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에 가기 싫어요."

사춘기 아이의 말이겠거니 하겠지만, 아니다. 한 중년 여성이 반은 진심을 담아 반은 장난기를 섞어 간호사에게 툭 던진 말이다. 한의원에서 침 맞고 있는데 한 칸 건너 침상에서 들려왔다.
 
여인의 말을 들은 간호사는 펄쩍 뛰며 왜 그러냐고 의아해했다. '뭘 저리 놀라지. 나도 그런 날 많은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기함하는 간호사가 더 의아했다. 나는 집에 가기 싫다는 그 여인의 말에 공연히 가슴이 뻐근해졌고, 그가 얼굴도 안 보이는 한 칸 너머 침상의 타인에게 동조를 구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저도 그런 날 많아요"라고 내뱉고 말았다. 그의 서성임 속에서 그런 날들 속의 나를 보았기 때문일까.
 
가족의 의식주를 전적으로 돌봐야 하는 어느 날 불현듯, '대체 왜 이러고 살고 있는 거지'하는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소중한 가족들에겐 필수적인 돌봄이겠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에 돌봄 노동자는 지친다. 배터리 표시 창에 겨우 남은 막대기 하나처럼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는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런 날들엔 집에 가기 싫다. 그런데 갈 데가 없다. 그럴 때, 비록 몸 하나만 겨우 누일 비좁은 베드가 있는 곳일지라도, 참견받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으로 스며들게 된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나나의 가출>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나나의 가출> ⓒ 넷플릭스

 
출구가 막히려는 집에서 마나나는 극적인 순간에 탈출한다. 바로 자신의 생일 다음 날. 생일이라지만 주인공인 마나나(이아 슈글리아슈빌리)를 축복하는 이도, 중요하게 여기는 이도 없다.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폭력적인 생일날, 그는 푸념한다.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생일도 마음대로 못 보내지."

그런데 푸념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집이 이렇다면, 집이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면,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당사자에겐 간단한 논리지만, 가족에겐 결코 합당한 결단이 아니다. 이만저만해서 떠난다는 긴 설명도 없이(설명하기도 지쳤다), 다만 집을 떠나 혼자 살겠다는 한 마디로 의지를 표명한 채, 묵묵히 짐을 싸고 있는 마나나에게 가족들은 집에 폭탄이라도 터진 듯 일대 난리를 친다. 그의 탈출을 나무라는 식구들의 논조는 한결같다. 남편이 마누라를 때리거나, 도박, 마약, 알코올 중독자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는 범죄자도 아닌데 뭐가 불만이냐는 것이다.

물론 마나나의 남편은 위 조건 중 어떤 하나를 행하지는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혼외자를 낳았다. 아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결혼을 깨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남편에겐 결격 사유가 없다. 이런 끔찍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회(영화 속 배경이 된 조지아는 가부장제가 심한 나라다) 속에 살아가는 가족의 관점에서 남편은 아내의 가출을 겪을 하자가 없다.
 
그러나 사회가 정한 조건과 달리, 아내의 생일을 대하는 남편의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미루어볼 때, 남편은 아내에게 이미 결격이다. 아내의 생일을 제 파티로 만들고, 아내의 생일에 제 친구들을 대거 초대해 제 체면을 세우느라 거들먹거리며, 주인공인 아내를 자신의 영광의 전리품인 양 전시하는 남편이야말로 소박맞을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단 한 해의 해프닝이 아니었을 것이고, 비단 생일에 국한되는 태도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나나의 가출>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나나의 가출> ⓒ 넷플릭스

 
가족들의 비아냥을 뒤로하고 마나나는 홀로 살기 계획을 실행한다. 미리 봐둔 아파트로 이사하고, 지저분한 집을 닦고 고치고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더럽고 휑뎅그렁한 집을 조금씩 손보며 빈 공간이 집이 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애틋하다. 큰 집도 좋은 집도 아니고 편리한 집도 아니지만, 비로소 '자기만의 방'을 획득한 나이 든 여자의 미소가 빛난다.
 
