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청춘월담>의 한 장면.

tvN <청춘월담>의 한 장면. ⓒ tvN

 
tvN 사극 <청춘월담>은 개성 주민인 주인공 민재이(전소니 분)가 가족을 집단 살해한 혐의를 받은 뒤 체포를 피해 외지로 도주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누명을 썼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관헌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다. 집안과 친분이 있는 세자를 만나 도움을 구하고자 한양을 찾아간다.
 
<청춘월담>을 비롯한 사극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등장인물이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등장인물이 성문 앞의 검문을 기지나 눈속임으로 통과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가 많다. 성문과 검문이라는 장애물들에 부딪히기는 하지만, 사극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이런 사극들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이 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 이상으로 국가권력이 이동을 엄격히 통제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강력한 형벌까지 예고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 지역으로 함부로 이동하는 행위는 목숨을 거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성문 앞에서 적당한 연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중의 이동 통제하려는 왕조의 집념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호패제도다. 이 제도는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다가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에야 자리를 잡았다. 이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대중의 이동을 통제하려는 왕조의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호패 제도의 정착 과정은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중기 무렵에는 일반 민중의 호패에 "나이, 거주지, 신장, 용모의 특징"이 표기됐다. 얼굴 생김새까지 기록했으니,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호패가 없는 사람에 대한 형벌은 대단했다. 조선 중기 무렵에는 "호패를 도적질한 자와 호패가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이를 고발한 자는 부역을 면제했다"고 <연려실기술>은 말한다. 약간 후대인 광해군 시대에는 "호패가 없는 자는 극죄로 다스렸으며 사사로이 위조한 자는 참수형에 처했다"라고 이 책은 알려준다. 호패가 없는 사람은 극죄인 사형죄를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호패를 위조하거나 객지에서 제시하지 못해도 참수형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가족은 관노비가 됐다. 호패를 분실한 사람에게 곤장 50대를 칠 때도 있었다. 형리가 살살 때리지 않으면 곤장 50대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국가가 이처럼 지나치게 강력한 형벌을 예고한 것은 대중을 통제할 수단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신용카드 사용 기록 등을 근거로 대중의 위치나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현대 국가와 달리, 옛날 국가들은 가혹한 형벌을 예고하는 것 이외에는 대중을 묶어둘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조선왕조는 호패제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형벌제도뿐 아니라 호패 재질에도 신경을 썼다. <연려실기술>은 숙종 때에 지패법을 시행한 일도 소개한다. 이 제도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고 한다. 종이는 쉽게 닳고 찢어지기 쉽다는 반대론과, 종이로 하면 천 만 장이라도 인쇄할 수 있다는 찬성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거의 실상과 크게 다른 드라마 속 이동
 
 tvN <청춘월담>의 한 장면.

tvN <청춘월담>의 한 장면. ⓒ tvN

 
농업시대의 왕조국가가 호패 제도로 이동을 통제하고자 한 것은 군역·노역·세금 등을 안정적으로 부과하기 위한 동시에, 대부분이 농민인 일반 대중을 토지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노비 신분의 소작농들이 농업생산을 주도했으므로, 이들을 지주의 감독하에 농토에 묶어두고 농업생산과 조세 수입의 안정성을 기하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 이 점에서 국가는 지주계층과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국가가 농민의 이동을 경계했다는 점은 성군으로 평가되는 정조 임금의 업무 지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음력으로 정조 7년 11월 10일자(양력 1783년 12월 3일자) <정조실록>에 소개된 원춘도 암행어사 조홍진에 대한 정조의 업무지시는 옛날 군주들이 이런 일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절에는 강원도의 양대 도시가 강릉과 원주가 아니라 원주와 춘천이었다. 그래서 강원도 암행어사가 아닌 원춘도 암행어사로 불리게 된 조홍진에 대해 임금은 "만약 길거리에서 유망민 부류를 만나게 되면 바로 거기서 출도(出道)하여 조정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알려주고 얼굴을 맞대고 위로하여 깨우쳐주며, 각자가 살던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관청의 승인도 없이 거주지를 이탈한 농민들을 만나면 현장에서 곧바로 어사출도해서 귀가시키라고 지시했다. 오늘날에는 국어사전에까지 '어사출두'로 잘못 표기돼 있지만, 암행어사가 도(道)로 나가 자기 신분을 나타내고(出) 공개적인 직무집행에 착수하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사출도였다. 정조는 그런 어사출도를 통해 원춘도 농민들의 토지 이탈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는 유망민들을 강압적으로 귀가시키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곧 구제해줄 것이니 믿고 돌아가라고 일러줄 것을 지시했다. 또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고 위로하라고 당부했다. 유랑민 증가로 인한 조세수입 감소나 사회질서 동요 등을 우려하면서도, 과도한 행정조치로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정조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국가는 대중의 지역간 이동이 시위나 집회를 위한 게 아니라면, 이를 적극 환영할 때가 많다. 대중의 이동이 금전 소비를 촉진해 지역 간의 재화 분배를 증진시키는 측면을 현대 국가들은 중시한다.
 
그래서 도지사나 군수들이 광고 영상에 출연해 "저희 지역으로 오시라"며 다른 지역 대중을 '유인'할 때가 많다. 관광이 아니라 이주를 권하는 자치단체장들도 있다. 농업경제하의 왕조시대에는 이렇게 다른 지역 주민을 유인하는 도지사나 군수는 징계 대상이었다.
 
옛날 왕조들이 대중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던 점을 감안하면, 우리 시대 사극이 묘사하는 성문 앞 풍경은 너무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권력을 대표해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이동을 통제했던 모습을 오늘날의 사극에서는 느낄 수 없다.
 
등장인물들이 적당한 연기나 절묘한 기지로 성문을 통과하는 사극 속의 장면들은 대중이 지역을 임의로 이동하는 행위가 경우에 따라 목숨을 거는 일일 수도 있었던 옛날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청춘월담>의 제목에 들어간 '월담'의 기분으로 지역과 지역을 임의로 이동하는 모습은 과거의 실상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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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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