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교 광신도'를 추앙하자? 제정신인가

[取중眞담] 안현태 전 경호실장 현충원 안장에 대하여

등록 2011.08.11 20:59수정 2011.08.1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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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5공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씨의 발인식이 열린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재향군인회원들이 고인의 영정을 향해 경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6일 대전 국립 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된 고(故) 안현태씨.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그는 육군사관학교(17기)를 졸업한 '하나회' 출신으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과 공수여단장 등을 거쳤다.

안씨는 허화평, 허삼수, 김진영씨 등과 하나회 동기이지만 12∙12 군사반란을 주도적으로 실행했던 이들과는 달리 12∙12와 5∙18 당시에는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다.

안씨는 5공 당시인 1985년 장세동씨가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호실 차장에서 경호실장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주군'에 대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충성심을 과시했다.

전 전 대통령 재임시절 수백 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지난 1996년 징역 2년6월, 추징금 5000만 원을 선고 받는다. 당시 안씨가 구속 수감되면서 남긴 말은 군 형법상 반란수괴 혐의 등으로 이미 구속된 전 전대통령을 지칭,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돼 너무 기분이 좋다"는 것이었다. 어느 수사검사의 말대로 "전두환교(敎)의 광신도들"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안씨는 수감생활 이후에도 전 전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5∙18에 대한 삐뚤어진 견해를 밝히는데도 주저치 않았다. 1999년 5월 17일자 <문화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안씨는 "당시 시민군이라는 분들,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분들도 무장했다"며 과잉진압의 원인제공을 시민군이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폭동진압이 잘못 왜곡되는 현실에 허물 수 없는 벽을 느낀다"고도 했다. 이처럼 안씨는 12∙12 쿠데타 이후 10여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렸던 군부 쿠데타 세력의 일원이었다.

앞뒤로 안장된 안씨와 고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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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대전현충원 제2장군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안현태의 묘. 그 바로 뒤로 '장태완' 장군의 묘가 보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안씨가 묻힌 대전 현충원 장군 제2 묘역에는 고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묘소도 있다. 안씨의 묘비가 178번, 지난해 7월 26일 작고한 장 전 사령관의 묘비는 132번으로 두 사람은 한줄 앞뒤로 안장돼 있다. 두 묘비 사이의 거리는 10여 미터 남짓, 하지만 생전에 두 사람이 걸어갔던 길은 사뭇 달랐다.


평생을 야전 군인으로 살았던 장 전 사령관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한 참 군인으로 평가된다. 불같은 성격의 그가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쿠데타군에게 "이 반란군 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 내 전차와 포를 갖고 가서 모조리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라고 일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합법적인 명령계통을 무시한 하나회의 병력 동원에 장 전 사령관은 탱크와 병력을 보내 진압을 시도했지만, 수경사 장교 450여 명 중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60여 명뿐이었다. 대부분 하나회라는 사조직의 지령에 따라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자리를 이탈한 상황이었다.

쿠데타 성공 직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 전역 당한 그의 인생은 불우했고, 또 처절했다. 강제 전역 당한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옛날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막걸리 외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별세했다. 1982년에는 외아들 성호씨마저 집을 나간 지 한 달 만에 경북 왜관 낙동강 인근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장 전사령관은 생전에 펴낸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아들 잃은 슬픔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칠 듯이 아들놈 생각이 나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은 채 묘지로 달려가서 대성통곡도 해보고, 그러다가 지쳐버리면 그 놈 옆에 누워서 밤을 같이 새워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사건 직후부터 화병에 시달렸던 그는 하루 세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독한 술을 들이켰다. 수면제를 먹고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십여 가지의 약을 달고 살아야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 1987년에는 10여 시간의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고, 2008년 6월 폐암으로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쿠데타'에 관련한 책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장 전 사령관의 별세로 이 책은 영영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장 전 사령관이 자신의 묘 근처에 안현태씨가 안장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현충원 안장 거부된 고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강창성 전 사령관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 아버님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을 보시는 것이라고 하세요."

