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각형 무대에 아홉 개의 하얀 판이 놓였다. 가운데에 올려놓은 빨간 사과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복장을 차려입은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등장한다. 무대 뒤편으로는 거대한 브로콜리가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마디관절을 움켜쥘 때마다 들리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 꺽기를 연상하는 댄스가 흥을 돋운다.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는 사과와 브로콜리는 태초의 자연에 와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숨가쁘게 들려오는 비트는 현대사회의 분주함을 직감한다. MRI를 찍을 때 들리는 자기공명이 귓가를 맴돈다. 반복되는 울림은 청중을 무아지경에 빠트린다. 켜켜이 쌓아올린 인간들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다른 이에게 건넨다. 그들의 손을 타고 넘어가는 사과는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들의 머리를 이어준 철선은 인간 사이의 족쇄가 되어 서서히 시선에서 벗어난다. 

"이것은 무용인가, 전시인가?"

대학로에서 진행된 이 작품을 보고 들었던 필자의 생각이다. 겨울철에 볼만한 공연을 모아놓은 '창작산실'에서 무용 분야의 스타트를 끊었던 기대감을 안고 개막 전날(12일)에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을 찾았다.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오브제는 최소화했고, 리허설이 열리기 전부터 네 명의 무용수가 몸을 푸는 장면은 개막을 앞둔 여느 초조함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영상을 공개하지 않은 직전의 무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공연을 마치자 앞선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자명했다. 무용수가 펼치는 몸동작보다 현란한 색으로 뒤덮였던 화려한 잔상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가상현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작업은 50분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했다. 일반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과는 다른 선택지를 찾았는지 모른다. 무용이란 타이틀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혀 무용스럽지 않은 답안을 제시했다. 작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논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이 장르가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쯤, 김호연, 임정하 안무는 의구심을 자아냈던 필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 안에 가지고 있던 메시지가 있지만, 관객들의 상상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메시지를 콕 집어서 말씀드릴 수 없어요. 작업을 보며 인간과 자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단편적인 조각모음을 보고 들었던 생각
 
 두 번째로 강조하는 관람 포인트는 후반부 찰나를 지목하고 싶다. 미래에서 온 듯한 착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환상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무대를 뒤덮는다.

두 번째로 강조하는 관람 포인트는 후반부 찰나를 지목하고 싶다. 미래에서 온 듯한 착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환상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무대를 뒤덮는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우리의 세상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진행된 <>;"hello world";>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창작산실> 올해의신작에 선정된 작품이다. 무용의 첫 번째 작품으로 관객에게 선보이는 이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난감했다.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헬로 월드'이라는 문구의 앞뒤를 가로막는다. 이런 머뭇거림에 안무가는 과도한 낯섦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켰다. 

"헬로월드는 인터넷을 시작할 때, 사용된 대표적인 프로그램 언어예요.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첫 번째 게이트라고 보면 맞을까요? 코딩을 하는 의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용어입니다."

<>"hello world";>는 지구, 환경, 생태계를 소재로 동시대의 화두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 생태계와 인간의 조화, 파괴와 인간에 대한 시선을 정리하는 공연이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춤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실험적 정신을 중무장한 댑댄스프로젝트(DAB DANCE PROJECT)의 최신작이다. '춤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는 고민하는데 무용이지만 영상에 더 많은 것을 신경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1월 13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대중에게 공개됐다. 자연의 환경오염과 인간을 주제로 꾸준히 작업해온 단체는 동시대가 직면한 환경위기를 예술적인 상상력으로 동원해 문제인식을 일깨웠다. 

이 작품은 무용으로 환경오염을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융복합, 메타버스, 가상현실 등을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이것은 스테이지 위에서 펼쳐지는 무용수의 몸동작보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융복합 요소가 두드러졌다는 뜻이다. 다만 필자를 강하게 짓누른 생각은 무용수가 본래의 기능보다는 시각적인 것을 도와주는 보조 역할로 전환됐다는 점이었다.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럴 필요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작품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태블릿'이다. 이것은 증강현실(AR)을 표현하고 싶었던 안무가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고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작품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태블릿'이다. 이것은 증강현실(AR)을 표현하고 싶었던 안무가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고 고백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이 공연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소극장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 영상의 미를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2016년도에 설립된 단체의 배경을 들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체는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김호연과 임정하를 비롯해 영상을 담당하고 있는 임정은까지 총 3명으로 구성됐다(임정하와 임정은은 쌍둥이 형제다). 영상감독이 전속 스태프로 소속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보조의 역할을 넘어섰다. 그래서 영상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관객이 어떻게 봐라보는 가에 따라서 무용공연으로, 시각예술로 부류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단체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중시한 이유를 이렇게 덧붙였다.  

