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36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암울한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날이다. 대한민국은 이날을 광복절(光復節), '빛을 되찾은 날'로 규정하며 5대 국경일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경성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장면은 지금도 광복절마다 회자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에는 작은 비밀 하나가 숨어있다. 바로 사진이 찍힌 날짜가 광복절 당일인 15일이 아니라 16일이었다는 것. 당시 사람들은 왜 독립이 이루어진 하루 뒤에야 늦은 만세를 외쳤을까.
 
8월 10일 방송된 tvN STORY 역사교양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8월 15일, 조선인들은 왜 환호하지 않았나'라는 주제로 최태성 강사의 강의가 펼쳐졌다.
 
8월 16일에 찍힌 사진, 그 이유는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1945년 8월 15일 오전 12시, 경성에서는 한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인 왕자 이우(1912-1945)였다. 그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에서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8월 6일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이튿날인 7일 새벽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4세, 광복으로부터는 불과 8일 전이었다.
 
그런데 돌연 당일날 이우의 장례식이 연기되고 곳곳에서는 15일 라디오에서 중대방송을 하겠다는 예보가 나온다. 바로 히로히토 일왕의 육성으로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선언이었다.
 
일본의 항복은 곧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경성의 한 학교에서 임시강사로 일하던 한 일본인의 증언은 이날의 기억에 대하여 "15일 저녁 황금정 6정목 인근을 전차로 지나갔지만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경성 주재 소련 영사의 부인인 파냐 샤브쉬나도 "8월 15일의 경성은 마치 쥐죽은 듯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꿈에 그리던 독립을 기뻐하는 듯한 반응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육성을 들어보면 '세계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어 원문은 물론 번역을 해도 선뜻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다. 사실상 항복을 뜻하지만 '전쟁 패배'나 '무조건 항복'같은 직접적인 표현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일본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어려운 어휘들은 일본인들조차 따로 해설방송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라디오 음질도 좋지않았다.
 
1945년 방송 당시 조선인들은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설사 내용을 이해한 소수가 있다고 해도 아직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건재해 있는 상황이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함석헌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는 말로 표현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해방이었지만, 정작 그 순간이 찾아오자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짠한 여운을 자아낸다.
 
한편 비상이 걸린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대응책을 문의했지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선택한 길은 황당하게도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일제를 향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통제해줄 수 있을 만한 정신적 지주같은 인물들이 바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8월 15일 오전 8시 당시 조선인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던 몽양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2인자였던 정무총감 엔도와 만나 협상에 나섰다. 여기서 여운형은 "일본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총독부 측의 제안을 수락한다.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극도의 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최소한 유혈사태만은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대신 여운형은 일제 치하에서 억울하게 투옥된 정치범과 경제범들의 즉각 석방, 총독부에서 통제하던 식량과 생필품을 풀어 3개월간의 식량을 보장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모든 정치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요구했다. 그리고 엔도는 이 조건을 모두 수락한다.
 
회담을 마친 저녁 6시, 여운형을 중심으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한다. 이튿날인 8월 16일 오전 11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 앞에 운집한다. 총독부가 수감자들을 모두 석방하기로 합의하면서 그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가족과 지인들을 맞이하러 모인 인파였다.
 
석방된 사람들은 대부분 고된 옥살이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고문에 시달려 불구가 된 아들을 보고 통곡하는 어머니도 있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희생됐고, 죄없이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도 다수였다. 그들의 석방을 간절히 기다려온 가족과 지인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파냐 샤브쉬냐는 이날의 광경에 대하여 "부축을 받고 나오는 등이 굽은 사람에게 여인과 세 명의 아이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바로 옆에서는 불구가 된 노인에게서 아들의 젊을 때 모습을 알아본 어머니가 울다 웃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훗날 조선총독부가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하여 철거되었지만,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의 비극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아직도 역사에 남아있다.
 
형무소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웃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사람들은,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다른 시민들도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광복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깨닫고 하나둘씩 인파에 동참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나와 목놓아 만세를 외쳤다. 만세행진은 어느새 서울 전역으로 한반도 방방곡곡으로 끝없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실제 광복으로부터 하루가 지난 8월 16일에야 조선인들은 광복을 실감하고 마음껏 기쁨을 누릴수가 있었다.
 
