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기농(基農) 정세권(1888-1965)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사업가이자 한국 최초의 부동산업자로 꼽힌다. 무엇보다 암울했던 일제시기에 조선인들을 위한 중소형 한옥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방식을 통하여 북촌지역을 지켜내며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 '디벨로퍼(개발자)'이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핫플레이스'로 불리며 과거가 현재가 공존하는 지금의 북촌이 탄생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정세권의 역할이 컸다.
 
11월 23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핫플레이스 북촌은 어떻게 탄생했나'편을 통하여 북촌의 역사와 정세권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북촌(北村)은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시절부터 지명이 존재했고, 왕족, 고위 관료 등 권세가 출신들이 대거 거주하며 '양반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북촌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한옥마을은 흔히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정작 그 역사는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30년대 북촌일대를 재개발하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이 새롭게 들어섰다. 북촌을 한옥마을로 설계한 인물이 바로 정세권이었다.
 
지금의 북촌을 만든 인물 정세권

조선시대의 북촌은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인접했고 가화동-인사동 등을 포함하여 지금보다 규모가 더 넓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명동, 을지로, 충무로 지역은 '남촌'이라 불리며 비교적 가난한 양반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북촌과 남촌의 위상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며 크게 변화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일본인들이 대거 남촌에 정착했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수도 한양의 이름을 경성으로 변경했고, 남촌을 중심으로 일본인 정착 세력의 범위는 점점 더 커져갔다. 남촌 지역에는 일본인 관공서와 은행, 회사 등이 속속 설립됐다. 경성은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북촌과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남촌 지역으로 나뉘어 서로의 거주지를 침범하지않는 암묵적인 규칙속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1920년대 들어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경성에 일본인들의 인구가 크게 폭증했다. 특히 일본의 부호와 사업가들이 대거 조선에 진출하면서 과밀해진 남촌을 넘어 조선인 거주지역인 북촌까지 침범하게 된 것. 일제는 북촌으로 일부 주요 관공서들을 옮겨서 자연스럽게 일본 인구의 북촌 이동을 유도하는가하면, 광화문을 옮기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조선의 궁궐을 파괴하고 식민통치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북촌 점령과 함께 급속도로 치솟은 땅값은 조선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오늘날 부동산 폭등의 원리와도 같다. 집값 상승으로 자리를 잡지 못 한 많은 조선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북촌을 떠나야 했다. 당시 경성의 조선인 인구는 16만~17만으로 추정되며 이 중 자가가 없는 조선인들만 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정세권은 당대 경성에서 '건축왕'이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떨치던 부동산개발업자이자 건축가였다. 경남 고성 출신의 정세권은 1920년대 고향을 떠나 기회의 땅으로 여겨지던 경성에 올라왔다. 정세권은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경성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부동산이고 "집이 곧 돈이 된다"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종합건축사인 '건양사'를 설립했다. 정세권의 뛰어난 수완으로 건양사는 승승장구했고 정세권은 당대의 재력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정세권은 본인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고 항상 흰색 두루마기 한복을 트레이드마크처림 입고 다녔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정세권은 평소 "사람수가 힘이다. 일본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경성에서 일본인의 숫자와 위세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경계했다. 종로는 북촌 지역에 포함된 청계천 윗동네로 당시 '민족의 거리'로 불릴 만큼 조선인들이 똘똘 뭉쳐살던 상징적인 지역이었다. 정세권의 발언은 일본의 침탈에 맞서 북촌 지역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인 마을 건립 프로젝트'와 아이디어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정세권은 많은 조선인들이 북촌에서 살기를 바랬다. 1920년대 후반 익선동 지역 누동궁 터에 매물로 나온 2500여 평의 땅을 사들인 정세권은, 여기에 대규모 '익선동 조선인 마을 건립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당시 경성의 주택은 크게 나누어 한옥, 일본식, 서양식 문화주택의 3가지로 분류되었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역시 편리성이 뛰어난 현대적인 문화주택이었다. 그런데 정세권은 조선인 마을을 건립하며 한옥을 선택했다. 주로 서민층인 조선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거주할 수 있는 집을 공급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으로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땅 나누기'를 통하여 전통 한옥을 작은 규모로 개량한 '도시형 한옥' 주택들을 대거 선보였다. 정세권이 직접 설계한 평면도에 따르면 전통 한옥의 특징인 넓은 마당을 없애고 여러 개의 방을 작은 공간내에 효율적으로 배치한 것이 두드러진다. 지금봐도 뛰어난 정세권의 안목과 사업수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게해서 탄생된 68채의 집이 바로 지금의 '익선동 166번지 한옥마을'이 됐다.
 
