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보길도...딸과 함께 '뚜비뚜바'

[공모-여행지에서 생긴 일]

등록 2012.06.12 17:48수정 2012.06.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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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 박영금

세연정 ⓒ 박영금

목포가 고향인 내게 남도여행은 익숙한 편이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한 남도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덩어리라고 생각한다. 남도의 대표적인 여행지 중 하나인 보길도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섬으로, 조선 당대의 최고 문객인 윤선도가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등을 만들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내면서 <어부사시사>와 같은 뛰어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기도 하다.

 

큰 딸과 함께 보길도를 향해 떠나는 나의 마음은 초행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초등학생이 처음 소풍을 가는 듯 한없이 설렜다.

 

두 딸의 엄마인 나는 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사랑보다는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주면서 키웠던 것 같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도 한참 후, 문득 '과연 딸들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원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딸들이 나의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면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딸들이 결혼을 하면 그들 또한 엄마가 될 터인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엄마인 나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작은 딸이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큰 딸과 둘이서, 작은 딸과 둘이서, 때로는 두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공정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2011년 1월 '윈난, 차마고도'를 다녀왔다. 처음 경험해본 후 알게 된 공정여행의 최대 매력은 현지인들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윈난을 다녀온 후 공정여행 인터넷 까페를 드나들며 새로운 여행을 꿈꿀 만큼 그 경험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던 중 번개처럼 이루어진 이번 1박 2일 보길도 여행이 눈에 띄었고, 작은 딸이 바빠 큰 딸과 둘이서만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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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 ⓒ 박영금

동천석실 ⓒ 박영금

윤선도에게 보길도는 치열한 선비의 삶을 살다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 되어 말년을 보낼 수 있게 한 멋진 선물이었을 것 같다. 우리의 전통정원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인생과 자연의 섭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활공간이다.

 

한국 3대 정원 중의 하나로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아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세연정, 그 양 옆에 자리한 연못 세연지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기도 하고 무희들의 춤사위를 감상하며 즐기는 유유자적한 고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문과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주거공간인 낙서재와, 아들 학관이 머물던 곡수당을 감상하고 나니 그의 말년이 부럽기까지 했다.

 

이곳을 나와 상류의 부용동쪽으로 1.5㎞ 정도의 동백나무와 소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 산비탈에 1칸 정자인 동천석실이 있다. 부용동 최고의 절경이라고 극찬했던 동천석실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잠시 고산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사방이 확 트여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내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茶)를 즐겼던 차 바위를 보니 금방이라도 고산이 딸과 내게 풍미 있는 차를 대접하기 위해 인자한 미소를 띠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윤선도의 낭만, 사랑, 지혜로움이 곳곳에 스며있는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통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돋보이도록 조성한 그의 자연 사랑과 미적 센스, 깊고 그윽한 일상의 편린들을 호흡하며 <어부사시사> 중 떠오르는 구절들을 딸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흥얼거리니 고산과 하나가 되는 듯하였다.


앞바다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부가에 홍이나니 고기도 잊겠노라.

정승을 부러 할까 만사를 생각하랴.

낙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가깝도다.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찌그덩 찌그덩 어사와

외로운 배에 삿갓 쓰고 흥에 겨워 앉았노라.

 

첫날 일정을 마친 후 늦은 밤, 솔 내음과 파도소리를 벗 삼아 마시는 술은 신들이 마시는 엠브로시아와 같다. 술과 함께 경계를 허물고 길벗들과의 무르익어가는 이야기들, 웃음소리…. 격을 파한 후에 오는 자유로움 속에서 신선이 된 듯 흥에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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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해수욕장 ⓒ 박영금

몽돌해수욕장 ⓒ 박영금

다음 날 오전의 하이라이트는 검은 몽돌해수욕장이었다. 탁 트인 바다를 덮고 몽돌 위에 누워 수많은 몽돌들이 파도에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딸들이 어렸을 때 함께 배운 바이올린의 선율과 어우러지는 듯 했다. 그 순간 내 귀는 소라껍질이 되어 색다른 아름다움과 교감할 수 있었고, 어렸을 적 사랑스러웠던 딸들의 모습들이 떠오르며 몸과 마음이 이완됨을 느꼈다.

 

조선의 대 성리학자, 유교주자학의 대가로 송자(宋子)로 불리운 송시열이 숙종에게 왕세자 책봉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83세 나이로 제주도 유배 길을 가던 도중 풍랑으로 보길도에 머물며 백도리 바닷가 바위에 오언 절구 시를 남겨 놓은 '송시열 글 씐 바위' 그곳에 새겨진 시에는 당시 세상에 대한 한탄과 임금에 대한 원망이 배어 있지만, 주변경관은 물빛, 바위모습이 어우러져 최고의 절경으로 다가왔다. 이 아름다움과 그 옛날 송시열의 참담한 심정이 대비되며 오는 처연함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 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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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글씐바위 ⓒ 박영금

송시열 글씐바위 ⓒ 박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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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글씐바위1 ⓒ 박영금

송시열 글씐바위1 ⓒ 박영금

이번 여행의 대미는 애드리브로 진행된 대흥사에서 장식했다. 대흥사는 천오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로 초의선사가 이 땅에 차 문화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가족과 함께 친정에 다니러 갈 때면 남도일대의 이름난 곳들을 둘러보고는 했었다. 대흥사 입구에 이르자, 어느 해 인가 대흥사 입구 계곡에서 사촌들과 함께 물장구치며 신나게 놀던 어린 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떠올라 딸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자 딸은 "엄마, 정말 내가 그랬어?"라며 밝게 웃는 얼굴이 천사처럼 해맑다.

 

여행은 떠나는 목적지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상호작용을 하면서 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느낌들이 사뭇 달라지는 데 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번 보길도 여행은 큰 딸과 함께하며 어린 시절의 딸의 모습과 행동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추억에 젖어보고, 생김새만큼이나 생각과 성격, 감성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길벗들의 개성과 마주하면서 그들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뿜어내는 다이내믹한 에너지가 즐거움을 배가 시킨 멋진 여행이었다. 더불어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자매처럼, 때로는 삶의 멘토로 내 곁에 머물러있는 딸의 존재를 이번 보길도 여행을 함께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 엄마로서 더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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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들과 함께 솔향기에 취하다 ⓒ 박영금

길벗들과 함께 솔향기에 취하다 ⓒ 박영금
덧붙이는 글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공모 응모 글입니다
#내사랑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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