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부터 방영 중인 tvN 사극 <청춘월담>은 두 주인공이 괴소문에 시달리는 장면부터 보여줬다. 개성부윤(개성유수·개성군수)의 딸인 민재이(전소니 분)는 자기 가족을 살해하고 달아났다는 엄청난 소문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관헌들의 체포를 피해 남장을 하고 동네를 떠난 뒤 진상 규명에 뛰어들었다.
 
또 다른 주인공인 세자 이환(박형식 분)은 저주를 받아 부상을 입고 오른팔을 못 쓴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그를 견제하는 대신들은 일부러 강무(講武)를 열어 그의 신체적 불편을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소문은 곧 불식됐다. 세자는 산중에서 벌어진 이 사냥대회에서 오른팔로 활시위를 당겼을 뿐 아니라 환영 나온 어린 백성이 선물한 꽃을 말 위에서 오른손으로 집어드는 모습도 보여줬다.
 
괴소문에 시달린 정조
 
  tvN <청춘월담> 한 장면.

tvN <청춘월담> 한 장면. ⓒ tvN

 
 
 tvN <청춘월담> 한 장면.

tvN <청춘월담> 한 장면. ⓒ tvN

 
실제의 조선 정조 이산(재위 1776~1800)은 드라마 속의 세자보다 훨씬 더한 괴소문에 시달렸다. 세손 시절의 그는 불임이라는 소문의 당사자였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세손께서는 아들 못 낳는 병환이 있으시다"라는 풍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정조는 만 10세 때인 1762년에 훗날 효의왕후로 불릴 세손빈 김씨와 결혼했다. 황당한 소문이 난 시점은 영조 후반기인 1772년 이후다. 정조가 결혼한 지 10년을 넘긴 뒤에 그런 이야기가 유행했던 것이다.
 
불임인 세손이 차기 임금이 되면 자칫 왕조의 대가 끊길 수도 있었다. 친척이 왕위를 이를 수도 있었지만, 임금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친척이 아니면 정통성 시비가 촉발되기 쉬웠다.
 
군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차기 군주가 돼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왕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할아버지가 임금이었더라도 아버지가 임금이 아니면 정통성이 약해질 수 있었다. 이로 인한 정통성 시비가 격화되면, 지배층 내부의 쿠데타 세력이나 제도권 밖의 반란 혹은 혁명 세력이 왕실의 약점을 이용해 거병할 수도 있었다.
 
왕조시대에는 자녀가 없는 것이 중대한 흠결이 됐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므로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차기 군주가 될 세손 이산이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문은 세손의 위상을 해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한중록>은 "그 심술은 이제 생각하여도 흉악하도다"라며 소문의 출처가 김귀주라고 지목했다. 영조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정조의 새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동생이 괴소문의 진원지라고 가리킨 것이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역적으로 지목된 김귀주는 정조를 해하려 한 혐의로 흑산도로 유배 갔다가 나주로 옮겨진 뒤 1786년에 사망했다. 바로 그 김귀주가 헛소문을 만들어 민심을 어수선하게 했다고 <한중록>은 말한다.
 
그런데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 있다.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가 바로 그다.
 
아버지 영조의 편애를 받으며 성장한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가 비극적 최후를 맞도록 하는 데 관여했을 뿐 아니라 조카인 정조의 즉위를 훼방하는 데도 가담했다. 음력으로 순조 즉위년 8월 1일자(양력 1800년 9월 19일자) <순조실록>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예전에 정조를 공격한 배후의 몸통으로 화완옹주를 지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한중록>은 정치달에게 시집가서 '정처'로 불리는 화완옹주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정처는 항상 자기 아들 후겸은 글도 잘하고 예의바르고 정중하여 기특하다고 하고, 세손은 제 아들만 못한 듯이 말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러하리오"라고 탄식했다. 화완옹주가 양자 정후겸을 칭찬하면서 은근히 세손을 깎아내리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군주와 세손을 신성시했던 왕조시대에 화완옹주가 상당히 도발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 화완옹주가 자주 시도했던 것이 세손 부부를 이간시키는 일이었다. <한중록>은 "경인년부터 세손과 빈궁 사이를 심하게 금하여, 흔적도 없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없는 흉을 굳이 잡아내어 세손께 듣게 하였다"라고 말한다. 정조가 18세 된 1770년부터 화완옹주가 조카 부부를 적극적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화완옹주는 두 사람을 심리적으로 갈라놓는 일뿐 아니라 공간적으로 갈라놓는 일도 시도했다.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지 못하게 '공작'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한중록>은 "정처는 두 분 사이를 그토록 금하여 행여 아들을 낳으실까 겁을 내고"라고 한탄했다.
 
정조 부부를 갈라놓으려는 이런 시도가 '세손은 불임'이라는 김귀주의 거짓 선전과 맞물려 "민심이 더욱 소란스러웠다"고 <한중록>은 평한다. 1782년 문효세자 출생과 1790년 순조 출생이 없었다면 그런 소문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을 수도 있다.
 
아이를 낳으면 곤란해지는 여성

아이를 낳아야 왕조를 이을 수 있는 정조를 두고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문이 돈 것과 대조되는 장면이 훗날 서쪽 청나라에서 벌어졌다. 아이를 낳으면 곤란해질 여성과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남성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청나라에서 나돌았다. 청나라 말기의 실권자인 서태후(1835~1908)가 그 소문의 당사자였다. 함풍제(재위 1850~1861)의 후궁이었던 그는 최측근 환관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서태후의 남자로 거론된 환관은 안더하이다. 한국 한자로는 안득해(安得海) 또는 안덕(德)해로 표기됐다. 어느 경우든 중국어 발음은 같지만, 글자로 표기할 때는 다르게 된다.
 
1844년에 출생하고 1868년 서태후 정권하에서 참수형을 당한 그의 정확한 실명과 관련해, 2007년에 <중국근대사>에 실린 위안셰밍 상하이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부연구원의 논문 '안더하이 일생·행적 고증(安得海生平事迹考异)'은 전자가 후자보다 먼저 쓰였고 궁궐 문서나 상소문 등에도 전자가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안득해라는 표기를 제안한다.
 
'득해냐 덕해냐'보다 더 논란이 되는 것은 그와 서태후의 관계다. 1962년에 <아시아여성연구>에 실린 추헌수의 논문 '서태후와 청조(淸朝) 말기의 정정(政情)'은 "안덕해는 열하행궁 시에 서태후를 가까이 모신 사람"이라며 "서태후가 섭정의 위(位)에 오른 뒤에는 그는 수행원"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런 뒤 "서태후의 총애가 크면 클수록 그의 행동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며, 도리어 서태후가 안득해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태후의 위신은 물론이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환관의 직무수행 자격에 영향을 줄 만한 소문이었다. 그처럼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소문이 유행했던 것이다.
 
왕조시대의 왕실은 오늘날의 대통령 가족 이상으로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권력층에 관한 정보가 오늘날보다 훨씬 적게 유통됐기 때문에, 왕조시대에는 왕실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의 영향력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에 정조는 아이를 꼭 낳아야 하는 입장인데도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서태후와 안득해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입장인데도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에 휩쓸렸다. <청춘월담>의 세자보다 훨씬 난처한 상황에 빠졌던 것이다.
청춘월담 정조 서태후 안득해 괴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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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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