해방이 찾아오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여운형은 해방 다음날 휘문고보에서 해방선포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탄생했음을 라선언한다. 해방전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검열과 통제를 받던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제 조선인의, 조선선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조선의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광복 직후, 어쩌면 예상가능했던 혼란도 찾아왔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앞장섰던 가장 경찰서와 관청, 그리고 일제에 협력하여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앞잡이 노릇을 했던 부역자들이 복수심에 불탄 군중들의 타깃이 됐다. 한 마을에서는 조선인 순사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제의 잔당들은 총독부와 각 관청에서 그동안 조선에서의 만행이 담긴 기밀문서를 부랴부랴 소각하고 증거를 없애느라 분주했다. 조선에 아직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은행에 넣어둔 예금을 대거 인출하느라 뱅크런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단기간에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꼼수를 사용한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1년치 예산이 23억 5800만 엔이었는데 한 달에만 무려 36억 8000만 엔이 발행된다. 자연히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1945년 당시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무려 3146%, 무려 30배가 넘게 폭등하며 살인적인 물가를 기록했다. 패망하여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한반도에 그들이 남긴 민폐는 끝나지 않았다.
 
한편 광복의 기쁨에 한창 취해있었던 조선인들에게 충격적인 기사가 나온다. 아직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군이 언론을 통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라', '시위운동 일체불허', '치안방해는 단호조치' 등을 선언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을 일삼은 것. 총독부와 여운형이 협상에 합의한 지 불과 3일 만이었다. 총독부와 함께 조선 지배의 양대축이었던 일본군은, 총독부가 여운형 측과 비밀합의를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조선 주둔 일본군은 총독부의 합의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일본의 항복대상은 연합국이지, 조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본국으로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무장을 유지하고 여전히 조선인들을 억압과 통제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8월 17일 오전 10시,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경성방송국을 비롯한 언론기관을 장악한다. 그들은 조선인들의 광복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꺾고 일본군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 종로 일대에는 일본군의 기관총 포대까지 설치됐다.

당시 일본은 패전국으로 군에게도 전투중지 명령이 내려였기에 무력 행사는 정전협정에 위배된다. 이에 일본군은 일반 경찰처럼 치안업무권을 보유한 헌병들을 내세워 유사시 불상사가 발생해도 경찰업무 수행으로 변명하려는 꼼수를 썼다. 광복 직전까지 약 2600명 있던 일본의 헌병은 광복이후 한 달 사이에서 갑자기 1만 6000명까지 대폭 증가한다.

끝까지 자신들의 이익 챙긴 일본

또한 8월 22일에는 강제노역에 동원한 조선인들을 태우고 국내로 돌아오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귀국의 희망에 부풀어있던 조선인들은 광복을 맞이하고도 끝내 고향에 돌아오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측은 침몰 원인을 미국이 설치해놓은 기뢰 탓이라고 주장했지만, 전문가들은 일본 해군이 고의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파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배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일본내에서 강제노역에 동원한 조선인들이었고 국가기밀과 자신들의 치부가 유출을 우려한 일본측에서 이들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증거를 없애려고 했다는 의혹이다.
 
훗날 일본은 무려 9년 만에야 침몰된 우키시마호 선체를 인양한다.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당시 벌어진 6·25전쟁 때문에 피폐해진 한국에 고철을 뜯어서 팔고자하는 계획 때문이었다. 억울한 희생자들을 또다시 기만한 일본의 만행이었다.
 
광복 4일 전인 8월 11일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비밀제안에 합의한다. 당시 세계는 2차대전이 마무리에 접어들며 자유진영과 공산신영간의 냉전구도로 접어들던 시점이었고, 미국은 이미 한반도 북부을 장악한 소련에 맞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38선 분할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레드 콤플렉스를 이용하여 조선 측에 공산주의자가 많다는 거짓정보를 흘린다. 이에 미국은 일본측에 미군이 그 책임을 인계할 때까지 조선 식민 통치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패전국임에도 일본이 당분간 조선을 억압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을 통하여 한반도에 입성한 날 또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햔다. 미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인천항에 모인 조선인들을 향하여, 일본군경이 자신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총을 발사한 것. 무고한 조선인 2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미군은 조선인의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았다며 오히려 일본군을 두둔했다. 미군의 등장으로 일본이 쫓겨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조선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는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한반도의 지배권이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이 땅의 진정한 주인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국기교대식에서 일장기가 내려오자마자 게양되며 그 빈 자리를 채운 국기는, 태극기가 아닌 바로 미국의 성조기였다. 이른바 미군정 시대의 시작이었다. 일제시대는 끝났지만 진정한 독립과 광복은 아직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1945년말까지 대부분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 패전국이 점령국에서 이 정도로 큰 피해없이 무사귀환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은 일본은 끝까지 무고한 조선인들을 희생시키며 자신들의 이익을 노렸던 것이다.
 
광복의 날은 분명히 우리 역사에서 빛나고 감격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그 빛에 가려져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광복 직후의 어두운 순간들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주 독립은 이후로도 많은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했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사의 밝은 면이 아니라 아픈 순간들도 직시하는 과정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광복절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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