법석대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일하고 간단한 음식을 만들고, 조금 더 시간이 남을 땐 언제 쳤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기타를 꺼내 튕겨본다. 그럴 때 주름진 그의 얼굴에 노을이 번지듯 펴지는 미소에는 충만함이 출렁인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의 공간이라곤 겨우 가족이 잠든 후의 식탁이 전부였을 그에게, 고요를 뚫고 기타 줄을 튕기며 좋아하는 노래를 읊조려 보기란 언감생심이지 않았겠는가.

고작 이것이었냐고, 집을 뛰쳐나간 이유가 고작, 바람 좋은 날 창문을 활짝 열고 그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를 흥얼대며 차를 마시거나, 아무도 간섭 없는 늦은 시간에 작은 등을 켜고 오래도록 책을 보거나, 혼자 마신 와인에 조금 취해 옛 생각에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게 다였냐고. 그렇다. 이게 다다. 누구를 돌볼 걱정 없이, 단 한 시간이라도, 단 하루라도, 혼자만의 취향을 즐기고 싶었던 게 다인 그의 독립은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인가. 비록 남루한 공간이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인 채로, 비로소 그윽한 인간의 향기를 피워내고 있는데 말이다.

마나나를 보며 떠오른 한 여인
 
마나나를 보며 떠오른 또 하나의 여인이 있다. 오래전 방영됐던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한자(김혜자). 그는 평생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했고 남편과 자식을 알뜰살뜰 보살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곶감으로 가득 꿰어져 있던 곶감 줄에 달랑 하나 남은 곶감을 발견한다. 하나 남은 곶감 신세 같은 자신이 위태롭고 가엽게 느껴지자, 그 하나만이라도 지키고 싶다고 결심한다. 이 결정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다 빼 먹히기 전에 도망갈 궁리를 내는 것은 약자의 마지막 수단이다. 마나나처럼 독립을 선언한 한자에게 가족의 저항은 같은 방식으로 싸늘하게 펼쳐진다. 모든 걸 다 바쳐 돌봤건만, 가족은 한자의 삶보다 자신들의 체면과 안락이 더 소중하다. 남부끄럽다는 이유로 반대하지만 한자는 꿋꿋이 독립을 쟁취한다. 그렇게 나간 곳이 마나나의 공간만큼도 되지 않는 돌아서면 방·주방·화장실이 오종종히 묶여있는 겨우 몇 평밖에 되지 않는 원룸이지만, 그곳에서 행복해하는 한자를 보는 것은 다행이면서도 눈물겹다.
 
혼자인 그곳에서 한자가 한 일 또한 고작 이런 것들이다. 혼자 늘어지게 자고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나기, 혼자 간소히 밥 해 먹거나 끼니 건너 띄기, 끼니 때우며 책 보다 라면 부는지도 모르게 몰입하기. TV보다 잠들어도 내일 걱정 안 해도 되기. 어쩌면 누구나 누리는 이 일상들이 어떤 엄마에겐 싸워 얻어야만 얻는 권리가 된다.
 
자신을 다 태워야만 주위를 밝히는 촛불이 되고 싶은 자, 누구이겠는가. 모두 누군가 밝혀줄 촛불이 필요할 뿐, 스스로 촛불이 되고자 하지는 않는다. 으레 촛불의 역할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엄마에게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히라 한다.

이 고단하고 무의미한 태우기를 그만둔 마나나에게, 가족은 그가 다시 돌아오리라, 잠깐의 바람이리라 믿지만, 마나나는 그 기대를 결단코 배반한다.

"난 내 집이 있어. 안 돌아와."

선언을 던지고 표표히 사라지는 마나나의 뒷모습이 우뚝하다. 그는 지금, 자기의 집으로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마나나의 가출> 독립주거 가출 <엄마가 뿔났다> 돌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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