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고정관념이 강했던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각 나라의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느끼는 특징은 비교적 뚜렷했다. 홍콩영화는 이소룡과 성룡으로 대표되는 액션영화나 중국의 역사가 등장하는 무협영화, 아니면 오우삼 감독이 만들고 주윤발이 등장해 쌍권총을 난사하는 누아르 영화로 구분됐다. 할리우드 영화는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 스케일이 큰 영화를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2019년 미국영화협회의 집계를 기준으로 세계 15위권의 영화시장을 가진 대만 영화의 이미지는 홍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대만영화는 1950~1960년대부터 홍콩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실제로 1990년대까지는 홍콩영화들과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임청하와 왕조현, 오천련 등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대만 출신 배우들은 홍콩에서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고 홍콩과 합작해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독창적인 특징이 없어 보였던 대만영화도 2000년대 들어 독특한 색깔을 갖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마니아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과 비슷한 시대상과 정서를 공유하고 뛰어난 영상미가 어우러진 대만의 청춘 멜로영화들은 국내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본 연재 제목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대만의 청춘 로맨스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대표적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2016년과 2021년 두 번에 걸쳐 재개봉했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2016년과 2021년 두 번에 걸쳐 재개봉했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주)이놀미디어

 
탄탄한 마니아층 보유한 대만 멜로영화

사실 1990년대까지 국내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대만영화는 <결혼피로연>과 <음식남녀> 등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안 감독도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감독이 됐고 대만영화는 점점 국내 관객들과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던 2008년 국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만영화 한 편이 등장했으니 바로 판타지 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대만의 가수 겸 배우 주걸륜이 감독과 주연, 각본, 음악까지 1인 4역을 맡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배우들의 호연과 애절한 스토리, 뛰어난 음악이 어우러진 수작으로 대만은 물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2000년대 중반 대만영화에 대한 국내관객들의 인식이 썩 좋지 않았고 주걸륜과 계륜미 역시 국내에서 크게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인기는 분명 큰 이변이었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대만보다 국내에 먼저 개봉했던 <별이 빛나는 밤>은 주성치가 연출한 <장강7호>와 김용화 감독의 야구영화 < 미스터Go >에 출연했던 서교가 주연을 맡은 영화다. 순수했던 첫사랑과 그에 대한 추억을 잘 표현한 전형적인 대만스타일의 성장형 멜로 영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계륜미가 서교의 성인 역으로 특별 출연하면서 국내 관객들이 더욱 반가워했던 작품이다.

왕대륙이 7년의 무명생활을 씻고 일약 대만 최고의 스타로 성장한 영화 <나의 소녀시대>도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대만의 청춘 로맨스영화다. 대만 현지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역대 대만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던 <나의 소녀시대>는 국내에서도 4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지금도 '대만의 대표적인 멜로영화'를 이야기하면 <나의 소녀시대>를 떠올리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국내에서 역대 대만영화 최고흥행기록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따로 있다. 바로 지난 2019년에 개봉해 42만 관객을 모은 <장난스런 키스>다. 동명의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지난 2010년 국내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장난스런 키스>는 대만에서 만들어진 영화 역시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왕대륙은 <나의 소녀시대>로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의 흥행기록을 자신이 출연한 영화 <장난스런 키스>로 경신했다.

원작소설도 '역주행'시킨 폭발적인 흥행
 
 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 커징텅(왼쪽)은 모범생 션자이를 만나 성적이 급상승해 대학에 합격한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 커징텅(왼쪽)은 모범생 션자이를 만나 성적이 급상승해 대학에 합격한다. ⓒ (주)이놀미디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연출한 구파도 감독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소설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지난 2005년 구파도 감독이 첫사랑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아이디어가 떠올라 소설로 쓴 작품으로 2006년 출간 후 영화화 되기를 기다렸지만 적당한 감독이 나타나지 않아 직접 감독으로 나섰다. 구파도 감독은 사비까지 털어 영화를 완성시켰을 정도로 이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주인공 커징텅(가진동 분)을 비롯한 5명의 친구가 학급에서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 션자이(천옌시 분)를 짝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로맨스영화다.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남학생들을 보면 <응답하라>시리즈를 보는 듯하고 호기심 많은 남학생들의 유치하고 장난기 넘치는 행동들을 보면 <몽정기>가 떠오르는 등 여러 가지로 국내 관객들과 정서가 잘 맞는 영화다.

주인공들이 고교시절을 보내는 시대적 배경은 1994년으로 실제 그 시대가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농구를 좋아하는 차오궈성(오견 분)이 NBA스타 그랜트 힐의 카드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아허(학소문 분)는 션자이에게 대만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던 밴드 에어 서플라이 콘서트를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물론 주걸륜의 히트곡 제목을 인용한 "3학년 2반 주걸륜, 선도부로 올 것"이라는 교내방송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

5명의 친구들이 흠모하는 여학생 션자이를 연기한 천옌시는 2007년 드라마로 데뷔해 영화 <청설>로 주목 받은 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통해 중화권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션자이가 커징텅과 시험내기를 한 후 내기에서 이겼음에도 커징텅의 바람대로 다음날 머리를 묶고 등교하는 장면은 영화 속 남학생들은 물론 남성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대만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1억 타이완 달러 수익을 올렸고 장기 상영되면서 2011년 전체영화흥행 3위를 기록했다. 중국과 홍콩 등 중화권은 물론이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원작소설이 5년 만에 '역주행'을 하며 2011년 대만문학판매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당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대만에서 단순한 흥행영화가 아닌 '사회현상'에 가까웠다.

연기경력 전무한 신인이 남자주인공
 
 가진동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전까지 연기경험이 전무했던 초짜신인이었다.

가진동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전까지 연기경험이 전무했던 초짜신인이었다. ⓒ (주)이놀미디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션자이를 연기했던 천옌시도 신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그녀는 몇 편의 드라마와 영화 <청설> 등에 출연했던 '연기 경력자'였다. 하지만 커징텅 역의 가진동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출연하기 전까진 연기경력이 전혀 없었던 신인이었다. 하지만 가진동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커징텅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대만 금마장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고 신예스타로 급부상했다.

명랑하고 유쾌하지만 지나치게 잘 생기면 곤란하다는 기준을 정하고 커진텅 역의 오디션을 본 구파도 감독은 최종후보 3명을 고른 후 오디션을 볼 때마다 점점 나아지는 연기와 진지한 태도를 보인 가진동을 최종 결정했다. 가진동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통해 스타로 성장했지만 지난 2014년 베이징에서 성룡의 아들과 대마를 흡입하다 현지 마약단속반에 적발돼 대만으로 송환된 후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시작으로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한 구파도 감독은 2014년 또 한 번 자신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를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리 쓰잉을 연기한 송운화는 이듬해 <나의 소녀시대>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구파도 감독은 2021년작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에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가진동과 <카페, 한사람을 기다리다>의 송운화를 동시에 캐스팅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감독 천옌시 가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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