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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빠르게 더워지고 있습니다. 초여름인데도 한낮에는 더워서 반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보입니다. 예전 지구의 온도는 4천 년 만에 1도가 상승했다는데 최근 100년간은 0.6도가 상승했고 우리나라 평균 기온은 1.8도가 올랐다고 합니다.

수치가 아니어도 기온의 상승이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봄, 가을 얇은 바바리 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짜는 자꾸만 줄고 옷장에 패딩은 아직 세탁소에 맡기지도 못한 채로 걸려있는데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으니까요. 

내리쬐는 한낮의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작년에 있었던 화재 사고가 떠오릅니다. 열세 살이었던 딸아이가 "엄마, 우리는 화재에서 살아 나왔다니까"라며 제게 으름장을 놓았었지요. 아이의 그 말이 놀랐던 제 마음을 안도하게 했지만 그걸 빌미로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 말하는 아이의 이마를 콕 쥐어박고 싶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화재라는 말이 들어간 일이 생긴 것은 40년 넘는 인생을 통틀어 제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13년 인생의 아이에게 생겼으니, 삶을 기록하는 길이 있다면 엄청난 크기의 이정표가 '콱' 하고 박힌 것이 틀림없습니다.  

1년 전 그날의 화재
 
실외기실 전선 누전으로 인한 화재
▲ 실외기실 화재 실외기실 전선 누전으로 인한 화재
ⓒ 윤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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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폭염이 며칠간 지속되며 연일 기온이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뉴스에서는 무더위 쉼터와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보도가 줄지어 나오는지라 집에서 에어컨만 주구장창 틀어내던 날 중의 하루였습니다. 

큰아이가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는 핑계로 '파파'를 하겠다며, 일이 있어 저희 집 근처에 온 친구 가족을 따라 가버렸습니다. '파파'는 '파자마 파티'를  뜻하는 아이들의 은어입니다. 친한 지인이라 집에서 하루 재우고 영화관에 데리고 가겠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요.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 아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를 했더니 받질 않습니다. 아이의 친구에게, 그 엄마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길래 아침 일찍 영화관에 갔나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걸려온 전화는 극도로 긴장한 목소리였고 집에 화재가 났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곳에 대피해 있고 안전하니 걱정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바로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불이라니, 화재라니, 세상에! 우선은 짧은 통화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끊어야 했습니다. 전화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전히 받지 않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습니다. 조금 전 통화에서 아이는 괜찮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갑자기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뻗쳐갑니다.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제 입으로 괜찮다고 다치진 않았다고 말하니 그제야 맘이 놓였습니다. 아이는 단지 놀라서 우는 것이었고, 연기를 피해 아파트 1층에 내려와 있으니 더는 위험한 상황은 없을 듯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만큼 정리가 되고 있는 것인지 보질 못하니 불안한 마음이 쉽게 사그라들진 않았습니다. 마침 다시 걸려온 전화는 집에 연기가 가득 차 그을음과 탄 냄새가 가득하다는 좀 더 자세한 상황 설명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러 와 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급하게 운전대를 잡고 그 집에 도착하기까지 심장이 얼마나 뛰던지.

불이 난 지점은 에어컨 실외기의 전선이라고 합니다. 폭염에 발생 확률이 높아지는 실외기실 화재는 사실, 실외기 자체보다는 전선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전선의 피복이 벗겨져 있었는지, 과열로 스파크가 튀어 불이 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기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벽 쪽의 전기선에서 치솟은 불길이 실외기실 벽안의 단열재로 보이는 물질을 태워서 실외기실뿐 아니라 집 전체에 그을음과 까만 연기를 내보낸 듯합니다. 집에서 외진 실외기실에서 불이 났으니 집에 사람이 없었다거나, 아이만 혼자 집에 있었다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주말이었고,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집에 있었으니 그나마 빠른 대처가 가능했습니다.

탄 냄새를 먼저 알아챈 건 아이의 친구였고, 소화기를 찾아준 것도, 119에 화재신고를 한 것도 아이의 친구라고 하니 그리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인지라 실외기실에 번진 불이 이글거리며 까만 연기를 집안으로 내뿜어대는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불은 잠깐이었는데 수습은 어렵고 복잡하고 오래 걸립니다. 나중에야 그 사고 처리 과정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요.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라 요약해 보겠습니다.

화재가 난 집은 따로 들어놓은 화재보험이 없어 관리사무소에 아파트 화재보험에 대해 문의하고, 보험 약관을 확인합니다. 다행히도 보험사에서 빠르게 손해사정인을 파견해주었다고 합니다.

맨 먼저 화재 청소 업체가 불 탄 자재들을 수거하고 최대한 그을음 제거 작업을 해야 합니다. 전기선이 녹았으니 전기팀을 불러 안전하게 전기도 손봐야 합니다. 에어컨 AS에 연락하여 실외기 수거를 요청하고 실외기실 벽이 녹아내렸으니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 시멘트 미장을 해야 합니다.

외부 섀시가 시커멓게 변한 것도 갈지 않으면 탄 냄새가 계속 날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실외기실과 붙어있던 안방에는 벽지와 천장에 까만 재가 달라붙어 다시 도배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절차가 각기 다른 업체를 통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업체들은 이미 잡혀있는 스케줄로 당장 공사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씩 일정을 잡고, 하루 이틀은 허송세월을 보내며 다음 팀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 더운 여름 날씨에 에어컨을 켤 수 없는 게 곤욕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이외에 해야 할 일들은 더 있습니다. 그을음이 훑고 지나간 바닥, 책, 이불, 옷, 가방 등은 고스란히 숙제로 쌓였습니다. 또 연기를 마셔 머리가 아플 수 있으니 증상이 있으면 꼭 병원에 가라는 소방관의 당부도, 실외기실 앞을 치우다 발견한 캠핑 가방 안의 부탄가스도, 화재로 놀란 후 억지로 진정시켜 놓은 마음에 툭, 툭 돌을 던지는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에어컨 사용 전, 실외기실 꼭 점검 하세요

그날 놀란 일들과 수습해야 할 일들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부부를 남겨놓고 그 집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안전한 곳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테고, 해야만 하는 일들에 속도를 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잔뜩 겁을 먹었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화재에서 살아 나왔다"며 좋아하는 파스타집 이름을 대며 외식을 요구합니다. 제가 거절하자 '불길에서 살아 나왔다'로 좀 더 극적인 문장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덧붙여, 보기로 했던 영화를 언제 보러 갈 수 있냐며 자신들의 요구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못 이기는 척 영화관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혼자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아서 말입니다.

잘 지나간 일인 것 같아도 아이는 그 이후로 탄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생선을 굽고 나면 꼭 켜놓던 초를 켜지 못하게 한 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어가니 말입니다. 5월이지만 폭염은 금세 찾아올 것 같습니다. 에어컨을 켜기 전에 실외기실 점검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실외기 주변에 쌓여 있는 물건은 꼭 치우시고 먼지나 이물질이 쌓이진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선의 피복이 벗겨진 곳은 없는지, 열기가 나가는 쪽 창문이 제대로 열려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눈길이 잘 가지 않아 손길이 닿기 힘든 곳이니 꼭 한 번은 실외기실 문을 활짝 열어보길 당부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브런치에 발행된 글을 현재 시점에서 일부 수정하고 보강한 내용입니다. 브런치 by 윤진진


태그:#실외기화재, #화재예방,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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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찰방이는 수면에서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아이를 담고, 엄마를 담고, ‘나’ 와 ‘내가 아닌 나’ 를 담습니다. 미숙하지만 읽고, 쓰고, 생각하며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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