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4 13:26최종 업데이트 23.04.1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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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기자회견장에서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3.4.13 ⓒ 연합뉴스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을 떠안겠다고 3월 6일에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4월 들어 제3자 변제(대위변제)를 개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이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피해자의 유족 2명에게 합계 2억 원 상당을 지급한 사실이 13일 보도됐다.

이날 심규선 재단 이사장이 동석한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정부 해법에 수용 의사를 밝힌 대법원 확정 판결 피해자 10명의 유가족들에게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먼저 수령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8명에게는 재단 이사회의 14일 자 의결을 거쳐 지급될 것으로 알려졌다.

해괴한 논리

그런데 지급 명목이 다소 모호하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13일 정례 브리핑에서 "지난 3월 초 정부가 발표한 해법은 대법원의 판결에 따른 피해자·유가족 분들의 법적 권리를 실현시켜 드리기 위한 것으로서 채권 소멸과는 전혀 무관합니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이분들로부터 별도의 다른 문서를 받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돈을 받은 뒤에 일본 기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피해자 및 유가족의 법적 권리를 실현시켜 주기 위한 것이지만, 채권 소멸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 표명은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갖는 법적 권리에는 채권 행사가 포함된다. 그래서 피해자의 법적 권리가 실현되면 채권은 소멸한다. 그런데도 법적 권리는 실현되지만 채권 소멸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3월 16일 한일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일본 기업의 채무를 인수하되, 일본 기업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남의 빚을 대신 갚아줬으면 원래의 채무자에 대해 권리를 갖게 되는 게 원칙인데도 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이를 명확히 했다. 한국 정부의 3·6 선언과 관련해 "윤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한국 재단이 이번에 판결 대금을 지급하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며 "이번 조치의 취지를 생각해 구상권 행사와 관련해서는 현재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운운하며 윤 대통령을 치켜세우면서 '구상권 행사는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인 사살을 한 셈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한국 정부가 구상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외교부가 '채권 소멸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재단으로부터 금전을 수령한 피해자나 유족이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 등을 상대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정부가 막을 수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입장 표명이다. 

정부가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이렇게 입장을 표명했으니, 금전을 수령한 피해자 측이 이에 개의치 않고 여타 피해자와 국민들의 숙원을 위해 계속 투쟁하는 일에 대해 윤 정부가 간여할 여지가 좁아지게 된 셈이다.

윤 정부가 채권 소멸에 관한 동의서를 받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작용했다. 개인과 국가는 법적으로 별개이므로 국가가 개인의 채권을 마음대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 행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자 채권 소멸 각서를 요구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채권 소멸은 다른 말로 하면 채무 소멸이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채권 소멸을 유도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전범기업의 채무 소멸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모양새가 연출되는 것을 우려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제3자가 채권채무관계에 개입해 대위변제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채권자보다는 채무자가 더 큰 이익을 얻는다. 채권자는 제3자의 개입으로 인해 좀더 일찍 혹은 안정적으로 변제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채무자는 채권자보다 명확히 큰 이익을 얻는다. 제3자가 채무자의 책임을 소멸시키고 단독으로 채무를 떠안는 면책적 채무인수인 경우에, 채무자는 빚을 완전히 면제받게 된다. 제3자가 채무자와 함께 채무를 떠안는 병존적 채무인수인 경우에, 채무자는 연대보증인 비슷한 동지를 얻게 된다.

이처럼 채권자보다 채무자에게 더 이로운 게 채무인수에 기초한 제3자 변제 혹은 대위변제라는 사실은 지금 윤 정부가 진행하는 일의 본질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정부가 채권자인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보다는 채무자인 전범기업을 위해 일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피해자보다 전범기업 위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자국민이 아닌 일본 전범기업에 봉사하는 이 같은 모순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처한 상황에서 좀더 분명히 노출된다. 이 재단 설립의 근거 법률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 제1조는 "국가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 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재단은 피해자 및 유족을 돕는 기관이지 전범기업을 돕는 기관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재단은 전범기업의 채무를 떠안겠다며 피해자들을 접촉하고 있다. 이번 사안에 관한 한, 이 재단은 '전범기업의 고통을 치유하고 한·일 두 정부의 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일하는 셈이 된다.

이런 모양새가 연출되는 것을 막고자 윤 정부가 해놓은 조치가 작년 12월 21일의 재단 정관 개정이다. 재단의 설립 목적을 설명하는 이 정관 제1조는 "일제강제동원 피해·희생자 및 그 유족 등에 대한 복지지원사업과 피해·희생자에 대한 추념사업을 수행하고 아울러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한 문화·학술·조사·연구 등의 사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변제·지원 등 일체의 피해구제를 위한 활동을 추진"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피해자에 대한 보상·변제·지원 등 일체의 피해구제를 위한 활동"이라는 부분은 제3자 변제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작년 12월에 추가한 것이다. 2018년 2월 23일 개정 당시의 정관에는 이 부분이 그냥 "피해구제를 위한 활동"으로 표기돼 있었다.

재단 정관보다 상위 규범인 강제동원조사법은 재단이 피해자·유족에게 지급할 수 있는 돈을 위로금이나 그와 비슷한 성격의 금전으로 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위 규범인 재단 정관이 이를 무시하고 전범기업을 대신해 배상금을 지급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재단 정관은 상위 법률과 충돌할 소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세금을 사용해 전범기업을 돕는 윤 정부의 모순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규범체계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윤 정부가 강제동원조사법과 재단 정관이 충돌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은 여소야대 현실 때문이다. 강제동원조사법을 개정하기 힘든 정치적 현실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법률을 제·개정하기 힘든 윤 정부는 하위 규범인 시행령 제·개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법률을 변개하고 있다. 이는 '시행령 통치'라는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스타일이 일제 식민지배문제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재단 정관 제1조다. '정관 통치'가 이 문제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진행 중인 제3자 변제는 한국 정부가 자국민이 아닌 외국 전범기업을 위해 봉사하는 모순을 반영한다. 이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할 법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정관 통치'라는 비합법적 양상이 이를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모순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윤석열 정부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 외교부 대변인의 13일 자 브리핑이다. "피해자·유가족 분들의 법적 권리를 실현시켜 드리기 위한 것으로서 채권 소멸과는 전혀 무관합니다"라며 "이분들로부터 별도의 다른 문서를 받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는 브리핑은 전범기업의 채무 소멸을 위해 일하는 모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채권 소멸 각서를 차마 받을 수 없는 이 정부의 처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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