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2022년 6월 2일, 영국 런던의 버킹엄 궁전 앞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70주년 기념행사 '플래티넘 주빌리'가 열렸다. 동시에 영국 전역과 영연방 국가들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를 축하하는 기념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고, 전 세계 국가원수들의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4일간의 플래티엄 주빌리 마지막날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여왕은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고 군중들은 여왕의 건재함을 기뻐하며 뜨거운 환호와 함께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을 열창했다. 오랜 세월 영국을 위하여 봉사한 군주에 대한 경의와 찬사의 메시지였다. 여왕을 향한 영국인들의 무한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도 무려 70년간, 여왕은 어떻게 영국 전통의 상징이자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굳건히 남을 수 있었을까. 8월 21일 방송된 KBS1 <역사저널 그날> 374회에서는 '영국여왕 즉위 70주년 기획 1편-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되다' 이야기가 그려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여왕으로, 26세이던 1952년 2월 6일 등극 이후, 어느덧 96세가 된 2022년 현재 재위 70주년을 맞이했다.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이자 현재 전 세계에 생존한 국가지도자들을 통틀어 최고령이고 가장 오랫동안 재위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와 비교하면 6·25 전쟁 이후 이승만에서 현 윤석열 대통령까지 총 13명의 대통령이 거쳐가는 동안 영국의 지도자는 오직 엘리자베스 2세 한 명으로 요약된다.
 
영국의 군주는 명목상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이며 영국 국교회의 수장을 겸한다.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영연방 56개국 중 14개 국가는 여전히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영국 공군-해군은 로열 네이비-로열 포스로 칭하는데 로열(Royal)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왕의 군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국왕은 타국에 대한 전쟁선포권과 국교회의 성직자 임명권, 의회 소집과 해산권, 법 제정을 최종적으로 허가할 수 있는 동의 권한도 가지고 있다.
 
정치적 권한 외에 여왕만이 누리는 개인적인 특권들도 존재한다. 여왕은 운전면허없이도 차를 운전할 수 있으며, 여권없이 비행기에 타는 것도 가능하다. 바로 면허증과 여권을 발행하는 주체가 여왕 본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왕은 무면허운전-살인죄 등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받는 면책특권도 있다. 심지어 범죄자라 할지라도 여왕 앞에서나, 여왕이 살고있는 궁전 안에서는 체포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죄 지으면 여왕 앞으로 뛰어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다소 황당한 특권들도 있다. 영국 템즈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백조, 영국령 바다에 서식하는 철갑상어, 돌고래, 고래 등은 모두 공식적으로 여왕의 소유다. 만일 타인이 이를 잡거나 훼손할 경우 동물보호법이 아닌 절도죄가 적용된다고.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이러한 막대한 권한과 특혜에 문제는 없을까. 영국은 글로 된 성문헌법이 존재하지 않고 예전부터 관습적으로 지켜오던 모든 법들을 '헌정질서'라는 개념으로 존중하며 사실상 성문 헌법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영국의 군주들 역시 이러한 헌정질서라는 틀 안에서 권리를 제한하고 있으며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다.
 
26세 젊은 나이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1688년 전제정치를 꿈꾸던 제임스 2세를 영국 의회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몰아낸 '명예혁명'은, 영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태동을 이끈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명예혁명을 거치며 의회는 국왕의 정치권력을 제한하고 징세권을 회수했다. 국가수반은 왕이지만, 행정수반은 총리에게 위임하는 구조가 정착되면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세습 군주제의 한계는 성군의 자녀라고 해서 성군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유능한 재상들이 실질적인 통치를 맡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는, 한국사에서 정도전이 이성계와 합심하여 조선을 건국하며 추구했던 재상정치와 그 성격이 일치한다.

한편으로 유명무실한 군주제를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공화주의자(국가의 정책이 복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정치 형태를 지지하는 사람들)들이 영국과 영연방 내에도 적지않다. 실제로 영연방 국가인 호주에서는 1999년 공화제 도입 관련 국민투표가 이루어졌으나 찬성 45%, 반대 54%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를 향한 우호적인 여론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다.
 
