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야자수와 전선>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야자수와 전선>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10대 청소년의 삶은 때때로 어두운 그림자에 쉽게 현혹되며 그로 인한 위협 앞에 던져지곤 한다. 쉽게 동경하게 되지만 제대로 닿기 위해서는 정직한 시간의 길이가 필요한 '어른'이라는 이름 앞에 오만과 자만을 부리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때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절반에 불과하며, 정말로 알고 있는 것들조차 세상의 풍파로부터 이겨내며 얻은 것들이 아니기에 진짜 어른의 그것에 비해 단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 선댄스영화제의 U.S. 경쟁부문에 초대되어 찬사에 가까운 평가를 얻으며 각본상과 편집상, 감독상까지 움켜쥔 제이미 덱 감독의 영화 <야자수와 전선>에는 그런 10대 소녀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17세 소녀 레아(그레첸 몰 분)와 30대 중반의 톰(조나단 터커 분) 사이에 시작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지금 청소년의 성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또 그루밍 범죄의 시작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는지 들여다 본다. 이 작품은 2018년 감독이 연출했던 동명의 단편영화를 기초로 제작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02.
영화는 레아가 톰을 처음 만나던 날의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방학을 함께 보내던 친구들과 식사가 끝난 시점이다. 처음부터 값을 치를 생각이 없었던 아이들이 레스토랑을 뛰쳐나가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레아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억센 주방장이 그녀를 붙잡고 만다. 친구들은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주방장은 레아의 뺨을 때린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톰이다. 백의의 기사처럼 등장한 그는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레아를 구출해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다른 10대 소년들과 달리 도덕적 갈등을 할 만큼 성인에 가까운 심리적 중심을 안고 있던 레아는 그런 톰으로부터 자신의 또래들과 다른 무언가를 느낀다. 겉으로는 십분 레아의 의지를 존중하는 듯 하며 매너 좋은 태도를 보이는 톰 역시 그 속을 제대로 알 수는 없으나 레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조금도 억지스럽지는 않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레아는 그의 매너와 매력에 호감의 정도를 키워간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전제 조건 자체가 잘못 성립되어 있다. 애초에 서로의 의지를 존중하고 관계의 태도를 맞춰갈 수 있는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청소년과 성인의 문제. 톰이 레아의 나이보다 곱절이나 더 많다는 사실이나 레아가 두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인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두 사람의 만남은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이가 많고 상대의 심리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쌓인 성인 남자의 쪽으로 말이다.

03.
17세 소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이방인 성인 남자에게 레아가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이유에는 단순히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사랑의 형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저 호기심에 사랑도 없이 또래들과 몸을 섞고 어른을 흉내내기에 급급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하나의 관계를 구축할 만큼의 힘이 있을 리 없다. 그녀가 사랑이라 여기는 자리에는 결핍으로부터 기인하는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마음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위치한다. 실제로 그녀의 삶에는 다른 평범한 또래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 공백을 외부의 무엇으로부터 채우고자 한다.

아빠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엄마와 단둘이 생활해 온 레아. 그렇게 성실한 편이 되지 못하는 엄마는 딸보다 늦게 일어나 직장에 지각하기 일쑤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며 여전히 자신도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데이트 상대를 집에 데려올 때마다 딸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니 집은 하나인데 두 개의 사생활이 놓여 있는 상황이라 그때마다 레아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돌게 된다. 마음을 의지하는 쪽도 레아보다는 엄마다. 이별을 맞이하게 되면 언제나 딸의 관심을 필요로 하며 위로 받고 싶어하지만 정작 레아의 마음을 돌보거나 위로해주고자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 설마 운명이 정해준 인연 같은 건가?"

그러니까, 여전히 낯설기는 하지만 또래와는 다른 농익은 매너와 접근 방식으로 마음을 전해 오는 꽤 괜찮은 성인 남자의 제안은 그것의 옳고 그름의 영역을 비켜나 17세 소녀에게는 그저 그것으로 마음을 두고 싶은 달콤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항상 자연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충분한 의심과 의구심이 자리할 수 있을 정도로 묘한 순간들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지만 톰이 아니고서는 그런 자리를 다시 곁에 둘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레아는 그런 마음을 스스로 지우고자 노력하는 것 같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야자수와 전선>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야자수와 전선>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두 사람의 관계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에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테지만, 우리의 삶은 현실에서도 극에서도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소녀의 마음이 완전히 기울였다고 여겨질 즈음, 남자의 태도는 어김없이 돌변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레아' 남자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던져질 때가 신호다.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도 알려지고 조롱의 대상이 되면서 레아의 결핍은 더욱 깊이 파이게 되고 엄마와의 다툼 역시 잦아지면서 소녀의 시선은 점점 더 톰의 세상으로 고정되기 시작한 바로 그때다. 애초에 기울어져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물밑에도 놓여있지 않다.

영화의 러닝타임 모두를 소비해 두 사람의 관계를 확정하는 동안 영화는 특별한 기교없이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객들에게 인지된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와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묘한 불안감은 영화의 스토리 뒤편에서 관객들의 심리가 단 한순간도 안정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익숙한 문법에 의해 극이 빠른 시점에서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물론 그 목적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뤄질 이 모든 이야기의 훅, 어른의 사랑을 믿었던 소녀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결말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직접 마주하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있지만 실제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뤄지고 있을 안타까운 현실.

그나마 아주 미약하기는 하나 사회의 자정 능력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어른의 개입이 영화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톰의 민낯을 이미 알고 있는 레스토랑의 한 종업원이 레아에게 몰래 다가와 도움을 주겠다며 신고가 필요한 상황이냐고 묻는 장면이다. 이 작고 약한 손길은 곧 톰의 제지에 의해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지만 이에 대한 어떤 바람과 같은 것을 제이미 덱 감독은 놓고 있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05.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 일말의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정형화된 결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권선징악 혹은 위기를 딛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해피 엔딩. 그런 결말에 대한 기대를 모를 리 없을 감독이 특별한 전복없이 (현실이 그러하듯) 예정된 수순을 그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관객들의 기대를 다른 의미로 전복시키는 방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유대감이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관계는 그 관계가 필요로 하는 특정 조건만 맞추면 형태적으로는 모양을 갖추게 된다. 특정한 이름으로 그 관계를 부를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그 관계가 진정한 의미를 갖고 구성원들을 지켜낼 수 있기 위해서는 관계의 깊은 곳에 유대감이라는 단어가 내밀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나누는 과정을 통해 말이다.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제이미댁 야자수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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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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