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위대한 권력은 항상 굶주렸지. 혁명은 자기 자식까지 먹어 치워. 저 폭주하는 피의 괴물, 저들이 해온 짓들 잘 봐." -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 No.10 '위대한 권력(The Great Machine)' 중에서

 
황제와 귀족을 끌어내리고, 민중을 착취하던 살찐 돼지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새 시대의 아침은 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재판과 처형이 반복되고, 광기와 공포가 시대를 짓눌렀다. 평등과 자유를 부르짖던 이념은 독재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스탈린은 혁명 동지들까지 잡아먹고, 대숙청을 시작했다. 1937년 소비에트 연방 휘하의 아제르바이잔도 그 핏물을 피할 수 없었다.
 
1937년 12월 31일, 소련의 어딘가(아마도 아제르바이잔)에 자리한 아파트, 언뜻 보기에 평범한 부부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당과 각하를 위해 헌신해온 남편은 무사히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을 걱정하며 기다리던 아내는 그의 귀환에 안도한다. 두 사람은 끔찍하고 힘들었던 12월 31일을 보내며, 새롭게 시작될 1938년은 조금 나은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1938년 1월 1일을 코앞에 둔 그때,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기 전 그 시각,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연출이 원하는 방향 “우먼이나 맨 같은 경우에는 연출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확실했어요. 딱 보여주고자 하는 캐릭터가 분명했거든요. 예를 들면 ‘맨은 끝까지 좀 지질했으면 좋겠어요’라든가 ‘우먼은 돌변하기 전까지는 계속 사랑스러웠으면 좋겠어요’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비지터에 대해서는 연출께서 ‘놀아주세요’ 그냥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웃음) 당연히 자유로워서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어떻게 해야 극에 도움이 될지, 이런 고민들도 들어서 어려웠어요.” ⓒ 곽우신

 

"엔카베데(NKVD)다. 문 열어!"
 
내무인민위원회, 막강한 힘을 가진 감시자들. 정치경찰의 노크 소리에 부부는 혼비백산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암시장에서 몰래 산 LP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문을 열어줄 수밖에.
 
그렇게 무대 위 문이 열리고, 녹색 코트를 걸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온다. 자신을 두고 떠난 동료들을 다시 부르겠다며 전화 좀 쓰겠다는 엔카베데 경관. 위아래로 이들을 훑던 그는, 마치 본인이 이 불쌍한 부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능청스럽게 농담을 몇 마디 건넨다. 결코 그냥 흘려듣기는 어려운 농담들에 어색하게 웃는 부부. 이 집 안의 권력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비지터(Visitor)가 쥐고 있다.
 
부부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그를 태우기 위한 차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1938년이 되기를 거부하는 듯, 시계는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계가 고장난 것일까? 엔카베데 경관은 무슨 의도로 이 집에 계속 머무르는 것일까? 관객의 눈에 비친 이 방문자는 남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이기도 하다.
 
"확실히 다른 작품의 인물들하고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식으로 나와서 극 중 인물들에게 의문을 던지고 사건을 제공하는 캐릭터 중에 여자 배우가 소화하는 배역이 많지 않기는 하죠.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아서 더 해보고 싶었어요. '비지터'는 관념적인 존재라서, 꼭 남자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거든요. 대신 '신체적 조건이나 성별이 다름으로써 내가 뭘 더 유리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좀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배우 김려원은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명이다.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소화하면서, 동시에 뮤지컬 <해적>도 올라간다. 곧 개막할 <식스 더 뮤지컬> 연습도 한창이다. 동시에 작품이 몰려서 힘들기는 하지만, 어떤 작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미드나잇>은 이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공연이 개막하고 한창 상연 중인 지난 2월,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를 맡은 김려원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번쯤 입장 바꿔 보면, 우리 힘든 거 알게 될 걸"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김려원과 비지터의 교집합 “뭐가 있지? 뭐가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웃음) 저는 평화주의자여서 싸우는 거 너무 싫거든요. 다른 사람이 저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힘들고, 제가 다른 사람한테 뭐라고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비지터를 연기할 때는 냉소적인 마음이 가장 큰 것 같기는 해요. 약간 ‘그럼 그렇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런 느낌의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태도요. 그게 가장 비지터와 잘 맞는 것 같아요.” ⓒ 곽우신

 