하지만 정작 마을을 짓고 난뒤 또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저렴하게 공급을 했음에도 집값을 제대로 낼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있는 조선인들이 많지 않았던 것. 일제강점기의 은행들은 조선인들의 신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대출에 제약이 많았다.
 
이에 정세권은 또 하나의 기발한 묘안을 마련해내는데, 바로 '집값 할부 거래'였다. 정세권은 중류 이하의 계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부, 월부까지 허용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많은 서민들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부자에게 집을 팔아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가난한 서민이라도 조선인이라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정세권은 조선 물건을 쓰자고 장려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관세 폐지로 값싼 일본 물건들이 연이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잇달아 도산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이 바로 '조선물산 장려운동'이었고 정세권도 적극 동참하며 직접 물산장려회사인 '장산사'를 건립하고 <실생활> 등 잡지를 발행했다. 1931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설하면서 기부금 부족으로 약속된 건축대금을 받지 못 할 상황에 놓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건물을 완공했다. 조선 경제를 살리려는 정세권의 진심어린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독립운동 아니냐" 일제의 추궁

조선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려고 했던 정세권의 연이은 노력은 자연히 일제의 심기를 거스렸다. 일제 경찰은 정세권을 종로경찰서로 소환하여 심문하며 "당신은 실상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정세권이 독립운동가로 몰린다면 본인이 추진해온 한옥 건축사업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오히려 정세권은 "오사카 사람이 오사카 물건을 쓰는 것도 독립운동이냐"고 기세등등하게 받아치며 "우리는 조선인으로 낙오된 조선 물산을 장려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정세권의 당당한 대꾸에 할말이 없어진 일제 경찰은 결국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감시에도 정세권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정세권은 익선동 개발에 이어 가회동 33번지 33번과 31번지 일대를 잇달아 매입했다. 한때는 친일파가 소유했던 땅을 한 회사가 매입하면서 이후 다시 정세권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 이로서 정세권은 약 7100평에 이르는 지역을 재개발하는 대규모 한옥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됐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낡은 초가집으로 가득했던 가화동 일대는 아기자기한 한옥 마을로 재탄생했다. 북촌 이외의 지역에도 경성 곳곳에 정세권이 지은 도시형 한옥의 숫자는 모두 합치면 총 6000여 채에 이르렀다. 정세권은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 조선 땅을 지켜내고 조선인들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정세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않았다.

정세권은 한글을 지키려는 조선어학회와도 남다른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1935년에는 2층으로 된 양옥집을 기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원들은 일제가 불법체포하고 탄압하면서 후원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정세권 역시 고초를 겪어야했다. 정세권은 일제에게 체포되어 고령의 나이에 잔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또한 1943년에는 일제가 친일파 양성 단체인 '대화숙'에 사유지를 모두 기부하라는 강요를 받고 땅을 모두 빼앗겨야 했다. 정세권이 설립한 건양사 역시 건설면허가 취소 당하며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정세권은 일제의 핍박과 감시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1949년에 촬영된 조선어학회 수난자 동지회 기념사진에서는 어느덧 나이가 든 백발이 된 노년의 정세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세권은 이후로도 조선어학회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1957년 '한글 큰사전' 편찬을 모두 지켜봤다. 그리고 1965년 9월 14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처럼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정세권이라는 이름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정세권은 여러 민족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지만 앞장서서 주도한 인물은 아니었고, 건축가로서도 정규 건축교육을 받고 이름있는 건축물을 남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 조선인으로서 받는 차별, 본인의 사업적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서민들을 위하여 수많은 한옥을 지었던 정세권의 업적은 어느 독립운동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무엇인가를 싸우고 부수는 투쟁도 어렵지만,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은 어쩌면 더욱 힘들고 고단한 과정이다. 우리의 땅과 문화를 빼앗겨야 했던 일제 강점기에, 정세권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집짓기'로 조선의 땅과 조선인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하여 노력한 인물이었다. 오늘날의 북촌은 정세권같은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귀중한 유산이었다. 북촌을 지날 때마다 한번쯤 이곳을 만들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되새겨봐야 할 이유다.
벌거벗은한국사 정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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