1952년 투병중이던 부왕 조지 6세를 대신하여 해외순방길에 올랐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케냐에서 부친의 비보를 전해듣는다. 1953년 2월, 여왕에 등극한 엘리자베스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엘리자베스 2세는 원래 서열상 왕위와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였던 에드워드 8세는 두 번 이혼한 미국인 여성 윌리스 심프슨(훗날 윈저 공작부인)과 사랑에 빠지며 왕위를 포기했다. 당시 영국 국교회 교리상 이혼남녀의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동생인 조지 6세가 1937년 갑자기 왕위를 이어받게 됐다.
 
조지 6세의 장녀였던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다음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올랐다. 당시 동생인 마거릿 공주의 반응은 "그럼 언니가 다음 여왕이 되는 거야? 불쌍해..."였다고. 세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4세>에는 "왕관을 쓰면 편히 쉴 수 없다"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그만큼 왕실 내에서도 왕위가 영광이나 권력보다는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조지 6세는 갑작스럽게 원치도 않았던 왕위에 올라야 했던 데다가, 즉위기간중에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다.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가 조지 6세의 건강을 악화시키며 명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부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왕위에 오를 만한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해야 했다.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하지만 군주로서의 자질은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공주시절이던 1947년, 21세 생일(4월 21일)을 맞이하여 대국민 연설에서 "평생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속한 위대한 제국에 이바지할 것"을 선언한다. 지금까지도 영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연설로 꼽힌다. 연설 5년 뒤 엘리자베스는 여왕에 즉위했고, 당시 대관식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되며 이를 보기 위하여 TV 구매가 급증했을 만큼 영국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군주는 왕실의 권위를 위하여 국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 신비감을 조성하는 이미지 전략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대관식 TV 생중계에 반대했지만, 당시 신세대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모든 국민들이 자신들의 군주가 즉위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고, 이는 훗날 여왕의 행보를 예견하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1950년대 들어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사회 분위기 속에 영국 왕실도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하여 왕실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을 대표하는 스파이 캐릭터인 '제임스 본드' 역의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서 경기장에 도착하는 연출은,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친근한 이미지를 이끌어낼 줄 아는 여왕의 면모를 보여준 장면이다.
 
1992년 영국 왕실의 거주지였던 윈저성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영국 정부가 막대한 재건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려고 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고민끝에 이제부터 '왕실도 세금을 내겠다'고 깜짝 선언했다. 또한 왕실 관저인 버킹엄 궁전을 일정 기간 개방하며 입장료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영국 왕실을 일종의 문화산업으로 활용한 엘리자베스 2세의 센스가 돋보인 대목이다.
 
영국의 왕실유지비용으로 연간 약 8600만 파운드(1400억 원) 이상이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져 군주제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왕실은 '돈먹는 하마'라며 혈세 낭비를 단골메뉴로 거론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실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많다고. 왕실 보유 자산에서 파생된 수입에 더하여 관광과 미디어산업, 각종 로열패밀리 브랜드 수입 등으로 왕실은 매년 3조 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며 영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극성스러운 영국 언론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는 '사실상 비판할 수 없는 성역'으로 대우받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공주시절이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세의 나이에 여군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현직 남녀 국가원수를 통틀어 2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인물은 엘리자베스 2세가 유일하다.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성향은 부친 조지 6세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다. 조지 6세는 1940~1941년 사이 독일 공군의 영국 대공습으로 정부가 왕실에 피난을 권유했을 때도 '왕은 국민과 함께 있어야 한다'며 거절하고 끝까지 런던에 남았다.
 
이러한 모범을 보였기에 지금도 영국인의 60%가량이 군주제에 찬성하고 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긍정평가는 무려 80%에 육박할 만큼 여왕의 개인의 인기가 군주제에 대한 지지여론을 훨씬 상회할 정도다.
 
영국 왕실의 운명은?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물론 엘리자베스 2세의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즉위 초에는 아직 어리다보니 당시 수상이던 처칠과 국정과 시사에 관한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왕은 전시수상이자 원로 정치인인 처칠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내며 낮은 자세로 다가간 덕분에 두 사람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다.
 