오래 전 그가 처음 <미드나잇>의 제안을 받았던 건 '비지터'가 아니라 '우먼(아내)' 역이었다. 여러 이유로 결국 합류하지 못했지만, 그때 대본을 봤을 때도 그는 '우먼' 보다 '비지터'에 눈이 갔다. 언젠가 여배우가 비지터를 소화하는 때가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넌지시 먼저 제안도 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제안은 현실이 된다. 남배우만 소화했던 역할에 여배우도 함께 캐스팅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첫 여성 비지터 역할이 그에게 온 것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여성 배우들이 좋은 선례가 되어 비지터를 입체적으로 잘 빚어냈고, 결과적으로 김려원에게도 기회가 찾아 왔다. 하고 싶다고 먼저 손을 들었고, 제작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일부러 제가 세 보이는 역할만 고르는 건 결코 아니에요. 최근에 강한 배역들을 하다 보니까, 제작하시는 분들께서도 저를 떠올려주시고 불러주시는 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면들이 실제로 저한테도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도 그런 게 나오는 거겠죠? (웃음) 저는 사실 '어느 방향의 인물들을 더 해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없어요. 그냥 좀 다양하게 하고 싶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다양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되게 좋아요. 비슷한 것만 하는 거는, 어떤 쪽으로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냥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거나 이 캐릭터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좀 와 닿는다거나, 저도 같이 그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게 무엇이 됐든 캐릭터 성격과는 무관하게 하고 싶은 느낌인 것 같아요. 다행히 관객 분들도 그렇고, 제작하시는 분들도 저를 잘 봐주셔서, 제가 하고 싶은 방향대로 무대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배우 김려원에게 비지터가 그렇게까지 낯선 결의 인물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어느 순간부터 확고한 방향성을 갖게 됐다. <리지>의 엠마 보든이 그랬고, <난설>의 허초희도 빼놓을 수 없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앙구스티아스는 말할 것도 없고, <해적>의 잭/메리, <헤드윅>의 이츠학, <사의 찬미> 윤심덕과 <브론테>의 에밀리까지….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시대와 사회의 억압에 맞서며 이를 어떤 형태로든 돌파해내는 인물들을 많이 맡아 왔다.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데뷔 9주년 그리고 표 ”저 그만큼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된 게 지금 괜찮은 건가 싶더라고요. 또 내가 열심히 일한 9주년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뜻깊기도 하고요. 시간이 진짜 빠르다는 생각도 들고, 그동안 정말 많은 걸 했다는 생각도 들고, 좀 복합적이에요. (웃음) 멈추지 않고,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달려와서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계속 더 잘 하고 싶어요. 계속 한 작품 할 때마다,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기서 딱 멈추고 싶지 않아요. 배우를 안 하게 되는 날까지도 ‘또 뭔가가 더 좋아졌다’ ‘더 잘 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는 배우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 곽우신

 

그건 그가 연기하고 노래하는 인물의 서사이기도 했고, 그렇게 경력을 쌓아오며 올해 데뷔 9주년을 맞이하게 된 배우 본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비지터는 억압과 맞서는 인물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이이다. 비지터의 성을 남녀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여성 배우가 억압의 주체가 될 때 할 수 있는 표현은 뭔가 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보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아마도 남자 비지터일 때보다 우먼한테 조금 더 제가 추근거리는 느낌이 들 거예요. 제가 우먼을 조금 더 터치하고 스킨십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제가 여성으로서 불편했던 경험들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떤 위압적인 것들, 내가 이길 수 없고,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뭔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참았어야 했던 순간들이 있거든요. 완전히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황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저도 지하철을 탔는데 누가 너무 빤히 쳐다봐서 기분이 나빴을 때도 있었고, 누가 말하면서 제 무릎에 손을 얹는데 되게 치우라고 하고 싶었죠. 하지만 말도 못 꺼냈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고, 관객들이 그걸 불편하게 느끼셨다면 맞게 보신 겁니다.
 
제가 여자니까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이런 부분들은 남자 배우들보다 제가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남자들이 무대에서 못하는 거 다 할 거야' 막 이랬거든요. 쓰다듬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위아래로 훑고…. (웃음) 비지터는 무대 위에서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맨(남편)도 그렇고 특히 우먼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잖아요. 일상에서 당하는 폭력적인 부분들을 무대 위에서 더 표현함으로써 똑같이 역지사지 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좀 주고 싶었어요. 저는 그리고 남자 분들도 분명히 그렇게 기분 나쁘지만 말 못하는 경험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상황에 대해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비판적인 시선들을 담고 싶었죠."
 

