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05 19:31최종 업데이트 22.07.05 19:31
  • 본문듣기

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외교부 건물에서 열린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 민관협의회에서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이 발언하고 있다. ⓒ 외교부


전범 기업들의 배상 판결 불응으로 인해 이들의 국내 재산을 현금화하는 강제집행 절차가 임박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4일 오후 윤석열 정부가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이 주재하는 강제징용(강제동원) 민관협의회를 출범시켰다.

외교부는 '강제징용 관련 민관협의회 개최' 보도자료에서 "이번 협의회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 관련 해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체 및 법률대리인, 학계 전문가 및 언론·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자 개최"했다고 밝혔다.


3월 9일 대통령 선거 이후 일본 정부와 언론들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의 재산을 강제집행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5월 26일 도쿄 국제회의에서 '일본 기업을 대신해 한국 정부가 대위변제해주는 방안'을 공개 천명한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을 6월 7일 주일대사로 임명했다.

민관협의회 역시 그런 대위변제에 명분을 실어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전범 기업을 제외한 한일 국민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피해자나 유족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제공해주고 문제를 마무리하는 쪽으로 민관협의회가 활동하게 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6월 29일 자 <경향신문> 기사 '민관합동기구 출범한다지만...강제징용 해결은 산너머 산'은 이 기구의 성격을 '악역'으로 규정했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내지 않고 대위변제 등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정부에 건의해야 하는 악역을 맡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민관협의회의 역할을 전망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권리
 

4일 오후 조현동 외교부 1차관 주재로 첫 회의가 열리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 민관협의회에 참석하는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단과 지원단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 입구에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승소 판결까지 받아놓았다. 그런데도 정부가 민관협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배상금 대신 민간 성금 등을 받도록 유도한다면, 이는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한을 풀 기회를 정부가 봉쇄하는 격이 된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거나 배상을 받아야 조금이라도 한이 풀린다. 제3자가 대신 해주는 방법은 한계가 있다. 민관협의회가 출범한 4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이 만나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라는 점을 공개 표명했다.

가해자가 직접 사과하고 배상하기 힘든 부득이한 사유가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그만한 인력과 자금력도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쓰비시는 일본 최고재판소가 2007년에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는데도 2016년 6월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 3765명에게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하고 보상금을 지급했다. 배상금 명목은 아니지만 자사의 인권침해를 사과하고 금전을 지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쓰비시는 미국인 피해자들에게도 사과했다. 2015년 7월 미군 포로 출신 징용 피해자인 제임스 머피 등에게 "우리는 전쟁포로를 가장 심하게 착취한 기업 중 하나"라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랬던 미쓰비시가 한국인 피해자에게만 머리를 숙이기 힘든 사정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대위변제 방식은 피해자 측의 한을 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과도 모순된다. 윤석열 정부는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들의 재산권 보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윤 정부가 징용 피해자들의 재산권인 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가해자로부터 받아야 할 배상금 1억 원을 포기하고 한일 국민과 기업들이 주는 성금 1억 원을 받도록 유도하는 등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입각한 재산처분권 행사에 대한 제약이 된다. 동의를 받는 형식을 취하더라도,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민관까지 나서서 대위변제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피해자 측의 자유의사가 제약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관계 복원 서두른 박정희
 

1961년 11월 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피해자들의 재산 처분권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1965년 사례에서도 증명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징용 피해자들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극히 희박했다. 징용 문제에 관한 일언반구도 없이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다.

한일관계가 꼬여 있던 시점인 1961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정변 직후부터 한일관계 복원을 서둘렀다. 그는 일본 측이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는데도 그해 11월 11일 도쿄를 방문해 국교 정상화를 시도했다.

그달 8일 자 <동아일보> 기사 '국빈 대우로 영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 정부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방일하는 박정희를 국빈으로 영접했다. 그가 어떤 선물을 갖고 방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이케다 총리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박정희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고 고집하지 말자'는 도착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식민 지배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환영 만찬장에서는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추어낸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로 도착 성명을 상기시켰다.

그는 보다 직설적인 발언으로도 일본인들을 안심시켰다. 징용 피해자를 비롯한 식민 지배 피해자들이 재산청구권을 행사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발언이었다.

박정희의 특명을 받고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행한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는 "1961년 11월 방미에 앞서 들른 일본에서 박 대통령은 이케다 수상 등 당시의 일본 정치인의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말을 쏟는다"며 박정희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선배님들, 우리 도와주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릴 키워 주시오. 그리고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
 
윤석열 정부가 피해자들의 재산청구권 제약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일본 기업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재산청구권은 한국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그런 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며 일본 지도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일본 지도자들이 이렇게 발언했다고 위 회고록은 말한다.
 
"이제야 얘기가 통한다. 쿠데타의 주역이라 호골인 줄 알았더니 겸손하고 의외로 상식적이다."
"마치 명치유신 때의 의사(義士) 같다. 겉은 예의 바른 모습이지만, 속은 알찬 무서운 지도자다."
 
박정희는 이동원 장관과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이동원의 조언을 받은 그는 "난 무조건 이 장관 믿고 맡기니 소신껏 하시오"라고 한 뒤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박정희는 "사실 난 일본서 돈 빼앗아 오는 덴 관심 없소"라며 "그것보다 우리 경제 일으키는 데 얼마나 일본을 끌어들여 활용하느냐에 더 관심 있소"라고 말했다. 그런 뒤 "그러니 한일회담도 일본 끌어들이는 여건 쪽에 초점 맞추시오"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일본 돈 빼앗아오는 것'(A)보다 '일본의 경제협력을 끌어들이는 것'(B)에 초점을 맞추라고 지시했다. B안에도 일본 돈 끌어오는 것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도 A를 언급했다. 이는 A에 언급된 돈이 징용 봉급이나 배상금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데는 관심 없으니 경제협력자금 받아내는 데만 주력하라는 것이 박정희의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이동원은 식민지배 배상금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매듭지었다.

박 정권은 국민들의 재산권을 무시했다. 이것이 전국적인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국민 재산권을 무시하는 박 정권의 태도는 환영을 받을 수 없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일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다.

이제까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 1965년 이후로는 한국 정부마저 일본 정부와 함께 가해자 편에 섰다. 한국 정부가 한국인 피해자를 편든다 해도 이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가해자 편에 섰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더 해결되기 어려웠다. 윤석열 정부가 민관협의회 명목으로 피해자들의 재산청구권을 제약한다면, 이는 가해자 편에 섰던 박정희 정권을 답습하는 일이 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