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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자라는 욕심, 한 달 새 5년은 늙은 것 같다

[고향집 다시 짓기] 집짓기를 마무리하는 즈음에야 보이는 것들

등록 2024.05.20 18:22수정 2024.05.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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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며 했던 고민들, 집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챙겨야 했던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집은 분명 '사는 (buy)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담아내야 하는 '사는 (live) 곳'이니까요.[기자말]
'사모님', 1.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2.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3.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장님, 저 사모님 아니에요! 티브이에서 보는 사모님들처럼, 근사한 정원을 할 만큼 부자도 아니고요. 돈도 없는데, 엄마는 자꾸 조경을 해야 한다고 하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을 짓는 동안 나는,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현장소장님께나 건축주였지, 건축 이외의 다른 작업을 담당하는 업체의 대표님들께는, 계약의 상대이자 나이 든 (=당연히 결혼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여자에 대한 존대어로서의 '사모님'일 뿐이었다.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종종 '어머니'로 불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사모님' 호칭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비 오는 토요일에는, 처음 뵙는 조경업체 사장님에게마저 짜증을 쏟아냈다. 이런!

집을 지으며 이전엔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결국은 드러나는 것을 본다. 근사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숨겼던 열등감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쌓여버린 긴장과 불안을 핑계 삼아 삐져나와서는 끝내 주변에 들키고야 만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정상의 삶이 규정한 호칭에 익숙해져야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지 않았어도, 사회는 나를 어머니나 사모님으로 불렀다. 그때마다 바로잡는 것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들릴 때마다 여전히 불편했다. 그게 열등감이 아니면 뭐겠나?

'사장님이 없는 사모님'도 당연한 사회가 돼야 하는 건데, 어쩐지 그날 나는 그 호칭이 더 신경이 쓰였다. 끝까지 몰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엉뚱한 곳에서 폭발해 버렸다. 


기묘한 4월... 엄마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작정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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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조와 관로공사 집의 건축과는 별도로 다양한 공사들이 마무리되어야 준공심사를 신청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4월 말 정화조를 묻고, 집에서 배출되는 폐수와 빗물을 받아낼 수 있는 관로 공사를 완료했습니다. ⓒ 이창희

 
결국 나를 이렇게 몰아간 것은 '돈'이었다. 잔금 5퍼센트를 지불하고 나면 은행의 잔고는 바닥이었고, 공사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건축은 입주청소만 남겨둔 상태였고, 청소 일정을 기준으로 정화조를 포함한 관로 공사, 외부의 석재 작업, 블라인드나 에어컨 설치 등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부족한 것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기묘한 4월이기도 했다. 은행 잔고의 압박으로 외면해왔던 작업을, 마침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붙박이 가구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주말이었다.

"어디여? 오늘 시간 있어? 내 친구 중에 조경업체 하는 놈이 있어. 그 애한테 동생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 시간 맞춰서 한 번 만나봐."

외사촌 오빠의 전화였다. 알고 보니 엄마는 내가 공사장에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오빠는 현장에 있는 동안 당신의 친구인 조경업체 사장님을 소개하시겠다는 거였다. 갑자기 바닥난 잔고가 떠오르며 식은땀이 흘렀고, 불안은 엉뚱하게 엄마를 향했다. 집을 짓는 동안 엄마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작정했는데, 결심은 하나도 남김없이 실패하고 있다.

"엄마, 나 이제 돈 없어.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자꾸 조경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근사한 정원에서 살았다고, 계속 조경 얘기를 하냐고?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할 테니까, 자꾸 주변 사람들 말만 듣고 나한테 뭘 더 하라고 하지 마!"

이웃의 수저 개수까지 알고 있다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고향의 집이 다시 지어지는 것은 흥미진진한 사건이었다. 30년도 넘게 자리를 지켰던 아빠의 집은 사라졌고, 엄마는 겨우내 공사장에 놓인 컨테이너에서 고생하고 계시니, 공사의 과정은 경로당을 중심으로 동네에 생중계 될 수밖에 없었다.

