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 옥상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지금까지는 공연을 보면서 관객분들에게 박수를 쳐달라 부탁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17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클라라 슈만>을 제작한 서울발레시어터의 최진수 예술감독은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올라 이렇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까지 선보였던 방식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이란 암시를 던진 셈이다. 어떤 이유에서 그는 관객에게 호응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을까.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을 여는 504석의 대극장은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북적거렸다. 커튼이 올라가고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정점에 달했을 때, 무대 위에 배치된 '피아노 4중주'의 배열을 보자 앞선 궁금증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클라라 슈만>은 1995년에 창단해 올해로 28주년을 맞는 '서울발레시어터'의 2023년 신작이다. 무용계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던 이 단체는 지금까지 수준 높은 마니아들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독창적인 안무로 단체의 중심이었던 제임스 전(명예감독)뿐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배경만 들어도 이번 공연에 거는 기대는 충분히 높아 보인다. 후자처럼 작품 속 역사적 인물(슈만, 클라라, 브람스)을 소재로 오페라, 뮤지컬 등 타 장르에서도 끊임없이 무대화되어 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발레로 완성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19세기 낭만주의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던 이들이 발레의 안무로 표현될 때, 어떤 점 때문에 시도되지 못했는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공연에는 독일 낭만파를 대표하는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과 후기 낭만파의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제1연주자이자, 뮤즈였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1819~1896)이 묘한 삼각관계에서 중심에 선 인물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세 등장인물 사이에 전개될 미묘한 심리전과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공연에서 키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여성을 제목으로 선택했는지 모른다. 서양음악사에서 낭만주의를 여닫았던 이들의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때로는 서정적으로, 어느 순간에는 격동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공연의 흐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당신은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당신은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당신은 나의 세상, 나는 그 속에 사네…" 슈만의 대표적인 연가곡에서 '사랑'과 '고통'으로 양분되는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려는 점은 아마도 이번 공연의 첫 번째 목표로 해석된다. 

클라라, 슈만, 브람스가 살아온 이야기
 
 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 옥상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앞선 궁금증에 해답을 찾기 위해선 우선 세 음악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한 후에 관람하길 권장한다. 7살에 작곡을 시작한 '슈만'은 법률 공부를 위해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고, 당시 피아노 선생으로 이름을 날렸던 비크(클라라의 아버지)를 찾아가 제자로 지낸다. 그러던 중 9살이라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클라라'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버지는 슈만이 못마땅해 둘의 관계를 승낙하지 않는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라라와 슈만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당대에 클라라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린 연주자였다. 결혼 이후에는 슈만도 아내(클라라)를 내조하며 작곡가와 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한다. 여덟 명의 아이를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어느날 변곡점이 찾아온다. 

행복한 나날을 이어오던 이들에게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이 슈만의 길을 가로막는다. 그의 병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지자 클라라는 피아니스트 연주와 레슨을 이어가며 여덟 자녀의 엄마로서 역할을 다한다. 이때 슈만의 제자로 들어온 젊은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한 부부는 함께 생활하며 예술적 교감을 쌓는다. 그러다 14살 연상이자 스승의 아내인 클라라를 흠모한 브람스는 그녀에게 끊임 없이 구애한다. 하지만 오직 남편만 생각했던 클라라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럼에도 브람스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녀만 바라본다. 점차 슈만의 정신병은 심해지고 클라라는 생계에 치여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심지어 브람스는 슈만이 죽은 이후에도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한 여자만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이렇듯 세 사람이 살았던 100년에 가까운 시기는 이번 작품 <클라라 슈만>의 시대적 배경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 클라라와 슈만이 사랑을 시작했던 1800년대 초반부터 세 인물이 세상을 떠났던 1800년대 후반까지를 연대순으로 표현했다. 세 인물이 살고 죽는 인생의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사랑'과 '고통'이라는 상극의 감정을 배우의 입말 없이 몸으로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우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직접적인 대사보다 보는 이의 느낌을 자아내는 몸동작의 풍요로움은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듯 <클라라 슈만>의 전개는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클라라와 브람스가 겪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고, 세 인물의 갈등과 그 안에서 폭발하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또다른 선물

아마도 이번 작품이 그동안 선보여왔던 발레와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을 꼽자면 필자는 커튼이 올라가고 등장한 무대 장치를 꼽고 싶다. 이것은 앞서 최진수 예술감독이 관객에게 박수를 쳐주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던 이유와 관련이 깊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공개된 무대의 한켠에는 '피아노 4중주'를 위한 악기가 배열된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안무를 돋보이게 만들었던 연주자들의 전형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피트를 벗어나 무대의 상당 부분을 버젓이 차지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점이다.

