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 국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정승 황희(黃喜, 1363-1452)는 각각 한국사를 대표하는 성군과 명재상의 대명사로 통한다. 하지만 이들도 인간이었던 만큼 각자의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 명신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황희가 유능하지만 의외로 인격적인 면에서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는 것이나, 애민의 군주로 알려진 세종이 정작 황희를 비롯한 신하들에게는 악덕 고용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이면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월 8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42회는 '황희는 왜 죽기전까지 은퇴하지 못했나'편을 통하여 그동안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모범으로만 알려졌던 세종과 황희간 애증의 서사를 조명했다.

세종-황희, 애증의 서사
 tvN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조선왕조실록의 태종과 세종편을 보면 '신하가 사직을 요청했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장장 수십년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다. 사직을 청한 신하는 바로 황희였고, 이에 번번이 퇴짜를 놓은 것은 세종이었다. 무려 88세까지 장수했던 황희는 죽기 직전까지 세종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른바 노동착취를 당해야했다. 신하로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황희는 왜 그토록 죽자고 사직하려고했고, 국왕들은 또 왜 황희를 죽자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일까.
 
황희는 고려에서 조선, 두 나라에 걸쳐 평생 7명의 군주를 섬겼고 젊은 시절부터 그 유능함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 말기였던 1376년 우왕 2년에 음서제(공신이나 고위관리의 자제를 시험없이 관리로 발탁하는 것) 14살의 어린 나이에 말단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27세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부임했다. 그로부터 3년만인 1392년 조선이 건국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황희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다시 복직시켰고 이후로 꾸준히 승진을 거듭했다.
 
3대 태종 시대에 이르러 황희의 관직 인생을 바꿀만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태종은 임금의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지신사(知申事. 훗날에는 도승지)가 되어 국왕의 최측근에서 일하게 된다.
 
황희가 어느덧 46세가 되던해, '인사 채용'과 관련된 논란이 벌어진다. 태종이 새로운 관리를 뽑을 때 황희에게 종종 의견을 구하면서 자연히 인사에 관여하다보니 뒷말이 나오게 된 것. 이에 황희는 처음으로 사직을 요청하지만 태종은 오히려 황희에게 불만을 드러낸 관리만 파견시켰고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황희는 왕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종종 주변의 질시와 모함을 당해야했다. 그럼에도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내가 죽는 날, 황희도 따라죽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을만큼 황희에 대한 두터운 믿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1416년, 태종과 황희의 단단하던 관계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이 문란한 사생활과 잦은 비행으로 태종의 우려를 샀으나, 황희는 시종일관 세자를 비호했다. 급기야 양녕대군은 신하의 첩을 임신시키는 대형사고를 저질러 태종의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황희가 세자를 두둔하자, 태종은 황희가 미래의 국왕이 될 세자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앙녕의 폐위를 결심한 태종은 이를 극력 반대하는 황희의 지위와 혜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남원으로 유배하는 중벌을 내린다. 황희의 나이 56세였다.
 
황희의 유배지였던 남원은 훗날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곳이다. 한국의 4대 누작으로 불리우는 광한루를 지은 인물이 바로 황희였다. 비록 태종의 눈밖에 나서 유배지로 쫓겨왔지만 황희의 영향력은 여전하여 그에게 연줄을 대려는 문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황희는 자칫 태종에게 더 큰 오해를 불러올 것을 경계하여 삼가 조심하고 아무도 만나지않았다.
 
한편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자를 교체한지 얼마되지 않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1422년 세종은 자신의 세자 등극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황희를 궁으로 불러오게 한다. 황희의 복직을 추천한 사람은 바로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아버지 태종이었다. 태종은 유배지에 있던 황희의 소식을 몰래 챙기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원망보다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근산하고 있던 황희의 진심을 알게되어 쌓인 오해를 풀었던 것. 황희는 유배 4년만에 중앙정계로 복귀했다.
 
황희가 복귀한지 불과 3개월만에 태종이 병환으로 사망한다. 황희는 환갑인 60세의 나이에 자신이 섬긴 7번째 국왕인 세종을 보필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후 세종은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다. 예조판서로 재임하던 황희에게는 직급이 낮아진 강등인 셈이었다.
 
