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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근 10년래 읽은 소설 가운데 최고의 소설이었다. 정 작가는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장례를 소재로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며,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며 다층적인 존재인지, 인간 사이의 관계는 또 얼마나 보이지 않는 인연과 은원(恩怨)의 끈으로 촘촘히 이어져있는지를 놀라운 솜씨로 풀어낸다.

아버지는 실패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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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부모를 둔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주인공 '나'(소설에 등장하는 고아리는 필경 정지아 작가 자신일 것이다)는 연좌의 그물에 걸린 자신의 불우를 또렷히 자각하며 사는 사람으로, 4년간 빨치산 생활을 하고 위장자수 후 수십년간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던 아버지 고상욱(그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유물론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씨를 답답해하며 산다.

치매기를 보이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다 전봇대를 박고 죽는데, 나의 모친이자 아버지의 부인(전직 남부군 출신으로 남편과는 같은 빨치산이었다)은 식물인간으로 밖엔 살 수 없는 남편의 수술을 유물론자답게(?) 단박에 거절한다.

아버지는 이내 타계하고 아버지와 온갖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 구례에 위치한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온다. 혁명동지, 우익이었지만 가장 가까웠던 절친, 은사의 아들, 빨치산 시절 아버지가 살려준 순경,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했던 나의 동문 심지어 아버지의 담배친구이던 노랑머리 소녀까지.

나는 아버지와 이들 사이의 관계와 아버지의 사람됨을 통해 실패한 사회주의자처럼 보이던 아버지가 사실은 존경받기에 충분하며 빛나는 삶을 살다 갔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화해의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연좌제 때문에 육사에 못간 사촌오빠가(그 사촌오빠는 암 말기다) 숙부에게 조문와 화해하는 걸 보고, 여순사건 당시 경솔하게 행동해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진압군의 손에 잃게 만든 후 빨갱이 형(내 아버지)을 평생 원망하던 막내 작은아버지가 끝내 화해하는 것도 본다.

나 역시 혁명가이자 빨치산이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자 연인이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던, 친구이자 이웃이던 아버지의 여러 얼굴을 비로소 만나고 직시하고 이해한다.

또한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의 편린(片鱗)들과 함께 기억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지리산 자락을 누비던 아버지의 삶처럼,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구례 곳곳에 뿌린다.

문학의 위엄과 쓸모를 보여주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에 등장하는 고상욱씨는 신산(辛酸)과 핍진(乏盡)으로 빼곡한 삶을 살았으며, 그가 목숨을 걸고 이루려고 했던 사회주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조국통일은 기약이 없다. 이렇게 보면 고상욱씨의 인생은 실패라고 평가해도, 대체로 불행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성싶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고상욱씨는 자신이 믿은 이념을 죽을 때까지 배교하지 않았고, 가정을 이뤄 아내와 해로(偕老)했을 뿐 아니라 자기 발로 서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딸까지 낳았으며, 우연이라고 불러야 할 수 많은 인연들이 불원천리를 마다치 않고 장례에 참여할 정도로 성공한 인간 관계를 맺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상욱씨의 인생은 성공이며, 대체로 행복했다고 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세상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누린 자건, 세상 제일의 부를 일군 자건, 성현의 말씀을 줄줄이 외는 자건 죽음 앞에선 모두가 공평하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걸 형해화시키는 죽음 앞에서 나약한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곡진한 애도 속에 세상과 작별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는 것 뿐이다. 고상욱씨가 그랬듯이.    

문학의 위기가 운위된 지 너무나 오랜 지금, 문학의 쇠퇴가 완연한 요즈음, 문학의 위의(威儀)와 광휘(光輝)의 증거를 보고 싶다면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면 된다. 이 소설만큼 한없이 슬프면서, 더 없이 웃기고, 서늘하면서도, 따뜻하며, 인간의 비루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작품은 드물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은이), 창비(2022)


태그:#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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