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영화로도 제작돼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고 프레디 머큐리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명곡이다. 멤버들의 아카펠라로 시작되는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의 피아노 연주와 함께 애절한 발라드로 변주됐다가 사운드가 풍성하게 채워지면서 오페라와 하드락으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그만큼 '보헤미안 랩소디'는 하나의 장르로 구분할 수 없는 여러 장르가 뒤섞인 퓨전 명곡이다.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은 세계 어떤 의상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다. 하지만 입고 벗기가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어 현대에 와서는 고궁이나 한옥마을에 놀러 가거나 명절, 결혼식 같은 큰 행사가 아니면 입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 이에 최근에는 한복의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입고 벗기가 편하게 한복을 개량한 '퓨전한복'이 나오기도 했다.

여러 장르(?)를 섞어 새로운 매력을 가진 장르로 재탄생하는 경우는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귀신이나 살인자 등이 등장해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공포 및 호러영화들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기 용이한 장르로 꼽힌다. 지난 1998년에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 역시 기발한 상상력과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연출로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은 퓨전 호러영화였다.
 
 김지운 감독의 독특한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호러와 코미디를 절묘하게 섞으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김지운 감독의 독특한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호러와 코미디를 절묘하게 섞으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주)명필름

 
공포영화 싫어하는 관객들을 위한 퓨전호러

무서운 귀신이나 살인마가 등장하는 호러영화만큼 호불호가 확실하게 나눠지는 장르도 드물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호러영화는 모두 챙겨봐야 직성이 풀리는 마니아들이 존재하는 만큼 '호러'나 '공포' 같은 장르만 붙으면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이에 상업영화를 만드는 제작사에서는 호러영화에 다른 장르를 적절히 섞으면서 호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관객들도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퓨전호러' 영화들을 만들곤 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1978년에 개봉한 <시체들의 새벽>이 떠오르는 제목의 좀비영화로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의 3색 3부작(<블루> <화이트> <레드>) 패러디 중 첫 번째 영화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K-좀비'들과 달리 행동이 매우 느리다. 인간들 역시 좀비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등 말 그대로 '황당한' 상황 속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국내에서는 극장개봉도 하지 못 했지만 세계적으로는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던 <좀비랜드> 역시 호러와 코미디, 액션 등이 적절히 섞인 퓨전 호러영화다. 주인공 콜럼버스(제시 아이젠버그 분)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길어진 좀비사태로 인해 좀비 세상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좀비랜드>는 제시 아이젠버그와 엠마 스톤, 우디 해럴슨, 빌 머레이 등 화려한 배우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다.

300만 엔의 저예산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만 30억 엔이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한 2018년작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좀비영화 촬영현장에 실제 좀비가 출몰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일본의 퓨전 호러 영화다. 2019년 일본의 블루리본상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2019년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 2020년에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리모트 대작전>을 차례로 선보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퓨전 호러영화는 지난 2004년 개봉해 전국 198만 관객을 모았던 신정원 감독의 < 시실리 2km >를 꼽을 수 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TTL소녀'로 유명한 임은경이 폐교를 지키는 소심한 귀신 송이를 연기했던 < 시실리 2km >는 임창정과 안내상, 박혁권, 우현으로 구성된 조폭 패거리가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특히 우현의 나이와 관련된 임창정과 우현의 대화는 < 시실리 2km > 최고의 명대사로 꼽힌다.

평범한 가족들은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됐을까
 
 <조용한 가족>은 대배우 최민식(오른쪽)과 송강호가 대사를 주고 받는 유일한 영화다.

<조용한 가족>은 대배우 최민식(오른쪽)과 송강호가 대사를 주고 받는 유일한 영화다. ⓒ (주)명필름

 
<조용한 가족>은 훗날 <반칙왕>과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 <밀정> 등을 만드는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흔히 신인 감독은 데뷔작에서 흥행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존 영화들의 흥행공식을 적당히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색깔로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서울에서만 34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용한 가족>은 '가족끼리 힘을 모아 잘 살아 보자'는 소박한 욕심에 산장을 구입해 숙박업을 시작한 강대구(박인환 분)-정순임(나문희 분) 부부네 가족이 황당한 사건에 휘말리다가 끝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내용의 코믹 공포물이다. 영화의 개봉은 1998년 4월이었지만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던 1996년 가을이다(실제로 영화 속 TV 뉴스에서는 수시로 무장공비 관련 뉴스가 보도된다).