당시 강원도에 흉년이 이어지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세종은 노련하고 실무경험이 풍부한 황희를 이른바 '해결사'로 투입한 것. 황희는 부임하자마자 환곡 비리와 이재민 등을 강원도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작성한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다. 황희의 노력으로 비로소 강원도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수 있게 되면서 안정을 찾았다. 이 사건은 세종이 황희의 능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1426년, 재상인 우의정의 지위까지 올랐던 황희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이었던 서달이 행패를 부리다가 아전(말단관리)을 폭행하여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황희는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고, 지방 관리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죽은 피해자인 아전의 가족들에게 합의를 강요했다. 업무에서는 누구보다 완벽했던 황희지만, 가족과 관련된 비리나 구설수에 자주 연루되어 곤욕을 치러야했고, 이는 역사에서 황희의 대표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황희의 비리를 밝혀낸 것은 다름아닌 군주 세종이었다. 서달 사건의 보고서를 받고 수상한 점을 느낀 세종은 철저한 재조사를 지시하고 결국 진실이 밝혀졌다. 주동자인 서달은 장형 100대의 중형을 받았고 사건에 연루된 고위직 관리들까지 줄줄이 파면당했다. 황희는 65세의 나이에 파면당하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얼마가지않아 세종은 놀랍게도 황희를 바로 복직시킨다. 많은 신하들이 거세게 반대했으나 세종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수많은 국정과제를 구상하던 세종으로서는 황희를 대체할만한 유능한 인물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규철 성신여대 교수는 "당시는 세종 치세의 전반기로 많은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였기에 황희같이 경험많은 신하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인권과 도덕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살인사건에 면죄부를 준 세종의 정치적 과오라고 할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세종에게 그 정도 리스크를 감수해야할만큼 황희란 꼭 필요한 신하였다.
 
그리고 면죄부는 절대 공짜가 아니었다. 그만큼 황희는 세종에게 평생 정치적인 빚을 지게 되었고, 세종은 이런 황희의 약점을 활용하여 그를 최대한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당시 유교적 관행상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러야했던 황희를 불과 3개월만에 다시 불러들여 복직을 명한다. 황희는 자신의 정치적 과오와 개인 건강 문제등을 이유로 들어 사직을 거듭 청했지만, 세종은 가뿐하게 이를 무시했다.

당시 예법상 부모의 상중에는 술과 고기가 금지되었음에도, 세종은 황희에게 고기까지 보내며 복귀를 독려했다. 황희가 사양하며 받지않으려고 했지만 세종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기를 보냈다. 결국 어명을 거부할수 없었던 황희는 고기를 받고 조정에도 복직할 수밖에 없었다. 좋게말해 신하에 대한 애정이지만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집착에 가깝다.
 
황희가 70대에 접어들며 세종VS 황희간 걸쳐 이어지는 '사직-퇴짜 릴레이'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황희는 삼정승을 모두 거친 끝에 70세가 되어 연로함을 이유로 또다시 사직을 청했다. 세종은 이번에도 거부하는 대신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독려했다. 황희가 71세이던 1433년 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50번이 넘게 언급될 정도로 여전히 그의 활약과 비중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황희는 73세가 되어 "원기가 쇠약함에 따라 백병이 마구 침범해온다"고 호소하며 다시 사직을 청했다. 이에 대한 세종의 답이 걸작인데 "경은 아직 90세도 안 됐지 않은가.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될 것"이었다고. 참고로 조선시대 일반인들의 평균수명은 40세였다.
 
이후로도 실록에 따르면 어떻게든 퇴직하고 싶은 황희의 몸부림은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인데 "귀가 들리지 않는다." "건망증이 심해졌다" "종기로 피가 나고 어지럽다"등등 종합병원이 따로 없을 정도다. 급기야 1438년에는 도성에서 한겨울에 천둥벼락이 치고 비가 내리는 이상기후가 발생하자  황희는"영의정인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탓이니 저를 파면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세종의 답변은 "그대가 아니라 나의 잘못이니, 더더욱 열심히 일하라"였다고.
 
77세이던 1439년, 황희는 이번엔 하혈을 호소하며 몸져눕는다. 이번에는 정말 걱정이 된 세종은 어의를 파견하여 진료와 함께 황희의 상태를 관찰하게 된다. 어의는 황희가 귀는 어둡지만 정신은 온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세종에게 보고한다. 이에 만족한 세종은 황희의 사직을 불허하는 대신 '재택근무'를 명령한다. 

황희가 염원하던 퇴직
 
 tvN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결국 황희가 그토록 염원하던 퇴직은 그로부터도 무려 10년이 더 지난 8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430년, 세종은 황희를 명예직인 영의정부사에 임명하며 사실상 은퇴를 허락했다. 10대부터 시작한 74년의 길고긴 관직생활이 비로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황희의 은퇴를 허락하고 몇 달 지나지않아 세종이 승하한다. 이미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세종은 자신이 운명할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황희를 놓아준 것. 황희는 세종이 승하한 후로도 몇 년을 더 살다가 9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엄청나게 장수한 편이지만, 정작 긴 세월동안 황희가 마음껏 쉴 수 있었던 시간은 말년의 2년 남짓에 불과했다.
 
황희는 개인적으로 보면 이래저래 흠결도 많은 인물이었지만, 평생 관직생활을 해오면서 특유의 유능함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국왕들의 신임을 받으며 무수한 업적을 남긴 명재상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지금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지만, 황희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이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중용받기란 쉽지않다. 우리가 황희의 인생이나, 세종과 애증의 콤비 관계에서 진정 '가치있는 치열한 삶'에 대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벌거벗은한국사 세종대왕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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