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족' 아이들의 글씨체, 보신 적 있나요?

[학생부장 일기 14] 신언서판? 아주 먼 옛날 얘기

등록 2012.05.21 10:27수정 2012.08.2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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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다섯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이른바 선다형 시험 문제가 대폭 줄어들고, 그 자리를 주관식 시험이 채우고 있다. 불과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정답이 한두 단어의 조합인 단답형이었지만, 요즘엔 글자 수의 제한까지 두는 서술형이 대세다. 정부와 교육청에서도 서술형 시험을 평가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OMR카드에 사인펜으로 마킹하는 선다형의 경우 컴퓨터가 다 알아서 처리를 해주니 문제 출제에만 신경을 쓰면 되지만, 서술형 문제는 채점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든다. 출제하고 채점하는 교사 입장에서 보면 무척 까다롭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도 교육적 견지에서 보면 당연할뿐더러 외려 때늦은 감마저 드는 평가 방식의 획기적 변화다.

이번 중간고사에는 욕심부리지 않고 네 문항을 출제했다. 이미 출제할 내용에 대해 살짝 언급을 해 둔데다 길어봐야 100자 이내로 쓰는 문제이니 그리 어려워하거나 낯설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서술형 문제의 출제로 시험 시간이 다소 길어져, 되레 시험을 너무 빨리 끝내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다.

문제가 평이했던지 일찌감치 시험을 끝내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친구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내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모든 교실의 답안지를 학급별로 수합했고, 서둘러 채점을 했다. 과목별 모든 성적이 합산되어야 하는 까닭에, 욕먹지 않으려면 며칠 내로 서술형 답안의 채점은 물론 점수 확인까지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채점하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정답을 확인하고 채점 기준에 따라 부분 배점을 부여하는 것이 고민스러웠던 게 아니라, 아이들이 답이라고 써놓을 글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우선 맞춤법부터가 엉망이고, 서술형이라 밝혔음에도 단답형으로 답을 적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거기에 필체가 괴발개발이어서 '판독' 자체가 곤란한 경우조차 허다했다.

'외교문서'를 '왜교문서'로...맞춤법에 서툰 아이들

'외교 문서'를 '왜교 문서'라거나, '정치체제'를 '정치채제'로, '무릅쓰다'를 '무릎쓰다'로 혼동해 적은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듯 맞춤법조차 서툰 아이들에게 내용을 요약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서술하라는 요구는 어쩌면 애초 무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개중에는 국어 시험도 아닌데 의미만 통하면 되지 않느냐며 부분 점수를 달라는 '뻔뻔한' 아이들도 있었다.

명색이 고등학생이 초등학생 받아쓰기 수준도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부할 때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하는 아이들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마치 욕설을 연상케 하는 그들 또래의 은어가 범람하면서 언어생활이 천박해지고 나아가 맞춤법이 무력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숫제 인터넷에서 떠도는 은어가 고스란히 답안지로 옮겨지는 모양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서툴지언정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기실 이는 국어 교과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영어, 수학과 더불어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도구 과목이자 수험 과목으로 변질돼버린 탓이다. 어느 과목이 안 그럴까마는 국어 수업조차 수능을 대비한 문제 풀이 위주여서 글쓰기란 사치에 가깝다.

문장으로 풀어 쓸 자신이 없었던지 핵심 단어만 몇 개 나열한 게 수두룩하고, 글자 수에 맞춰 쓴 답안이라고 해봐야 논리도 타당성도 없이 그저 교과서 내용을 암기하다 만 듯 어설픈 답안이 대부분이었다. 수학의 공식뿐만 아니라 문제 풀이 과정조차 달달 외워서 쓰는 아이들인데, 하물며 역사 과목임에랴.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마치 숙제처럼 했던 일기를 여전히 쓰고 있다는 고등학생은 더 이상 없다. 하긴 1년 365일,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순례하는 아이들이 '한가하게' 일기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잖은가. 가방 속에 시집 한 권쯤은 늘 넣고 다녔던 '문학소년'도 없고,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는 경우는 장래에 농부가 되겠다는 아이만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맞춤법에 서툴고, 글쓰기 능력이 떨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차마 읽어내기 힘든 아이들의 괴발개발 필체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발가락으로 써도 저보단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단 몇몇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의 필체가 엉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치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을 보는 듯한 아이들의 답안지를 보노라니 채점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필기 능력이 급격하게 퇴화해버렸다. 요즘엔 눈으로만 읽으려할 뿐, 연습장에 손으로 써가며 공부하는 아이는 거의 없고, 교사가 칠판에 판서하는 것을 공책에 받아 적는 아이 역시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고육지책으로 그날 공부할 내용을 미리 인쇄물로 만들어 수업 시간에 나눠주는 교사가 많다. 말하자면, 공책 정리를 대신 해주는 셈이다.

예전에는 미술 시간에 한 꼭지로 배우기도 했고, 교내 서예 대회 등이 열려 붓글씨를 쓸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이젠 학교에서 벼루에 먹을 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역사관 등에 전시된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풍경이 됐다. 벼루나 먹, 붓은 고사하고 가방에 필통조차 넣고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그들의 가방에 필기도구는 없어도 스마트폰 만큼은 잊지 않고 챙긴다. '스마트한 환경'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는 펜으로 메모하는 것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나아가 엄지손가락으로 글자를 입력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리하다. 아이들은 아예 펜과 수첩을 들고 다니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고 번거롭게 느낀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과거 필체는 사람됨을 판단하고 인물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여겼고, 필체를 다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은 서예(書藝)가 아닌, 서도(書道)라 하여 인격을 수양하는 행위로 삼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공자 왈 맹자 왈'일 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돼버렸다.

서툰 글씨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툰 글씨체는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갓 부임한 젊은 교사들이 토로하는 가장 큰 고충이 바로 칠판 글씨를 잘 못 쓰겠다는 거다. 분필을 연필 잡듯 하고 칠판에 삐뚤빼뚤 판서 내용을 적어가노라면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고 한다. 그럴 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

이른바 '엄지족'의 등장은 교실 수업의 풍경을 180도 바꿔놓게 될 게 뻔하다. 전자 교과서가 등장하면서 종이 교과서와 공책이 사라질 테고, 칠판에 판서하는 대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을 활용한 원격 수업이 이뤄질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누군가 수첩에 펜을 들고 메모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신기해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판독' 자체가 어려운 아이들의 필체가 그들의 거친 정서를 닮았다고 하면 섣부른 판단이 될까. 답안지에 삐뚤빼뚤하게 적혀있는 건 그들의 글씨가 아니라 헝클어진 그들의 마음가짐이다. 한 명 한 명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노라니 수업 시간 겪어본 아이들의 성격과 글씨체가 어쩌면 그렇게 꼭 들어맞는지.

고등학생에게는 조금 유치하긴 해도, 수행평가 삼아 이따금씩 공책 검사를 하면 어떨까 싶다. 또, 교과서 내용 베끼기 같은 숙제도 가끔 내줘야 하겠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낡은 방식의 과제를 부과하느냐며 따져 물을 테고, 그들을 설득할 답변을 어떻든 마련해야 할 테지.

이건 어떨까.

"너희들 나중에 대학 졸업해 회사에 취직할라치면 '자필' 이력서를 제출해야 하거든. 미리 연습한다 치고 글씨체 좀 신경 써라. 지금처럼 썼다간 살펴보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쳐박히게 될지도 몰라."
#엄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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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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