내고자 준비 중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배움이 부족한 사람이 여러 문헌을 뒤지면서 젊은 세대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원고를 풀어써가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절반 정도는 책을 읽거나 집필한다고 눈이나 팔에 무리가 가기에 나는 그 피로를 푸는 방법으로 날마다 산책한 다음 목욕탕에 간다. 샤워를 한 다음 온탕에 10분 정도 몸을 담그면 피로가 가시고 심신이 가뿐해 진다.

오늘은 애초의 집필 목표량을 채우자 시간이 늦었다. 늦은 시간 목욕탕에 가자 직원들이 반겨 맞았다. 재작년 원주로 이사 온 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자 이제는 목욕탕 전 직원들이 한 식구처럼 대해 준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데 모서리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음악회를 하고 있었다.

오늘이 일요일도 아닌데 웬일인가 가까이 가서 자막을 봤더니 '일본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였다.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원로 가수 세 분이 번갈아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중간 중간 남녀 사회자가 성금 모금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예삿날처럼 20여 분 목욕을 마치고 다시 탈의실로 나오자 그 프로그램의 피날레 곡으로 세 가수가 '사랑해'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나라 일본이 전대미문의 재난에 도와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도와주는 데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고 품격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프로그램 진행자는 고심 끝에 '사랑해'라는 곡을 마무리 곡으로 선곡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이렇게 당신들을 사랑하니까 일본 국민 여러분, 희망과 용기를 가지십시오'라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배알이 없는 사람들

내가 옷을 다 입고 옷장의 열쇠를 반납하는데 목욕탕 전속으로 고객의 몸을 닦아주는 건강보조사(때를 밀어주는 분)가 신발장 열쇠를 건네주면서 한 마디를 했다.

"선생님, 이거 너무 오두방정 떠는 것 아니에요?"
"만일 일본과 우리나라의 경우가 바뀌었을 때는 어땠을까요?"
"어림도 없지요. 제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살다가 왜놈 피해 만주로 도망갔는데, 곧 거기서도 또 왜놈을 만났다고 하더구먼요. 그놈들이 조선 사람을 어찌나 업신여기는지 의자가 없으면 조선 사람을 엎드리게 해놓고는 등 위에 앉았대요. 바로 제 할아버지가 그렇게 무시당했답니다."

그는 조선족으로, 단신 한국에 와서 목욕탕에서 몸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조선족 한 여성을 만났더니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는 조국에 불법체류하면서 페인트 공을 하고 있었다. 독립군 후손이 친일파 후손 집에 가정부 노릇하는 게 소설 속에서만 있는 일이 아닌 현실이다.

싸늘한 밤공기를 마시며 돌아오는 길에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박하고 배알이 없는지 몹시 안타까웠다. 나는 최근 10여 년간 항일유적지나 의병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 관한 여러 문헌도 살펴보았다.

아직도 변치 않은 일본 주류의 속내

한 세기 전 서세동점의 쓰나미가 우리나라에 덮쳤다. 우리나라는 중화사상을 신주단자처럼 받들고는 스스로 소중화에 자족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닥친 외우(外憂)와, 지도층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민란이 일어나는 등 내환(內患)에,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그때 일본은 은인처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고 안심시켜 놓고는 꿀컥 삼켜 버렸다. 그때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죽창을 들고 일어선 의병장에게 일본 헌병대장 아카시(明石)는 말했다.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 한 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한 세기가 지날 무렵 나는 그때 죽창을 든 의병장 후손과 아카시의 후손과 화해의 장을 주선한 바 있었다. 그때 그 일로 일본에 간 한 방송국 피디가 전한 바, 아카시 후손은 지금 도쿄 근교에서 살고 있다는데, 그는 당신 할아버지와 거의 같은 생각을 가졌더라고 하면서 화해의 장은 힘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일부 주류의 현재의 대(對) 한국관이라고 전했다. [참조기사: 100년이 지나도 변치 않은 일본 주류의 속내 2010. 11. 15.]

일본은 해방 후 줄곧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틈틈이 역사를 왜곡하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뒤집어놓았다. 우리 국민들은 그때만 잠시 흥분할 뿐, 조금 지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이렇게 역사의식이 희박하고, 배알이 없는 겨레라면 또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동안 일본을 네 차례 기행한 바 있는데, 일본 국민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등,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임을 내 눈으로 보고 느꼈다. 그리고 일본인 가운데는 훌륭한 진보적인 지식인도 많은 것도 알고 있다. 일본의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는 자기네 정부를 상대로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을 제기, 마침내 승소하여 일본정부의 보상금으로 아파트를 지어 사할린 동포들이 영구 귀국하여 지금 안산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왕족을 비롯한 주류들과 일부 극우 세력은 지난날 한국 지배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즈음과 같은 천재지변을 당하고서는 더욱 지난날이 그리울 것이다. 한반도를 밥통까지 삼켰다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방해로 토해 놓았으니까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런 그들이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피해와 공포에 우리가 도우는 것은 인류애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사랑해'라는 노래까지 불러가며 배알도 없이 날뛰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의 극치다.

도와주라. 그러나 그들이 지난날을 반성할 수 있도록 품위 있게 조용히 생색내지 말고 일본을 도와주라. 일본 왕을 비롯한 그들 주류는 반성치 않았다. 그들이 정말로 한국 국민에게 감사하고 감동케 하여, 그들 스스로 지난날을 참으로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는 전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품위 있게 조용히 도와줘야 한다.

