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30 06:01최종 업데이트 23.08.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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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 모습. ⓒ 연합뉴스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운동가 홍범도·김좌진·이회영·지청천·이범석의 흉상을 철거하고, 대신 그곳에 백선엽 흉상을 설치하는 것을 검토해 왔다. 단순히 백선엽 흉상을 추가하는 수준의 계획이 아니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맞교환하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어느 쪽에 더 끌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홍범도의 공산주의 경력을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김좌진·이회영·지청천·이범석은 애초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이회영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 또 이범석은 이승만 정부의 초대 총리였다. 


지금 추진 중인 조치는 공산주의 진영의 독립투쟁에 대한 거부감을 반영한다기보다는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거부감을 반영한다. 위 다섯 인물 중에서 장군 칭호와 선뜻 연결되지 않는 이회영의 흉상까지 치우겠다는 발상이 이를 증명한다.

우당 이회영 흉상까지...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을지로에 자리한 이회영 선생 동상 ⓒ 김종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는 우당 이회영(1867~1932)은 6형제를 비롯한 총 59명의 혈족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일화로 유명하다. 한국 최고의 명문가, 삼한갑족(三韓甲族,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이 가문은 많은 혈족뿐 아니라 재산 상당 부분도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 돈은 신흥무관학교나 경학사(민족학교) 등에 들어갔다.

일본은 식민지 한국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 일반 대중과 기득권층을 분리했다. 대중의 권익은 마구 짓밟으면서도 양반 지주들의 기득권은 가급적 지켜줬다. 이는 특권층 내에서 독립운동가가 적게 배출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투사 정정화는 <장강일기>에서 1910년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일본은 당시 독립운동에 귀족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대외에 내세웠다"라고 회고했다.

그런 식으로 일본은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삼한갑족 이회영의 독립운동은 선전전에 방해가 되는 사례였고, 그래서 일제는 이회영을 특히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이회영은 또 다른 이유로도 일본을 성가시게 했다. 그는 베이징의 일본 조계지 내에서 중일합작은행을 털어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 군용 선박의 선체를 파괴했다. 또 톈진의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약산 김원봉 스타일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이회영 체포조까지 꾸린 것은 그의 무장투쟁이 그만큼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회영과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은 김원봉처럼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선 투사들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일제 당국자들의 시선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선이 지금 윤석열 정권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교과서에서 '무장 투쟁' 비중 낮추려던 박근혜 정권
 

왼쪽은 박근혜 정권 당시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교과서 고교 한국사. 오른쪽은 비상교육에서 나온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 오마이뉴스

 
그런 소름 끼치는 일이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 때도 있었다. 박근혜 정권 역시 무장 투쟁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교육부에 의해 구성된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2018년에 펴낸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백서>에 따르면, 당시의 청와대는 '여러 주체가 참여한 다양한 민족운동이 전개되다가 광복이 왔다'는 식으로 독립운동사를 서술하면 안 된다는 내부 입장을 2015년 9월 25일에 정리했다.

"마치 독립운동의 결과로만 해방된 듯하게 오인"될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전쟁의 결과"로 해방된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무장투쟁을 강조하면 한국 자체의 힘으로 독립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염려한 셈이다.

백서에 따르면, 당시의 교육부가 작성한 '교육적으로 부적절한 구성 사례(현 한국사)'라는 파일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파일은 기존 역사교과서의 문제점 중 하나로 "1920~1930년대 무장 독립운동단체의 과도한 나열"을 적시했다. 무장 투쟁에 대한 서술이 너무 많다고 본 것이다.

무장 투쟁이 한국사 교과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다. 그래서 교과서만으로 공부하게 되면,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힘이 없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무장 투쟁이 과도하게 서술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반 국민들과 궤를 달리하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화 작업에 동원된 국정교과서 편찬심의회는 무장 투쟁의 비중을 낮추는 대신, 다른 것에 '투쟁'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찬심의회 내의 전문위원협의회는 '외교 활동'이란 용어를 '외교 독립투쟁'으로 바꾸자고 했다가 나중에는 '외교적 독립투쟁'으로 바꾸었다.

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박정희와 더불어 이승만을 띄우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하고도 대통령 직함을 계속 사용하며 미국 외교가를 상대로 자신을 어필하는 데 주력했던 이승만을 띄우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인 양 말이다.

이승만의 주특기는 외교 활동이었다. 무장 독립투쟁의 비중을 낮추면서 굳이 '외교적 독립투쟁'이란 용어를 선택한 편찬심의회의 방침은 이 같은 이승만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데에 유리하게 활용될 수밖에 없었다.

무장 투쟁의 비중을 낮추고 '외교 투쟁'의 위상을 높인 것과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이 또 있었다. 북한의 대남 무장 활동을 부각시키도록 한 점이 그것이다. 위 백서에 인용된 교육부 문건인 'EBS 역사교육 현황 및 편향성 해소 대책'에는 무장간첩 남파 사건 같은 "북한의 도발을 추가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무장 항일투쟁의 비중은 낮추면서 북한의 대남 무장 활동의 비중은 높였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추진은 이명박 정권 때 절정에 달한 뉴라이트 운동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무장 독립투쟁을 폄훼하는 윤석열 정권의 태도가 국정 교과서 사업 때도 나타났다는 점은 무장 항일투쟁에 대한 거부감이 이명박·박근혜·윤석열 보수 정권의 DNA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보수 정권의 무장 투쟁 폄하, 이유가 있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연합뉴스

 
보수세력이 무장 투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데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기득권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 <대게릴라전 아메리카는 왜 졌는가?>에서 간도특설대가 항일 부대를 소탕하러 다녔고 자신이 추격한 항일투사 상당수가 한국인들이었다고 회고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인들의 무장 투쟁은 일본제국주의에 상당한 부담을 줬다. 간도특설대 같은 특수부대까지 만들어서 진압해야 할 정도였다.

홍범도처럼 일본군을 대파한 뒤 일본의 적인 소련과 손잡고 일본에 부담을 주는 항일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 있지 않고 소련에 숨어 체포하기 힘든 그들을 향해 일본은 공산주의자 빨갱이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또 일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상옥 같은 인물이 언제 어디서 출현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무장 투사가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했다. 김상옥은 지금의 서울 종로5가역 부근에서 일본 군경 1000명 이상을 홀로 상대하다가 스스로 순국했다. 이랬기 때문에 일제는 전쟁하는 심정으로 무장 투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의거 1년 전까지만 해도 유흥업소에서 술 마시고 데이트 상대를 찾던 30세 청년 이봉창은 "앞으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살겠다"(백범일지)며 바짓가랑이에 수류탄을 끼고 일본에 들어가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그런 뒤 죽음을 피하지 않고 순국의 길을 걸었다.

이는 운동권 학생뿐 아니라 일반 한국 청년들도 언제든지 무장 투사로 돌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같은 무장 투쟁이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한국 독립을 지지한다는 카이로 선언 같은 것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화적인 항일운동과 더불어 이런 무장 투쟁이 8·15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해방 이후의 한국을 누가 이끌었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누가 이 땅의 주인이어야 하는지를 웅변한다. 그래서 무장 투쟁의 기여도를 인정하게 되면, 친일파들이 이 나라를 장악한 일이 도둑 같은 행동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된다. 주인 아닌 자가 안방을 차지해 있는 부조리한 모순을 고백하는 모양새가 되는 셈이다.

역대 보수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윤석열 정권이 홍범도·김좌진·이회영·지청천·이범석의 흉상을 치우려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독립운동가 5명의 흉상 철거 추진이 논란이 되자, 뒤늦게 국방부는 홍범도의 흉상만 철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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