심지어 공연이 진행되면서 안무가들은 연주자들이 자유자재로 종횡무진할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한다. 공연의 중간에 그랜드피아노를 배치시켜 발레와 연주가 뒤바뀌는 환상까지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슈만을 대신해 여덟 아이들을 책임지며 연주활동을 이어가야 했던 클라라의 연주장면을 실제로 재현함으로써 극중 몰입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공연 내내 무용수를 돋보이게 만들었던 '피아노 4중주'가 낭만주의 음악을 라이브로 들려줬다는 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통 스테이지 공연에서 라이브로 진행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연주와 공연이 절묘하게 뒤섞인 연출은 클래식과 무용의 콜라보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증명했다. 이것은 서울발레시어터가 "무대 위에서 피아노 4중주가 단순히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반주 음악'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주인공으로 만들겠다"고 말한 의지와 일맥상통한다. 피아니스트(김고운), 바이올리니스트(변예진), 첼리스트(변새봄)로 구성된 '트리오 아티스트리(Trio artistry)'와 비올리스트(조재현)가 함께한 '피아노 4중주'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무대 장치를 통해 스테이지의 곳곳을 누빈다. 이런 무대전환은 연주자로서 제한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와 상호 밀접한 교감을 유도해 극중 캐릭터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 

여성의 강인함과 세 인물의 갈등 몸으로 보여줘
 
 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발레 <클라라 슈만>(서울발레시어터) 공연 장면 ⓒ 옥상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작품의 소재로 등장하는 '클라라 슈만',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등 세 거장은 음악가로서의 명성만큼이나 전설적인 사랑꾼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슈만의 아내로서, 여덟 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남편을 끝까지 내조하는 동반자로서 지조를 보여준 클라라가 세 인물 사이에서 중심을 잡도록 설정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슈만과 '자신을 사랑하는' 브람스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갈등을 발레로 완벽하게 표현한 점을 눈여겨 보고 싶다. 그러나 초반에는 사랑과 좌절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관객에게 완벽하게 전달하게 위해서 대사보다 더한 것이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마도 오직 몸으로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발레로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까지 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30년 가까이 클래식 발레의 한계를 완벽하게 뛰어넘었던 제임스 전의 연출 방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공연은 사랑과 좌절이 반복되는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구구절절하게 아름다운 선율이 배경이 되었다가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계에 쓰라림을 엿보는 슬픔이 반복된다. 공연의 소개서에서는 사랑, 로망, 연민, 좌절, 분노 등 크게 열 개의 장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필자는 70분간 이어지는 공연을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싶다. 클라라와 슈만, 그리고 클라라와 브람스의 만남이 배경이 되는 '사랑'이 초반부를 장식한다. 이후 병들어 괴로움에 휩싸이는 슈만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여인을 짝사랑해야했던 브람스의 좌절을 표현하는 중반부로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지조를 보이며 가족을 지키려했던 클라라와 사별을 겪은 여인을 짝사랑하지만 끝내 죽을 때까지 한 여자만 사랑했던 브람스의 지고지순한 순애보가 후반부를 장식한다. 

극한으로 고조되는 감정을 오롯이 관객에게

세 인물의 중심에 섰던 클라라 슈만을 연기했던 이윤희(37, 전 국립현대무용단 단원)는 위에서 언급된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충실했다. 애잔한 슬픔을 몸동작뿐 아니라 다양한 표정 연기로도 완벽하게 소화했는데, 중간에는 얼굴의 표정 연기뿐 아니라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다양한 동작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로베르트 슈만을 연기했던 정운식(57, 전 서울발레시어터 주역무용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베테랑 발레리노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특히, 병들어 죽어가는 좌절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라든지 인간의 고뇌에서 자신의 온몸을 쮜어뜯는 장면은 그가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한계를 스스로 초월하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요하네스 브람스를 연기했던 황경호(30, 현 서울발레시어터 주역무용수)의 연상의 여인을 지고지순하게 바라보는 젊은 감정을 표현한 장면에서 극중 몰입감을 배가시킨다. 실제로 보는 이가 발레의 경계를 뛰어넘게 만들었던 세 무용수들의 캐스팅에 박수를 보낸다. 이것은 슈만, 클라라, 브람스의 나이차이를 실제로 대입시켜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세 무용수들의 나이차이가 오버랩된다. 이런 디테일한 캐스팅은 공연을 보는 내내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오선지의 음표를 떠올리는 무대 장치뿐 아니라 음악의 배경이 됐던 역할에 충실했던 군무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김향림, 박경희, 정다은, 오둥구 카틴바타르, 이진기, 고희정, 변혜영, 장지현, 박시은, 양선아, 천예원, 김동철, 이수현, 석지우 등 14명의 무용수가 펼치는 군무는 세 등장인물의 다양한 감정을 무대에서 꽉 차 보이게 만들었다. 여기에 대극장의 광활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동작은 세 안무가들이 보여주는 감정에 의존하는 것보다 몇 배로 몰입감을 증폭시켰다. 서사가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구현되지 않는 한계를 뛰어넘어 세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충실했으며, 과장되지 않은 동작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몸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소리를 지르는 등 감정을 극대화하여 점은 왜 이번 연출이 성공적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공연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장면은?

#1 클라라, 슈만, 브람스 세 명이 만나는 첫 장면을 꼽고 싶다. 사랑의 감정을 오롯이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부분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 클라라와 슈만은 어느날 청년 브람스를 만난다. 브람스의 음악적 재능에 놀란 부부는 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지만 이들의 운명은 엇갈리게 된다. 묘한 신경전과 긴장감이 극이 전개될 복잡함을 암시한다. 

#2 정신병원에 입원한 슈만을 찾아가는 클라라와 상봉하는 장면을 주목한다. 참혹한 몰골의 슈만은 클라라와 만남에 기뻐하고 슬포하며 분노한다. 결국 슈만을 끌어안으며 클라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은 애절한 대사 없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순간으로 절정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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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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