"천사들이 타락한 밤, 이 세상을 지옥으로"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누가 악마인가? “맨이랑 우먼이 서로 막 변명을 하잖아요. ‘만약 제가 그런 상황에 닥친다면,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면, 아니면 저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과연 정의만을 외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보통 나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로 나쁘다고 하는데, 저는 좀 모르겠을 때가 있어요. 그 사람도 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 있는데,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밝혀지지 않은 것과 밝혀진 게 있다면, 밝혀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죄가 아닌 것이고, 밝혀진 것만이 죄가 되는 걸까?” ⓒ 곽우신

 

비지터는 엔카베데의 경관, 공포스럽지만 그래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로 처음 인식된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미스터리한 부분들이 부각된다. 집에 도청장치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부부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부의 과거 행적과 배경은 어떻게 다 파악하고 있는 걸까? 비지터는 계속해서 부부의 도덕성을 시험하고, 이들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보다 확실해진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죽여도 죽지 않는 그를 가리켜 남편은 '악마'라고 소리친다.
 
"비지터의 정체에 대해서 '딱 이거다'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해요.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냥 어떤 초월적 존재로써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매체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저는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뭔가 심판을 하러 온 존재의 느낌도 있지 않나요? 악마라면 이들의 타락을 그냥 계속 두고 보고 있지, 진실을 밝혀서 저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지는 않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비지터가 단순히 악마라면, 이 부부가 거짓말을 하거나 할 때 '더 해, 더 해' 이렇게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너, 그랬잖아?' '네가 잘 생각해 봐, 네가 한 일이 옳은 일인지?'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게 악마랑은 좀 거리가 있는 태도가 아닐까…. 그래서 천사일지도 모르겠고, 악마일지도 모르겠고, 혹은 무슨 신적인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다양한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김려원 배우는 '자기만의 생각'이라면서, 본인만의 해석에 대해 단정적으로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허투루 떠올린 생각은 아니다. 그는 비지터가 부부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고, 이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모든 과정이 "계산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지터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날 채워야 할, 딱 하나 모자란 할당량 탓만은 아니다.
 
"비지터 입장에서 할당량은 하나인데, 둘 다 벌을 주고 싶은 거죠. 어쨌든 둘 다 잘못을 했잖아요. 알면서 죄를 저질렀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제(비지터)가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죠. 그래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끔 일부러 상황을 만들어서, 둘 중에 하나는 마지막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다른 하나만 남도록 의도한 게 아닐까요? 처음부터 그런 계산을 깔고 간 거죠. 아니, 한 명만 데려가면 되는 거였다면, 그냥 아무나 한 명 똑 데려갔으면 됐을 텐데? 둘 중 누구를 잡아가도 상관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사람들을 계속 불화로 이끌었을까요?
 
연습실에서 사실 맨과 우먼이 싸우는 게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지터가 이걸 재밌게 관전을 해야, 관객 분들도 재밌게 보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고민들을 하다가, 비지터는 지금 이들이 싸우는 상황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이렇게 반응하겠지' 같은 것들을 계산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는 모습을 보는 거죠. 그래서 연습실에서 맨이 하는 대사를 같이 입모양으로 따라하기도 하고 했거든요. 그렇게 조금 틀다 보니까 훨씬 재밌어졌죠."


<미드나잇>은 명백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굉장히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김려원 배우는 사회적인 해석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보다 도덕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미드나잇>의 다른 버전인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은 스탈린의 초상화를 실제로 내걸어 보이며 보다 직접적으로 독재자를 폭로한다. 하지만 <미드나잇: 앤틀러스>는 거대한 뿔을 지닌 수사슴으로 대체되어 있다. 각하에 대한 이런 묘사는 <미드나잇: 앤틀러스>를 보다 보편적인, 그리고 보는 이에게 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저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뭔가 죄의식이라든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이런 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더 고민을 많이 하고, 의미도 더 많이 두는 편이죠.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면 때문인 것 같아요. 정말로 비지터가 뭔가 이 사람들을 심판하러 온 존재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로 보이지 않나요? 심판이라는 건 혼내준다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죠.
 
<미드나잇>은 관객 여러분들도 오셔서 본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한테 던지는 말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을 때가 되게 많더라고요. 비지터의 대사에도 그런 말들이 나오죠. '악마가 그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아니요. 오히려 길을 가다가 만나면 보통 사람 같을 걸요? 따지고 보면 당신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결국 '너네도 생각해 봐, 너네도 악마일지도 몰라? 너네도 악마 같은 짓 하고 다닐지도 몰라?'
 