"비언어적인 무용을 처음 접한 관객들을 배려했어요. 메시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관객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해'와는 동떨어진 무용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죠. 단순히 보고 감상에 초점을 맞췄는데 세상이 워낙 언어적인 체계로 잡혀 있고, 논리적인 개념 예술들도 많이 나오니까 그런 부분을 많이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방법을 선택했어요." 

영상적인 요소는 전작에서도 흔하게 사용했다. 작업의 모티브는 2017년에 초연했던 <다시 만난 세계>에서 출발했다. 전작이 빅뱅(대폭발)에서 만들어진 지구가 오염이 되는 과정을 미니어처로 표현했다면, 이번 작품은 4차 산업혁명을 거쳐 "새롭게 시작하는 또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까?"를 되묻는다. 이런 고민을 거듭 하면서 NFT에 대한 영향을 받았고, '원초적인 탄생'을 고민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사과와 브로콜리는 태초의 자연을 떠올린다. 단체가 미적인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과일이나 채소를 등장하는데, 이것은 화려한 색감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그것은 극중 중요한 이미지로 부각됐던 '하트'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인간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물이었는지 모른다. 여기에 무용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아홉 개의 태블릿을 차용했다. 무용수의 손가락으로 연속된 이미지가 보여지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 작품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가 관객에게 던져준다. 이 방식에 대해서 안무가는 무용의 주제인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이라 설명했다. 

작품을 구성하는 세 개의 관람 포인트
 
 이 작품은 아날로그적으로 AR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해서 태블릿이 떠올렸다. 이것은 대단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소한 것을 가지고 아날로그적인 AR로 실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적으로 AR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해서 태블릿이 떠올렸다. 이것은 대단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소소한 것을 가지고 아날로그적인 AR로 실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50분의 큰 줄기는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의 태초부터 현대시대를 거쳐 미래로 도약하는 가상현실의 범위를 넘나든다. 이것이 연대기에 따라 자로 재듯 흘러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흐름은 꿰뚫어 볼 수 있다. 작품의 초반을 장식하는 장면은 철저하게 '태초'에 방점을 찍었다. 이것은 원초적인 이미지를 부각하는 오브제가 여럿 등장한다. 그것이 대자연의 형상과 아담과 이브가 물었던 사과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후에 안무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요소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두 번째로 강조하는 관람 포인트는 후반부 찰나를 지목하고 싶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 미래를 상징하는 대칭점을 찍었다. 미래에서 온 듯한 착각,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환상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무대를 뒤덮는다. 마치 조각모음의 픽셀처럼 변하는 장면은 인간이 디지털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작품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태블릿'이다. 이것은 증강현실(AR)을 표현하고 싶었던 안무가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고 고백했다. 

"화면을 통해서 바라보는 AR(증강현실)은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한정된 예산으로는 구현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아날로그적으로 AR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태블릿이 떠올랐어요. 이것은 대단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소소한 것을 가지고 아날로그적인 AR로 실현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죠. 태블릿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증강현실을 보여줬어요. 제일 효과적으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잖아요."  

조합과 해체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hello world";>는 지구, 환경, 생태계를 소재로 동시대의 화두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 생태계와 인간의 조화, 파괴와 인간에 대한 시선을 정리하는 공연이다.

<>"hello world";>는 지구, 환경, 생태계를 소재로 동시대의 화두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 생태계와 인간의 조화, 파괴와 인간에 대한 시선을 정리하는 공연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안무가는 처음에 9개의 태블릿을 가지고 이미지의 흐름을 연대기순으로 보여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는데, 이것은 후에 조합과 해체를 반복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내세웠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끊임 없이 브레인스토밍을 거쳤는데, 연대의 순서보다는 끝까지 해체해보자고 다짐했단다.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 속 환경오염을 다룬다. 태블릿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원전이라든지 오염된 물고기가 즉각적으로 등장한다. 태블릿에 사용한 모든 이미지들은 다소 친절하지 않은 설명들의 나열처럼 파편적으로 던져진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토리를 정해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세상 안에 어떤 자연이 생존할까라는 궁금증을 같이 고민해보자는 의도였다. 

뚜렷하지 않은 형상들을 연결시켜가며 작업을 하는데, 환경오염이라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다고 위안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환경오염에 관한 메시지를 부각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결합될 때 나오는 현상들을 마치 다른 종류의 음악을 감상하듯이 바라보면 좋겠다며 바람을 드러냈다.
창작산실 무용 >;"HELLO WORLD"; 댑댄스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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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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