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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메싱 <일그러진 몸>
 캐런 메싱 <일그러진 몸>
ⓒ 나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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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여성노동자들의 일터 현실이 비슷할 수 있을까? 캐나다의 인간공학자 캐런 메싱의 책 <일그러진 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국과 캐나다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닮은 성/젠더 차별의 현실이었다.

신체적 차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일터, 차이가 차별과 열등함으로 돌아오는 일터에서 여성들은, 혹은 차별받는 몸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캐런 메싱의 오랜 연구 경험과 실천적 성찰을 담았다.

남성 중심적으로 설계된 일터

메싱은 여성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노동자들의 숨겨진 위험을 드러내는 데 이상적인 도구로서 인간공학적 분석을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평생 현장 기반 여성노동자 건강 연구를 해왔다. 청소, 전기통신, 조경, 병원, 저임금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인터뷰해 왔다. 연구가 일터 현실을 바꾸는 거름이 되도록 지역 공동체와 노동조합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왔다.

대부분 남성 기준으로 설계된 작업환경과 작업 도구 등의 문제, 그리고 2등 신체, 2등 직업이라고 표현할 만큼 차별적인 여성의 일터가 있다. 일터에서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할 때 업무상 재해를 더 많이 당하며, 근골격계 문제를 더 겪는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일자리에 대한 위협 때문에 차이를 감춰왔다.

메싱은 여성의 신체가 '두 번째 계급'으로 대우받지 않으려면 우선 수치심과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용처럼 거대한 직장 내 성차별주의'에 맞서 용기 내어 보자고, 연대하자고 먼저 제안한다.

메싱이 강조한 연대는 그의 오랜 경험에서의 성찰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혼자선 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있다. 예컨대, 퀘벡 노동조합은 메싱의 연구 결과를 법과 정책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연결된 법학 교수들은 노동조합의 법률 전문가 및 안전보건 담당자들과 협력해 여성과 남성의 산재보상 결정에서의 공정성을 비롯해 직장 내 정신건강, 일-가정 상호작용, 불안정노동, 세계화를 둘러싼 정책들을 젠더와 관련해 검토하고 정책 변화를 이끌었다.

메싱은 말한다. 우리는 용(거대한 차별)을 죽일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크기를 알게 되었고, 용이 뿜어내는 불길에 물을 뿌리는 변화를 가져왔다고.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직업병, 드러내며 싸우기

메싱은 책에서 어떤 노동조건은 여성의 재생산에 특히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여성이 통증, 열, 근육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생리주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또 유기용제나 추위, 어느 특정 업무에 노출되면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지거나 통증이 심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문제에 관한 자료는 구체적으로 분석된 적이 거의 없고, 밝혀지지 않은 위험은 여성의 특성에 기인한 문제로 평가되고 여성의 낙담과 개별화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예방 노력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해왔다는 점 역시, 메싱은 강조한다.

이러한 구절을 읽으며, 나는 반올림에서 만나온 전자산업 여성노동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반올림이 기획하고 희정 작가가 쓴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한국의 반도체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들도 <일그러진 몸>의 캐런 메싱이 만나온 캐나다의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반도체 여성노동자들은 생리통, 생리불순에 시달리고, 하혈하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유산의 고통을 경험했다. 심지어 아이가 아프게 태어나기도 했다.

'클린룸'의 생식독성 문제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문제였지만, 문제를 드러내기는 전혀 쉽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본인 때문에 아이가 아프게 태어난 것은 아닌지 자책에 시달리기도 했고, 의심이 들어도 회사에 따져 묻지 못했다. 심지어 여성들은 화학물질 독성정보에 대한 알권리에서조차 배제되어왔다.

삼성반도체가 2010년 이전에 엔지니어들에게 나눠줬다는 '환경수첩'에는 공정별 주요 화학물질의 인체에 미치는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는데(발암물질도 6종), 여성노동자(오퍼레이터)에게는 지급되지도 않았다. 이처럼 젠더 차별이 만연한 현장에서 건강은 치명적이었다. 여성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희생이 따랐다.

2019년에 나온 '반도체 제조공정 노동자에 대한 건강실태 역학조사'(암 질환 중심,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따르면, 백혈병의 경우(주로 2010년 이전에 입사한) 여성 오퍼레이터에서 발생이 높은 경향을 보였으며, 사망은 유의하게 높았다. 비호지킨 림프종도 여성 오퍼레이터(특히 20~24세)에서 암 발생 및 암 사망이 유의하게 높았다. 여성 위암, 유방암 등도 일반인과 비교해 발생 비율이 높았는데, 특히 20~30대에서 상대적으로 발생 비율이 높았다.

이 연구 결과는, 메싱이 지적한 것처럼, 그동안 여성 노동자에게 더 위험할 수 있는 클린룸의 서늘한 온도, 독성물질들, 야간 교대근무의 영향에 대해 간과해온 결과라 생각한다.

연대해서 싸우자고 제안하는 작가

진즉에 문제가 드러나, 실태가 연구되고 바꾸기 위한 실천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삼성의 극악한 무노조 경영이 철폐되어, 노동조합이 건강권 문제를 최선두에서 고민했다면? 그동안의 아픔들이 자꾸만 돌아봐지는 이유다.

최근 삼성전자 계열사에 민주 노조들이 생겼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이제 직업병 고통이 좀 줄어들 수 있을까? 야간교대에도 변화가 생길까? 클린룸 지하에서 화학물질이 떨어질까 봐 헬멧을 쓰고 일하는 중년의 여성 하청 청소노동자들에 관한 직업병 연구는 이루어질까?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안전하고 공정한 일터를 위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메싱은 우선 여성노동자(과 협력자들) 간의 단단한 결속을 강조한다. 그리고 과학뿐 아니라 조직적 정의와 정치적 행동이 필요함을 감추지 않는다. 우리 몸과 우리의 한계를 정하려는 것들에 수치스러워 하기를 멈추고, 평등과 건강을 위해 연대하여 함께 싸우자고 제안한다.

메싱의 이런 제안은 여전히 많은 것이 두려운 우리에게 무한 감동과 용기를 준다. <일그러진 몸>이 많은 이들에게 읽혀 평등을 향한 변화의 길이 생기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종란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


일그러진 몸 - 일하는 여성의 몸, 수치심, 연대에 관하여

캐런 메싱 (지은이), 김인아, 류한소, 박민영, 유청희 (옮긴이), 나름북스(2022)


태그:#캐런메싱, #일그러진몸, #여성노동자건강권, #여성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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