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피살자는 '산상수훈'에 반하는 인물?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37회)] 단상(斷想)

등록 2009.11.10 08:22수정 2009.11.1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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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희생자인 이상준은 국가안전보위부 함경북도 책임자였다. 그는 도 보위부 간부로 있을 때, 부장이 반체제 관련 문건을 결재하지 않고 지연시킨다고 밀고해 부장으로 승진 임명된 사람이었다. 주로 지방에 근무한 그의 행적은 많이 알려진 것이 없었다. 다만 그가 최근에 한 일 중에서 두 가지가 서류 기록에 담겨 있었다.

이상준은 부산 아시안게임에 응원단으로 남한에 갔다 온 여학생 하나가 고향인 함경도에 와서 남조선에 대해 얘기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이상준은 그 여학생을 보낼 때에 그녀에게 서약을 받아 놓은 것이 있었다. '적지에 가면 장군님의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돌아오고 나서도 남조선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절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받아 놓았었다.

이상준은 여학생을 일주일간 신문하여 그녀로부터 응원단 중 남조선을 좋아한다는 여학생 21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그는 평양 국가보위부 본부에 응원단 여성들의 반동적 행태를 처벌해야 한다고 상신했다. 그 결과 21명의 여성이 체포되어 이상준의 구역인 단천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한 일이 있었다.

얼마 전 북한의 함경북도에서는 김정일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벽보가 나붙었다고 했다. 중국 국경에 근접한 회령 시내의 한 공장과 마을 입구의 다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은 '자유청년동지회' 명의로 제작된 벽보였다. 이를 보고 받은 이상준은 중대 병력을 끌고 가 공장과 마을을 무자비하게 수색, 수사하여 무려 68명을 투옥했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주동자 급들은 거의 중국 땅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68명 중 혐의가 있는 사람은 채 10명도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평소에도 그는 북한 주민들의 투쟁력이 날로 약화되고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통일의 붉은 전사로서 제국주의자들을 하나라도 더 없애고 죽는 것이 꿈인데, 갈수록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며 개탄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는 북한 체제에 확신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가 될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그는 6·25 이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박헌영이나 이강국 등은 모두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들이었다고 했다.

이상준의 몸에는 'THE ULTRALEFT'(극좌)와 'B.K'가 씌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조수경과 김인철은 북한 측이 보낸 차량에 올라탔다. 김인철은 희생자의 신상과 등에 쓰인 글씨를 메모한 쪽지를 조수경 앞으로 내놓았다.


1. 20대 여. 인민배우, IGNORANCE(무지), B. K.
2. 40대 여. 카드섹션 책임자, THE TOTALITARIAN(전체주의자), B. K.
3. 50대 남. 김일성대학 교수, SELF-RIGHTEOUS(독선), B. K.
4. 40대 남. 국가안전보위부 간부, THE ULTRALEFT(극좌), B. K.

"범인은 남·북한 모두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방해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죽인 것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방해한다면, 즉 '하나의 Korea'를 방해한다면, 선배님, 앞 글자 B는 방해한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조수경은 김인철의 추리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대답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추리는 매우 추상적이고 여전히 광범위했다.

"김 경감, 산상수훈 알지?"
"신약성경 말씀인가요?"
"그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여."

김인철은 조금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배 말대로 통일 반대 세력이기도 하지만 산상수훈에 반하는 개념들이기도 하거든."

조수경은 아브라함을 떠올렸다. 자동차는 높이가 170m나 된다는 주체탑과 멀어지면서 달리고 있었다. 김인철이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보며 말했다.

"저것은 전차 같은데 궤도가 없군요."

운전기사가 김인철의 말을 들었는지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굴절버스'라고 부른답니다."

조수경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저 앞의 차가 '휘파람'인가요?"
"그렇습니다. 평화자동차입니다."

조수경은 김인철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통일교에서 하는 회사야."
"오마이 갓, 미스터 문 말인가요? 문(moon),선(SUN),명(明). 달도 밝고 해도 밝다는 그 통일교 교주 말이지요?"
"그렇게 되나?"
"제가 보기로는 머리만 밝더군요."

조수경은 사진으로 본 문선명의 대머리를 떠올렸다. 그들은 30분쯤 후 평양의과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유천일과 그의 부하로 보이는 청년이 병원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천일은 정중히 조수경에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유천일은 키가 훤칠한 청년을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법의학을 전공한 우리 수사대원 안동준입니다."

그는 김인철 또래의 젊은이였다. 조수경과 김인철은 안동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희생자들의 사체가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단상(斷想)

강물 위로는 아직 엷은 안개가 남아 있었다. 조수경은 강으로 골프공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양각도 호텔의 골프 연습장은 시설이 서울의 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망이 없이 공을 강물로 날리게 되어 있는 점이 이채로웠다. 골프연습장에서 빌린 골프채는 나무랄 데 없었다. 타석에는 서양인 남녀 몇 사람과 북한 노인 두셋이 샷을 하고 있을 뿐, 연습장과 주변은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조수경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을 날릴 때마다 어제 본 사체에서 발견한 징후들을 하나씩 반추하고 있었다. 먼저 카드섹션 지휘자라는 여성과 김일성대학 교수는 남한의 희생자들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다. 예리하고 뾰족한 흉기로 심장이 찔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체에는 아무런 증거물이 없었다. 아무리 용의주도한 범인이라 할지라도 남북한 합쳐 벌써 다섯 차례가 넘는 범행에 지문을 전혀 남기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범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장갑을 벗는다든지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으로라도 사체에 손을 대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범인이 희생자의 손발톱에 지문이나 타액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수경은 북한의 지문 채취 방법을 유천일에게 물었었다.

"모두 옥도가스를 사용한 기체법으로 조사했습니다."

그것은 옥도가스를 잠재지문의 지방분에 작용시켜 다갈색으로 착색되는 부위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방법이었다.

"손톱이나 발톱도 하셨나요?"
"손톱 틈새는 깨끗했습니다."

손톱이 깨끗했다는 것은 희생자가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추정의 단서였다. 하지만 조수경이 물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극좌 #전체주의자 #인민배우 #산상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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