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천적 관계'라는 말이 붙으려면 양 선수의 전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거나 기량 혹은 커리어가 떨어지는 선수가 우위에 서야 한다.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는 선수가 자신보다 약한 선수를 압살하는 상황은 해당되지 않는다. '저렇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할 관계가 아닌데?' 혹은 '어떻게 저 선수가 이길 수가 있는거지?' 같은 놀라움 혹은 흥미요소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과거 맷 세라가 UFC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극강 챔피언 조르주 생피에르를 잡아냈다던가 프라이드 시절 엄청난 카운터 펀치로 미르코 크로캅을 눕힌 케빈 랜들맨 등의 사례같이 언더독이 한번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경우는 보통 '이변'이라고 부른다. 보통 다시 리매치가 벌어지면 이전 경기에서 방심했던 탑독이 심기일전하며 리벤지에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첫 번째 대결에서 이변을 만들어냈던 언더독이 다음 경기까지 잡아버려야 언론이나 팬들 사이에서 천적 관계라고 불리우게 된다. 그렇다면 천적 관계는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보통은 룰의 차이, 파이팅 스타일에서 오는 상대성에서 많이 갈린다. 프라이드와 UFC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격투 단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룰이나 방식을 가지고 운영한다.

특정 단체에서 맹활약하던 선수가 이적을 한 후 예전만큼 힘을 못 쓰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마우리시오 쇼군같은 경우 UFC에서도 챔피언에 오르는 등 잘하기는 했지만 프라이드 시절 최고의 특기였던 스탬핑 킥, 사커킥을 봉인해둔 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만약 프라이드가 멀쩡히 운영되어서 그대로 뛰었다면 더욱 잘했을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파이팅 스타일의 차이도 있다. 타격가로서 최상위 클래스에 있어도 테이크다운 디펜스가 약한 경우 레슬러 스타일과 만나면 고전할 공산이 크다. 반면 그만큼의 타격 레벨은 되지 못해도 테이크다운 디펜스가 되는 경우 훨씬 더 잘 싸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대신 두 타격가가 붙으면 전자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실바와 퀸튼, 프라이드와 UFC에서 2승씩 나눠가지다
 
 반더레이 실바는 퀸튼 잭슨에게 프라이드 시절 2승을 가져갔지만 이후 타 무대에서 2패를 허용하고 말았다.

반더레이 실바는 퀸튼 잭슨에게 프라이드 시절 2승을 가져갔지만 이후 타 무대에서 2패를 허용하고 말았다. ⓒ UFC

 
'도끼살인마' 반더레이 실바와 '광견' 퀸튼 잭슨, 무시무시한 별명만큼이나 이들은 매우 터프하고 파괴력이 넘치는 난폭한 파이터들로 악명을 떨쳤다. 그런 만큼 둘의 맞대결은 항상 뜨거웠다. 누가 이기든 경기 내용 하나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둘은 총 4번을 맞붙어 2승씩 나눠가졌는데 모두 넉 아웃으로 승부가 났다.

전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천적같은 관계였다. 프라이드 시절에는 클러치 상황에서 집념을 드러내던 실바가 2번을 모두 잡아내며 천적 칭호를 가져갔다. 하지만 이후 UFC와 벨라토르에서는 퀸튼이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냈다. 프라이드 때를 빼고 보면 퀸튼이 천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전반기 후반기에 걸쳐 서로가 천적인 관계였다.