하지만 같은 여성 지도자였던 '철의 여인' 마가릿 대처와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타고난 로열패밀리였던 엘리자베스와 비교하여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던 대처는 성향과 성격이 모두 판이하게 달랐다. 여왕은 총리와의 비공개 주례 회동에서 대처가 항상 15분 전에 일찍 도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시회담을 고수하며 대처를 기다리게 했다. 또한 대처는 여왕과의 면담 전에는 항상 드레스 코드를 확인하며 의상이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경썼다고.
 
주례회동은 국왕과 총리간 독대를 통하여 어떤 주제의 대화도 가능하고 그 내용은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된다. 어려운 국정 현안에 대하여 총리가 국왕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여왕은 총리들의 정치적으로 떠받치고 후원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엘리자베스가 재위 기간 동안 순방한 국가는 130여 개국에 이르며 여기에는 대한민국도 포함되어 있다. 여왕은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 한국에 방문하여 경북 안동에서는 73번째 생일잔치를 한국식으로 치르기도 했다. 실내에 들어가면서 한국식 법도에 따라 여왕이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타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민적 인기의 근간에는 여왕의 모범적인 결혼생활도 한몫을 담당했다. 지난 2021년 4월, 여왕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 경이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왕의 첫사랑이었던 필립공은 1947년 당시 공주였던 아내와 혼인을 올린 이래 무려 74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사실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생활은 사실 필립 공에게는 많은 희생과 아픔을 감수해야했던 시간이었다. 명문가의 후손이자 해군 출신의 전쟁영웅이었던 필립 공은 아내가 왕위가 오르며 하루아침에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된 현실에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립 공은 오랜 세월 충직한 신하와 다정한 남편을 오가며 평생 묵묵히 엘리자베스 2세의 곁을 지켰다. 여왕은 "영국은 필립 공에게 큰 빚을 졌다"는 논평을 내며 남편이자 평생을 함께한 동지에 대한 최상의 예우를 전했다. 남편을 잃은 뒤 장례 예배에 홀로 조용히 앉아있던 여왕의 쓸쓸한 모습은 많은 영국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여왕은 단색의 화려한 의상과 한손에 꼭 가방을 드는 패션으로도 유명하다. 가방을 왼손에 들었을 때는 오른손으로 악수, 손인사 등 여러 가지 할 일을 하기에 준비된 상태임을 뜻한다면, 가방이 오른손으로 옮겨들었다면 '용무를 마치고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심지어 가방을 내려놓았다면 '이 자리가 불편해서 빨리 떠나고싶다'는 시그널로 해석된다고.

영연방을 유지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위상과 직결되는 여왕의 가장 큰 정치적 과제다. 한때 강대국이었던 대영제국은 2차대전 이후 이어진 식민지 독립으로 패권국가로서의 지위는 상실했지만, 열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과거 식민지를 영연방이라는 개념으로 묶어놨다. 영연방은 영국의 경제력-외교력 유지를 위한 원동력이라고 할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도 70년에 걸친 적극적인 해외순방을 통한 왕실 외교를 통하여 영연방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공헌했다는 점이다.
 
여왕은 2011년에는 독립전쟁으로 영국과 극심한 갈등을 벌였던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희생 당한 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아일랜드 국민들의 77%가 엘리자베스 2세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래도 구시대의 인물이고 대영제국 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을 여왕이 심적으로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임에도, 과감하게 위로와 포용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이런 열린 자세야말로 그녀가 70년간이나 재위를 지키면서 많은 이들의 존중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일 것이다.
 
여왕은 최근 차기 영연방의 수장으로 찰스 왕세자를 공식 추천했지만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엘리자베스 2세 이후로 영연방은 물론 영국 왕실의 존속도 불투명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 나라의 리더는 국가의 품격을 좌우한다. 근현대사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던 영국이 지금까지도 군주제를 유지하며 왕실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데는 엘리자베스 2세의 개인적 자질과 매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단지 로열패밀리로서 특권과 명예만을 누린 것이 아니라, 그 왕관에 걸맞는 지도자의 덕목과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는 점에서 '21세기에 어울리는 군주상'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저널그날 엘리자베스2세 입헌군주제 최장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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