그들은 지난 잘못을 반성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일방으로 사랑한다고 찧고 까분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정말 잘나고 잘한 줄 알고 끝내 반성치 않을뿐더러, 우리는 '뭐 주고 뺨 맞는' 얼간이로 그들이 말한 '병자'일 것이다. 내 이야기의 마무리로 두 사람의 실화를 들려드린다.

의병장 손녀 이야기

허로자 할머니 ⓒ 박도

허로자, 그분은 올해 여든여섯의 할머니로 대한제국 말년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다. 1908년 왕산이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자 가족들은 일제순사와 밀정의 등살에 고향 땅에 살 수 없어 북만주로 망명을 갔다가 거기도 일제의 세력이 미치자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갔다.

허로자는 거기서 태어나 12세 때인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화차에 실려 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

2009년, 할아버지 기념관이 그리던 고국 고향땅에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난생 처음으로 귀국했다. 이참에 할아버지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으나 한 몸 편히 쉴 곳이 없어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망향의 정을 참을 길 없어 다시 고국에 나왔으나 한 몸 의지할 곳 없어 싸구려 모텔이나 친지 집에서 기숙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황금주, 1927년 생으로 올해 여든넷이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부산의 한 요양원에서 살고 있다. 다음은 그분의 증언이다.

어느 날 공장에 갈 직공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모집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일본인들한테 심하게 얻어맞는다는 말도 떠돌았습니다. 본가에서도 누군가 한 사람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아홉 살 먹은 제일 큰 딸은 일본에 있는 어느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고, 또 저는 양녀였으므로 제가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순히, 공장에 일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어린 시골처녀들이었습니다. 저도 공장에 돈 벌러 간다고 생각하니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군 위안부였던 황금주 할머니. 일본 나고야 집회에서 증언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 연단 앞까지 걸어나왔다. ⓒ 눈빛출판사(촬영, 이토 다카시)

저는 깨끗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갔습니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함락되던 1942년 4월이었습니다. 함흥 역까지는 조선인이 인솔했어요.

많은 여자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고, 입구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더군요. 게다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기차 창문은 모두 검정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제가 탄 객차에는 20~30명의 젊은 여자들이 탔습니다. 우리는 차에 태워진 직후부터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걱정이 된 우리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군인들은 "뭘 쳐다봐!"라며 소리를 지르고 발길질도 마구 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까지 계속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가는 도중에 역 확성기에서 "창춘, 창춘" 하는 소리를 들은 뒤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지린 역에서 내린 우리는 포장을 친 군용 트럭에 옮겨 태워졌습니다. 트럭 한 대에 20~30명이 짐짝처럼 실렸는데, 그곳에서도 총을 든 군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총 든 군인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도망쳤을 것입니다.

우리를 실은 트럭은 캄캄한 밤중이 되어서야 어느 육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그곳이 '히노마루' 부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양옥 안의 조그마한 방이었는데, 안에는 좁게 칸막이를 해놓았고, 모포 몇 장이 놓인 나무침대가 있었습니다. 헌병이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화장실로 용변을 보러 갈 때마다 하늘을 보면서 '엄마도 이 하늘을 보고 계시겠지' 생각하고 눈물만 자꾸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에도 "도망칠 생각하는 거야!" 하는 고함소리가 어김없이 들렸고,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착한 날은 불안과 피로 속에서 그냥 지나갔지만 다음날부터 우리는 군인들을 상대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 순결을 잃게 되면 죽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겁에 질려 있었으므로 처음 들어선 병사한테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군인은 대검으로 제 속옷을 찢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음부를 권총으로 쏜 일본군 장교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20여 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성기조차 본 적이 없는 숫처녀였습니다. 병사들을 상대할 때마다 '똥이라도 먹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세탁과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하곤 했습니다. 생리 때에는 생리대가 있는 데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을 훔쳐다 썼는데, 들키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밥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때 성병에 감염된 적이 있었는데 성병이 옮겨질까 봐 삽입을 하지 못한 병사들은 "성기를 빨아라" "정액을 삼켜라" 하는 요구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군인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발길로 채이고 얻어맞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그 정액이 생각나서 우유를 마시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견딜 수가 없어 자살하는 처녀들도 있었습니다. 아편을 어디에선가 구해 와서 다량 복용하고 피를 토하며 죽은 여자도 있었어요. "노끈이 있으면 목을 매어서라도 죽겠는데 노끈 하나 구할 수 없으니…." 하면서 한숨짓는 이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화장실에서 군인들의 각반으로 목을 매어 자살한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우리들이 모두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자살한 사람이 있어도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자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료를 사전에 알려 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벌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자살하지 말자"고 서로 타이르곤 하였지만, 자살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여자는 장교와 심한 싸움을 하였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반항하다가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도 계속 반항하니까 그 장교는 벌거벗은 그 여자의 음부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일들을 일본인들이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630~634쪽

일본 왕이나 지도층은 광복 후 한번도 이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거나 인간적으로 보상한 적이 없다. 이 할머니들의 눈물은 누가 닦아줘야 하나?

상대는 지난 만행을 참회도 하지 않는데 우리가 일방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치졸한 짓으로 오히려 상대에게 얕잡아 보일 것이다. 어쩌면 정치권이고 방송계고 할 것 없이 몰역사적이며 가벼운지 생각할수록 나라의 앞날이 염려스러워 밤새워 불을 밝히고 이 글을 썼다.

이제 우리도 '배알이 있는 국민' '생각하는 백성' '품격 있는 겨레'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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