그럴 때는 너무 직접적이지는 않도록, 제 나름대로 몸 방향을 객석으로 돌려서 말할 때도 있고, 문을 열고 닫는다거나 약간 손을 쓸 때도 있어요. 맨이나 우먼이 갖고 있는 비도덕적인 부분들에 대해 관객들도 같이 고민해 볼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작품을 하면서 저 스스로도 와 닿았던 부분이나 나 스스로 찔렸던 부분들이 있거든요. 관객 분들한테 이렇게 제가 느낀 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재밌겠더라고요. 그러면 보는 분들도 또 공연을 더 재밌게 보실 거라고 생각해요.

아, 물론 그냥 저 혼자서 이렇게 생각하는 부분이지, 실제로 관객들이 느끼실지 안 느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생각보다 관객을 되게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죠. 볼 때는 재밌었는데 뒤돌아보면 살짝 좀 찝찝하기도 한 점이 블랙 코미디의 매력인 것 같아요!"

 
"다음 문은 어디일지, 잠긴 문들을 열어"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제가 원래는 관객 분들 후기도 좀 찾아보는 편이에요. 칭찬받고 싶어서 찾아볼 때도 있고, 또 지적해주시는 내용이 ‘이렇게 하면 내 연기가 더 좋아지겠구나’ 하면서 크게 도움이 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못 보겠더라고요, 무서워서. 아무래도 다른 배우들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걱정도 되고 힘들어서, 제가 무대에서 더 놀아야 되는데, 제가 약간 움츠러들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직접은 못 보고, 다른 분들께 대신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고쳐야 할 게 있다면 알려달라고요.“ ⓒ 곽우신

 

배우 김려원은 처음 만나기 전에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카페 문을 열더니,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종잡을 수 없이 통통 튀면서도 해맑은 본체의 소유자였다. 갑자기 스스로 "너무 말랑해 보여서 걱정"이라고 털어놓는다든가, 모 배우가 "딸기 이제 질릴 때 되지 않았느냐"라고 놀린 이야기로 샌다든가, 그러더니 "같이 빵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권한다든가.
 
그런데 그는 여러 연습들로 바쁜 와중에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인터뷰에 나서준 배우이다. 팬들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객이 즐거우면 자신도 즐거워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말랑하다는 스스로의 걱정과는 달리, 밝고 건강한, 그래서 더 단단한 재질의 배우. 그런 기반이 있기에 그의 목소리는 거친 록 사운드에도, 웅장한 클래식에도 어울린다. 그의 발랄한 눈꼬리는 무대 위에서 어느 순간 매섭게 변했다가, 또 어떨 때는 처연하게 내려앉는다.
 
그런데도 김려원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겸손한 사람이고, 자꾸 주변으로부터 배워나가며 성장하고픈 욕구를 지닌 이다. 관객들의 마음에 이렇게 노크하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잘 되는 배우에게는 반드시 잘 될 만한 이유가 있다.
 
"관객 분들이 좋아하시는 게 저도 너무 진심으로 좋아요. 사실 '나는 나를 위해서 공연하는 거야'라고 하면서도, 공연을 대중문화로써 소비해 주시는 분들이 좋아할 게 뭔지 계속 고민하는 것 같아요. '어떤 걸 원하실까?' '내가 어떤 걸 하면 좀 더 즐거우실까?' 관객 분들은 시간도 내고 돈도 투자해서 보러 오시는 거잖아요.
 
특히 제가 무대에서 여자로써 무언가를 해낼 때, 관객 분들도 본인이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무언가에 대한 경험을 떠올리시면서 더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요. 혹은 포기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고요. 저의 만족도 만족이지만, 보시는 분들로 하여금 그런 힘을 드리는 게 저한테는 더 소중한 경험들이죠.

그래서 팬들로부터 편지를 받거나 이럴 때, 저도 무대를 포기하려고 하다가도 다시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보람을 느껴요. 제가 대체 어떤 일을 해서 누군가로부터 그런 응원의 말을 듣고, 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힘을 드릴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공연이, 이 일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자꾸 욕심도 더 나고요. (웃음)"

 

관객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지터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비지터' 역을 맡아 역대 네 번째 '여성 비지터'가 된 배우 김려원을 지난 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주 특별한 반지가 껴 있었다.

▲ 김려원에게 '비지터'는 ”여자 배우로써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런데 제 앞에 하셨던 비지터들이 너무 잘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는 해요. 제가 그 분들보다 못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도 계속 들어요. 아, 특별히 더 신경 쓰는 건 있어요. 코트 날리기. (웃음) 펄럭하고 멋있게 날려야 하니까, 보시기에 어떻던가요? 보시는 분들이 ‘김려원 비지터 또 보고 싶다’ ‘김려원 또 비지터 했으면 좋겠다’라고 할 수 있는 필모그래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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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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