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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갑작스레 날씨가 쌀쌀해졌다. 더위에 익숙해 있던 몸이 날씨 변화에 한껏 움츠러들었다. 하늘은 새벽부터 잔뜩 찌푸려 있더니 결국 장대 같은 비를 뿌려댔다.

우산을 받치고 출근길에 나섰다. 가슴이 하늘처럼 무겁다. 나도 마음껏 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슴만 짓눌린 기분으로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을 환승하고 또 버스를 바꿔 타고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고, 마음속 검은 구름도 그대로였다.

이른 새벽부터 마음이 무거웠던 건, 남편과 다퉜기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라는데 우리는 아침부터 신경전을 벌이다 출근했다. 남편은 인사조차 없이나갔고 나도 속만 끓이며 출근길에 나섰다. 갈등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지면 답답하지만 이겨도 지는 싸움
 
우리의 대화는 늘 많은 방해를 받고, 시간은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의 대화는 늘 많은 방해를 받고, 시간은 충분하지 못하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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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건조기에서 꺼내 바닥에 놓아둔 채 다른 일 하느라 미처 개는 것을 깜빡했다.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천진하고 태연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남편을 보며 부아가 치밀었다. 부탁도 하루 이틀이지, 스스로 알아서 해줬으면 싶은 일들은 셀 수 없다.

남편이 집안일을 나몰라라 하는 편은 아니다. 나의 부족함이나 빈자리를 잘 메우고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재능도 있다. 체력적으로 버거운 아홉 살 아들과도 잘 놀아준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슷한 연령대 남편 중 평균 이상일 것 같다.

그러나 그도 다른 비슷한 또래의 우리 세대 남편들처럼 살림(한 가족이 살아가는데 요구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관여도의 수준 자체는 낮은 편이다. 한 지인의 표현처럼 기획 노동(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노동)에 '젬병'이라고나 할까.

나 역시 처음부터 살림을 할 줄 알았던 게 아니다. 잘하지도 못하건만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레 많은 일들을 떠안게 되었다. 엄마와 주부, 직장인의 세계를 정신없이 오가다 보면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만 바쁘고, 괜찮은 걸까 자꾸 반문하게 되는 게 일상이다.

종종 비슷한 처지의 가까운 지인들에게 막막함과 스트레스를 토로하며 위로받기도 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이런 내 심정을 조금 더 알아주고 실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기 때문에 그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늘 한구석에 품고 있다.

그러나 바람과 현실은 다르다. 각자 바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저녁을 챙겨 먹고 아이를 챙기다 보면 지쳐서 잠들기 일쑤. 더군다나 '무뚝뚝함'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가는 본전도 찾기 어렵다. 좀처럼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서운하고 상처받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내 딴에는 어렵게 꺼낸 말들이지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남편의 마음에는 안타깝게도 가닿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라도 머리를 비우고 쉬고 싶은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상황의 기승전결을 설명하기에 우리의 대화는 늘 많은 방해를 받고, 시간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루 내내 겪었던 마음 같지 않은 일들, 남편과 나 사이에 쌓아두었던 해묵은 감정을 대화로 풀어내고 싶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무심한 태도나 작은 행동 하나가 불씨가 되어 결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처럼.

온몸과 마음이 무겁다. 지면 답답하지만 이겨도 지는 싸움, 무엇보다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기분이 드는 그런 갈등이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버틸 것이 막막했지만, 속상함을 잠시 내려두고 출근과 동시에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을 쳐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남편. 받아보니 외근을 나왔다가 우리 회사 근처로 왔다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채비하고 나가보니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요일이 '가정의 날'인 이유
 
수요일의 점심, 추어탕
▲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어느 수요일의 추어탕 한 그릇 수요일의 점심, 추어탕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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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자 말 한 마디 없이 어색한 기운만 가득 흐른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무작정 달리다 보니 직원들과 가끔 가고는 했던 추어탕 집 간판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제격이었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산을 펼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빗물을 대충 털어내고 추어탕 두 그릇을 시킨 후 먼저 날라져 온 물을 홀짝이고 있자, 상 위에 반찬들이 놓였다. 갈색의 윤기 도는 코다리조림, 고소한 멸치볶음, 아삭한 열무김치와 갓 부쳐 내온 노랗게 달걀옷 입은 두부 부침까지. 마주 앉은 어색함에도 배는 고파온다.

이내 까만 뚝배기에 담긴 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추어탕이 당도했다. 진하게 끓여 산초가루와 방아잎 같은 강한 향신료를 취향껏 추가해서 먹는 경상도식 추어탕이다.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다진 마늘과 땡초(청양고추의 경상도 사투리)를 국그릇에 가득 넣은 후 양념 그릇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다진 마늘과 고추는 조금만, 들깻가루는 듬뿍 넣었다. 남편은 김과 코다리조림을, 나는 꼬시래기 무침과 열무김치를 밥과 함께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국물을 좋아하는 남편이 그릇을 싹 비워가는 동안, 나는 국물 보다 건더기 위주로 먹었다 . 입맛부터 많은 부분에서 다른 우리가 종종 다투면서도 10년째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나를 위해 남편이 지나가는 직원에게 꼬시래기 무침 리필을 요청한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지만, 내 서운함과 속상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단지 세련되게 위로하는 법을 모를 뿐,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의 행동으로 깨닫는다.

가슴 가득 차올랐던 답답함, 속상함이 어느새 뜨끈한 국 한 그릇에 서서히 사라지고 찬 바람 불던 마음은 데워졌다. 한결 누그러진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특별한 말 한마디 없는 조용한 식사. 마주 앉아 밥 한 끼 먹은 게 다였지만 일부러 짬을 내어 회사 앞까지 온 남편이 전하려 했던 묵묵한 사과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일과 가사, 육아에 치여 대화가 부족했던 우리 부부가 모처럼 둘만의 점심시간을 가졌던 오늘은 가정의 날과 문화의 날을 시행하는 수요일이었다.

결혼 10년 차,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오래된 노래 같은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수시로 갈등하지만 함께 하는 세월 속에서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의 나이테도 차곡차곡 새겨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한 끼의 점심이었다. 한 주의 중간이면서 몸과 마음의 피로가 가장 큰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한 건 잠시 여유를 가지고 중요한 것을 챙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이런 날이 반복될 때면, 일과 가사, 육아에 치여 대화가 부족했던 우리 부부의 오늘 점심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해 볼까 한다.

"오늘 우리 점심 한 끼 같이 할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우리들의점심시간, #수요일의점심, #가정의날, #부부싸움후나눈점심한그릇, #말없는대화로서로의속마음을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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