뭐든 참견하기 좋아하는 시골이지만, 집이 지어지는 동안은 견딜 만했다. 공사장 한가운데에서 집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시공팀을 제외하면 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완성된 집이 눈앞에 드러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집 외벽이 너무 하얀데. 더러워지면 어쩐다니."
"전봇대가 시야를 가리네, 그냥 둘 거야?"
"가스는 저렇게 통으로 둘 건가? 다들 탱크로 놓던데."
"집 앞에 너무 큰 나무가 있으면 안 된대. 옮길 거지?"
"조경이랑 다 정리가 되어야, 집들이도 하고 사돈 어르신들도 초대하지."


엄마가 내게 전하는 말들은 다양했다. 엄마의 희망 사항이나 걱정은 물론이고, 집 짓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언까지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집이 다 지어진 상황에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거나, 대부분은 잔고가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라 진행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가능하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건축을 마무리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결국은 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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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의 정원 예전 고향의 집 앞에는 이렇게 낮고 작은 정원이 있었습니다. 처음 이사오시면서 아빠가 심으신 식물들이, 3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이 아이들을 적당한 곳에 옮겨서 새로운 정원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 이창희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결국은 나 때문이다. 애써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자라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욕심이었다.

집이 완성될수록,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낼수록, 하고 싶은 것들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나였다. 그때마다 예산을 핑계로 스스로를 돌려세웠지만, 스멀스멀 커지는 욕심을 가장 잘 아는 것도 역시 나였고, 그걸 엄마의 탓이라며 엉뚱하게 몰아세운 것도, 비겁한 나였다.

이런 사정으로 가뜩이나 날카로워진 주말 아침 조경 사장님을 만났고, 그동안 대수롭지 않았던 '사모님'을 꼬투리 잡아 짜증을 낸 것이다.

"소장님, 결국 모든 건축주가 이렇게 되는 건가 봐요."
"저 요즘, 계속 늙고 있네요. 그렇죠?"


그날의 사건을 현장 소장님께 털어놓으며,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내가 늙지 않았다면, 이는 현장을 온전히 현장 소장님께 미뤘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제야 깨닫는다. 복잡한 건축의 과정이 끝나고,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몇몇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짜증이 폭발해 버리다니!

이런 식이면 첫 기사에서의 호언장담도 쓸어 담아야 할 판이다. 이미 5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다(관련 기사: '집 지으면 10년 늙는다'는데, 아직은 그저 좋아요 https://omn.kr/272k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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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작업 전, 일단 흙부터 채워 넣었습니다. 주택공사를 하면서 땅의 높이가 달라져서, 공사가 끝나고 주변의 흙을 일정한 높이로 복원하는 되메우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여기까지 마무리를 하고, 준공을 위한 서류 심사를 신청했습니다. ⓒ 이창희

 
지질한 사모님과의 첫 미팅이었지만, 조경업체 사장님은 '이런 사람 많이 봤다'라는 경험에 근거한 듯 너그러우셨다. 현장을 돌아보며 제안하신 사장님의 계획은 충분히 솔깃했고, 마음속에 숨기지 못한 욕심도 모두에게 들켰으니 결국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조경 사장님께 예산 사정은 이미 말을 했으니, 견적이 오는 대로 작업 범위만 일부 조정해서 계약을 할 생각이다. 5월이 한창인 지금, 집 건축은 준공 심사를 위한 서류 작업만 남았고, 조경공사만 마무리하면 1년을 넘게 끌어온 고향 집 다시 짓기의 모든 과정이 끝이 난다.

공사기간 내내 끝없이 웃었고, 아주 많이 행복했지만, 결국은 화를 내며 울기까지 했으니... 이제 내게는 무엇이 더 남았을까? 제발 더 늙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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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상징은 너로 정했어! 봄이 되면, 고향집은 하얀 목련이 환하게 밝히는 계절을 지나칩니다. 매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올해는 현장의 사진으로 이렇게 보네요. 앞으로도, 우리 고향집의 상징은, 이 하얗고 커다란 아빠의 목련으로 하겠습니다! ⓒ 하규하

#고향집다시짓기 #열등감 #조경공사 #사모님 #10년노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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