프라이드 시절 퀸튼은 다른 선수를 상대로는 자신의 스타일을 후반부까지 유지하며 안정된 경기력을 보였지만, 실바에게는 잘 싸우다가도 결국에는 처참하게 패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반대로 그런 실바는 리델에게 한계를 절감하며 완패했고 지난 회에 언급했다시피 퀸튼은 거의 사냥꾼 수준으로 리델에게 강했다. 어찌 보면 이래서 '상대성'이라는 말이 나오고 전력분석이나 파이팅 스타일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퀸튼의 스탠딩에서의 가장 큰 장점은 탄탄한 안면가드다. 또한 수준급 복싱능력을 갖춘 만큼 안면 쪽으로 한방씩 찔러 들어오는 카운터에 대한 대처도 빠르다. 거친 외모와 달리 정석적이고 완성도 높은 펀치 공격을 구사한다. 어찌 보면 당초부터 리델을 가장 잘 상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당시 '악마의 소굴'로 불리던 슈트복세 아카데미 소속의 간판격이었던 실바는 난타전을 즐기고 한방씩 정확하게 치는 것보다는 핸드 스피드를 앞세워 다소 마구잡이성(?)으로 예리하게 많이 휘두르는 편이었다. 거기에 밑에서부터 위로 올려치는 니킥이라는 무기는 경기가 중후반으로 갈수록 퀸튼의 안면 가드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일쑤였다.

치열한 접전 이후 실바의 니킥 감옥에 갇혀 처참하게 링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퀸튼의 모습에서 '두 선수 사이에는 넘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로 퀸튼은 '대장군' 마우리시오 쇼군과의 일전에서도 완패를 당했는데 슈트복세 특유의 파이팅 스타일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인 듯 하다.

하지만 이후 슈트복세의 여러 가지 무기가 강제로 봉인되어버린 타 무대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스탬핑킥, 사커킥 등을 쓰지 못하고 한창 때에 비해 기동력도 떨어진 실바는 케이지로 전장을 바꿔서는 펀치 위주의 좀 더 다듬어진 방식으로 경기에 임했다. 이는 파워와 디펜스에서 앞서는 퀸튼에게 호재였다. 결국 이후 치러진 두 번의 일전에서 실바는 프라이드 시절의 맞대결이 무색할 만큼 무력하게 패하고 말았다. 

크로캅에게만 3패 허용, 실력 차이? 불운?
 
 미르코 크로캅이 조쉬 바넷에게 3전 전승을 거둔 배경에는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와 더불어 경기운 등도 작용했다는 평가다.

미르코 크로캅이 조쉬 바넷에게 3전 전승을 거둔 배경에는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와 더불어 경기운 등도 작용했다는 평가다. ⓒ UFC

 
타격과 그래플링의 밸런스가 잘 잡힌 191cm, 116kg의 캐치 레슬러. 거기에 힘과 맷집이 좋고 근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언변과 쇼맨십까지 갖추었다. 이런 선수라면 주최측에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줄 가치가 있다. 프라이드 시절 조쉬 바넷이 그랬다.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미르코 크로캅의 '빅3'체제가 지속 되던 과정에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유일한 선수였다. 기량과 상품성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넷은 완전히 뜨지는 못했다. 다른 스타급 선수들보다 다소 늦게 프라이드에 입성한 이유도 있지만 크로캅에게만 3패를 당한 부분도 악재로 작용했다. UFC 시절 랜디 커투어를 제압했던 것은 물론 프라이드 무대서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 마크 헌트, 거기에 더해 호드리고 노게이라마저 물리치며 표도르의 대항마로 언급되기도 했던 그이지만 크로캅을 상대로 3전 전패하며 상품성이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바넷이 크로캅에게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기량 차이가 심했냐?'고 물어오면 난감한 부분도 많다. 노게이라와의 일전에서마저 이겼을 정도라면 크로캅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선수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넷 입장에서는 3번의 대결 중 2번은 아쉬움이 남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2번째 맞대결이었던 PRIDE 30 'STARTING OVER' 대회에서만 멀쩡한 상태로 경기를 치렀고, 첫 번째 경기였던 PRIDE 28 'High Octane' 대회에서는 불의의 부상으로 인한 경기중단, 그리고 '무차별급 그랑프리' 최종 결승에서는 호드리고 노게이라와의 접전으로 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크로캅은 반더레이 실바를 손쉽게 물리치고 올라와 체력적인 부분에서 앞서있었다.

체력이 방전된 바넷은 당시 경기에서 크로캅의 샌드백으로 전락한 끝에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으로 시리즈를 마치고 말았다. 3전패의 배경에는 기동성 차이가 큰 데다 그래플러치고 테이크다운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크로캅이 편하게 경기를 펼치게 해준 점이 가장 컸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이래저래 불운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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