고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장녀 강정현(56)씨는 10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980년 신군부에 협력을 거부했던 강 전 사령관은 외환관리법 위반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아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강 전 사령관의 유족들은 "하나회 해체에 앞장서고 신군부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3년 형을 선고 받았다"고 주장한다.

강 전 사령관과 정치군인들의 악연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은 당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식사하던 중 "형님이 각하의 후계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처벌받은 사건이다. 윤 사령관은 1961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대리를 지낸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후원자였다.

윤 사령관의 발언은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대노한 박 전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군본부 진급 인사실 보좌관 김성배 준장 등 이른바 '윤필용 그룹' 10명이 각각 1∼15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당시 하나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준장과 노태우 대령 등은 박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히려 역풍을 맞았던 것은 사건을 조사했던 강 전 사령관이었다. 그는 좌천되어 대전의 3관구 사령관을 끝으로 중장으로 예편당하게 된다.

이후 해운항만청장을 역임했던 강 전 사령관은 1980년 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초대로 국정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두환 장군이 집권욕을 드러내자, "이번만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뽑은 민간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며칠 후 강 전 사령관은 돌연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된다. 구둣발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이 장롱 속에서 찾아낸 1300달러가 외환관리법 위반의 빌미가 됐다. 강 전 사령관의 유족들은 '이 돈은 해운항만청장 시절 출장을 갔다가 남은 돈을 넣어 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혐의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도 청마다 로비자금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마련한 당시 관행을 마치 개인비리인 양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유족들은 주장했다.

1981년 징역 3년에 추징금 2500만 원을 선고 받은 강 전 사령관은 항소를 포기했다. 강 전 사령관의 차남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당시 아버지께서는 어차피 정치적으로 보복을 당하는 거니까, 항소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아버지가 신군부의 정치보복에 희생당해 억울한 누명을 쓰셨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드러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당연히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 전 사령관은 영등포 교도소 수감 중 혹독한 순화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져 그의 혐의가 정치적 보복에서 비롯되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강 전 사령관은 생전에 "한국전쟁 때부터 힘든 군 생활을 해서인지 군 시절 어떤 훈련도 힘들게 느낀 적이 없었지만 순화 교육은 훈련이 아니라 아예 사람을 잡는 그런 살인적인 고문에 가까웠다, 나 자신도 어차피 당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깨물면서 훈련을 받았고 이후 몸은 완전히 엉망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강 전 사령관과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이신범 전 한나라당 의원도 교도관들이 "위에서 강 장군이 훈련 받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보내라고 한다"며 난감해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2006년 3월 국가보훈처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의는 강 전 사령관이 3년형을 선고받아 2년 반 가량 옥고를 치렀던 전력을 문제 삼아 국립묘지 안장을 부결시켰다. 보훈처는 당시 "금고 2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 받은 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으며 일부 생계형 사고를 냈다면 심의를 통해 안장이 허용되도록 한다"는 심의기준을 공개했다. 강 전 사령관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포천의 선산에 있다.

11일 오후 2시 5.18 구속부상자회 회원 100여 명이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 앞에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김도균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 "한나라당, 5공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고 안현태씨의 국립 현충원 안장으로 촉발된 찬반논란은 이후 역사논쟁으로 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11일 오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5공비리의 주역으로 처벌을 받은 분이라면, 안장 자체가 영예가 될 수 있는 국립묘지 안장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히 권 의원은 "과거 독일이 나치독일의 잘못된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했기 때문에 독일이 지금 국제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듯이 우리 한나라당도 5공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5공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고치고, 잘못된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5·18기념재단, 5·18유공자 단체, 평화재향군인회 등으로 구성된 '반민주인사국립묘지안장반대국민위원회'도 11일 오후 국가보훈처 정문 앞 시위를 통해 안현태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규탄하고 안장 철회를 촉구했다.

안씨의 현충원 안장 논란을 계기로 하나회로 상징되는 군부 내 사조직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해악과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 정치를 후퇴시키고 국민들을 방황케 만들었는지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충원 #안현태 #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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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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