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칸 포스터

▲ 6번 칸 포스터 ⓒ 싸이더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 일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1만km의 여정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묘와 박경리의 동상을 둘러보겠다는 막연한 생각, 당시 읽고 있던 <토지> 속 인물들이 거닐던 흑룡강과 어쩌면 한민족의 발상지로도 믿어지는 맑고 정한 바이칼호수를 보고 오겠다 마음먹은 터였다. 몸도 마음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인지도에 비해 인기가 높지는 않다고 했다. 그것도 한겨울의 시베리아는 여행으로 찾는 이가 거의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던 것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부터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여행객처럼 보이는 이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년이 흘러 나는 그때 러시아 여행을 즐거움과 따뜻함으로 추억한다. 그 상당 부분은 여행의 절반쯤을 차지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덕분이고, 보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이다.
 
러시아 열차칸의 우연한 만남
 
6번 칸 스틸컷

▲ 6번 칸 스틸컷 ⓒ 싸이더스

 
핀란드 영화 < 6번 칸 >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일면식 없는 남녀가 기차에 오르고,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가는 며칠간의 여정을 함께 한다는 짤막한 이야기가 영화의 얼개다. 4인실 독립된 방을 함께 쓰게 된 남녀는 여행 동안 가까워질 밖에 없고,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마침내는 주인공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니 영화는 여행으로부터 삶을, 타인으로부터 자기를 구하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일면식 없는 남녀가 기차에 오르며 펼쳐지는 로맨스는 기실 그리 새롭지 않다. 우선 그 유명한 <비포 선라이즈>가 그러하고, KTX를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 <그날의 분위기>도 그렇다. 그러나 두 영화보다 < 6번 칸 >이 주는 신선함이 있으니, 기차에서 만났을 뿐 내려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앞의 두 영화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탓이다. 이렇게 오래 기차를 함께 타면 로맨스보다는 스릴러가 되기 쉬운 것인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 같은 작품이 그 예시라 하겠다.
 
무튼 영화는 핀란드에서 온 여자와 러시아 남자가 며칠 동안 기차객실을 함께 쓰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자는 무르만스크 인근 바닷가에 있다는 고대 암각화를 보러 떠난 길이다. 동성 애인과 함께 가기로 하였으나 인기도 많고 활발한 그녀는 다른 일정으로 취소한 참이다. 제가 그녀를 생각하듯 그녀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여자는 출발 전부터 한껏 처져있다. 그러나 이제와 여행을 취소한다면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운 마음까지 이는 것이다. 자의인 듯 타의처럼 그녀는 무르만스크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익숙하지만 투박한 로맨스 속으로
 
6번 칸 스틸컷

▲ 6번 칸 스틸컷 ⓒ 싸이더스

 
사내는 무르만스크에서 자원을 채굴하는 회사에 인부로 채용된 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노동자, 보통이라면 3등석을 끊을 텐데 2등석을 끊은 걸 보면 범상한 이는 아니다. 과연 그런 것이 그는 잔뜩 취하고 낯선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한국이라면 추행으로 고소까지 당할 일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나쁜 이는 아니어서 화들짝 놀랐던 여자도 며칠 동안의 동행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영화는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 사이의 선을 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한 만남도, <그날의 분위기>처럼 자신감 넘치는 도전도 아닌, 보다 투박하고 현실적이며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관계의 시작이 그려진다. 무례하지만 진솔하고 서투르지만 마음이 가는 사내는 여러 계기로 차츰 여자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로부터 여자에게 죽는 날까지 선명히 기억될 도움을 안기니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온전한 한 편의 로맨스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랑은 조심스럽고 섬세한 접근으로부터 피어난다. 그러나 때로 무례하게 여겨지거나 거칠어만 보이는 시도로부터 더 나은 관계가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고 쉽게 밀어내는 이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행운이 있다는 것을 이 영화가 선명히 보여준다. 어둡고 위험해보였던 터널을 지나, 기차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을 건너 문을 연 창고에서 활짝 웃는 사내들이 내민 선물처럼, < 6번 칸 >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선을 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관계며 행복들이 있단 걸 증명하려 든다. 그 거침없는 도전들이 사라진 듯 보이는 오늘의 한국에서 나는 저 먼 북국의 영화를 보며 내가 몇 년 전 만났던 여행의 수많은 추억들을 떠올린다. 나는 이 영화에 동의한다.
 
6번 칸 스틸컷

▲ 6번 칸 스틸컷 ⓒ 싸이더스

 
6번 칸 싸이더스 유호 쿠오스마넨 세이디 하를라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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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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