<조용한 가족>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대배우 최민식과 송강호가 함께 출연하는 귀한 작품이다. 사실 지금이야 두 배우를 동시 캐스팅하는 것이 매우 여러운 일이지만 당시 최민식과 송강호는 1997년 <넘버3>를 시작으로 <조용한 가족> <쉬리>까지 3년 연속으로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최민식이 주연, 송강호가 카메오 출연했던 2005년작 <친절한 금자씨>까지 하면 두 사람은 총 4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이처럼 1990년대 후반에는 여러 작품에 함께 나왔지만 정작 두 배우가 합을 맞춰 연기를 한 작품은 <조용한 가족>이 유일했다. <넘버3>에서 불사파 두목 송강호와 검사였던 최민식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고 <쉬리>에서도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다가 최민식이 갑자기 나타나 송강호를 죽인다. 하지만 삼촌과 조카 사이로 나오는 <조용한 가족>에서는 두 사람이 수시로 수다를 떨면서 영화의 웃음지분 상당 부분을 책임진다.

엄마로부터 "그게 어디 열일곱 살짜리 얼굴이냐"고 대놓고 디스를 당했던 막내딸 미나 역의 고호경은 <조용한 가족>이 영화 데뷔작이었다. <조용한 가족>을 통해 단숨에 충무로와 방송가의 유망주로 떠오른 고호경은 1999년과 2000년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호경은 한창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2006년 대마초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연예인으로서 공식 활동을 접었다.

정재영-정웅인 등 조연들의 면면도 화려
 
 <조용한 가족>에는 개명 전 '정지현'이던 시절의 정재영(오른쪽)도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조용한 가족>에는 개명 전 '정지현'이던 시절의 정재영(오른쪽)도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 (주)명필름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에서 누가 주인공이랄 것도 없이 아버지 강대구와 어머니 정순임을 비롯한 6명의 식구에게 비교적 공평한 분량과 비중을 줬다. <조용한 가족>의 주연이었던 이윤성과 고호경이 현재 실질적으로 연예계 활동을 중단한 것과 달리 당시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들 중에는 훗날 유명배우로 성장해 한 시대를 풍미했거나 현재도 이름 있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용한 가족>의 조·단역 중 오늘날 가장 대성한 배우는 역시 여자를 바꿔가며 산장 앞을 지나거나 산장에 들르는 '제비'를 연기했던 정재영이었다(엔딩크레딧에는 개명 전 이름인 정지현으로 표기됐다). 정재영은 <실미도>와 <거룩한 계보> <강철중: 공공의 적 1-1> 등에서 강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지만 <조용한 가족>에서는 최민식과 송강호에게 잡히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는다(물론 누가 톱과 도끼를 들고 쫓아오면 겁이 날 수밖에 없겠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웅인도 지금처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조용한 가족>에서 큰 딸 미수(이윤성 분)와 눈이 맞는 등산객 남자로 출연했다. 하지만 등산객 남자는 순수하게 산책을 나온 미수를 겁탈하려 했고 뒤늦게 찾아온 영민과 몸싸움 끝에 폭포 아래로 추락한다. <조용한 가족>에서 심한 몸싸움을 했던 송강호와 정웅인은 2년 후 김지운 감독의 차기작 <반칙왕>에서 절친한 사내동료로 재회했다.

영화 <투캅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영화 <사랑하기 좋은 날> <헤어드레서>, 드라마 <거미> <컬러> <오늘은 남동풍> 등에 출연하며 1990년대 중반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수원도 <조용한 가족>에 특별 출연했다. 지수원이 연기한 은주는 산장 주변 땅을 노리는 이복 오빠가 고용한 킬러(이기영 분)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은주에게 첫 눈에 반한 창구의 도움으로 한 발 먼저 산장을 빠져 나와 서울로 돌아간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김지운 감독 최민식 송강호 조용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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