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황금돼지 아래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게임

빛나는 황금돼지 아래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게임 ⓒ 류정화

 
넷플릭스에서 방송한 수많은 한국 드라마 중에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이 이토록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생존게임은 <배틀 로얄> <헝거 게임> 등 인기 시리즈를 통해 이미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주제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쟁의식이 낳은 사회적 낙오자 캐릭터는 한국 고유의 창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보편적인 캐릭터라서 세계적 울림을 줬던 것일까. 갈등과 반전이 반복되는 긴박한 구성으로 이뤄진 <오징어 게임>은 지극히 한국적인 인물과 놀이를 통해 익숙하지만 불편한 이야기를 변형한 게 아닐까?

공정한 게임으로 초대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죄다 사회 부적응자 혹은 낙오자다. 사기꾼, 깡패는 말할 것도 없고, 실직 노동자, 탈북민, 이주 노동자, 투자회사 횡령범, 빈곤 노인 등 이들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주변부를 떠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내일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찾는 이도 별로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죽기살기로 게임을 하다가 사라지는 이야기다. 반드시 엄청난 빚을 진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언제나 대체 가능한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피와 땀이 흐르는 동료가 아니라 금액이나 숫자로 환산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비인간적 대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분노가 이 시리즈를 관통한다.

456명의 게임 참가자들은 '공정한' 게임을 보장 받으며 마지막으로 경쟁할 기회를 얻는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쉽게 성공하는 바깥세상에 환멸을 느낀 자들은 게임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누구나 똑같이 부여받은 유니폼과 침대, 번호가 공정성을 보장한다. 여기서는 돈이나 권력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만약 게임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다면, 대다수의 참가자가 자발적으로 게임장으로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참가자들이 한 번 해볼 만하다고 느낀 게임이란 게 결국 아이들이 하던 줄다리기, 구슬 놀이, 달고나 뽑기, 오징어 게임이다. 아이들 놀이에는 공정성이 생명이다. 조금이라도 부당하다고 느끼면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 게임은 난장판이 된다. 아이들 모두가 규칙을 숙지하고 스스로 심판이 되어 반칙 행위를 감시했다. 성인이 된 참가자들은 아이들 게임의 공정한 규칙에 따르며 마지막으로 게임에 참여한다. 오징어 게임 요원은 가면을 쓰고 공정하고 엄격하게 게임을 진행한다. 게임의 규칙을 어긴 자는 가차 없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한다. 성기훈(이정재 분)은 오징어 게임의 공정성을 믿었기에 상처 입은 동료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렇지만 오징어 게임이 정말로 공정했을까?
 
 넷플릭스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장한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장한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겉으로 공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줄다리기처럼 힘이 센 자가 유리한 게임이 있고, 두뇌 회전과 손기술이 중요한 구슬 놀이도 있다. 운으로 좌우되는 징검다리가 그나마 공정해 보이긴 한다. 게임 안에서 누구와 편이 되는지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진다. 구슬 놀이에서 조상우(박해수 분)가 상대를 속이고 구슬을 훔치는 것도 두뇌 게임이라며 용납되기도 한다. 게임이 아닌 싸움도 말리지 않고 지켜볼 뿐이다. 이게 뭐가 공정한 게임이란 말인가. 타고난 신체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하고, 강자가 약자를 속이고 핍박하는 세상의 규칙이 여기에서도 통한다. 완벽히 공정한 게임이란 없다.

오징어 게임에서 우승한 기훈은 왜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그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는데. 기훈은 타려던 비행기에서 내려 비장한 얼굴을 한 채 어디론가 향한다. 빚의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날아야 할 그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미친 듯이 들끓고 있다. 이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가 현대 사회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게임이 끝날 때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황금 돼지저금통에 차곡차곡 적립되는 돈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획득한 상금은 순수한 돈이 아니라 타인을 희생해서 얻은 잔인한 돈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는 함부로 쓸 수도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북자, 불법 이민자, 약자를 갈취해서 돈을 모은 사장님들이 승자로 대우받는 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면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부와 권력을 많이 차지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절망적인 현실은 한국 사회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게 오징어 게임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결국 이 작품은 낙오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드라마다. 그렇다면 VIP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하는 게 아닐까. 만약 시즌 2가 만들어진다면 '헝거 게임'처럼 체제를 전복하는 반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비대해진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오일남(오영수 분)은 "이러다가는 다 죽어"라고 절규하며 말린다. 이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펼쳐지는 무분별한 경쟁을 일갈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 게임을 주최한 전지전능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상류층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그건 경쟁도 의미 없어지는 극단적인 단계다. 모두가 죽고 사회가 사라지면 과시할 부도 착취할 계층도 없어져 버리니까. 그건 곤란하다. 그러니까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도 결국은 쇼 비즈니스계의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다.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1등으로 황금돼지를 차지했다. 한류 드라마가 할리우드를 넘어서 세계로 발돋움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한국 전쟁 후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 시작해 선진국으로 진입한 한강의 기적, 한국의 성공 신화까지 동원하여 광고하기 바쁘다. 도저히 우승할 것 같지 않던 성기훈으로 대표되는 한국 드라마가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이런 약자도 성공할 수 있으니까 이 게임에 기꺼이 참여하라고. 어쩌면 이 게임의 목적은 누가 우승하느냐가 아니라 판을 키우는 게 아닐까. 오징어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88 올림픽 시절에는 참여자 규모나 상금이 이 정도로 크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승자가 독식하는 시스템에서 성장하지 않는 건 도태되기 마련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그게 죽음으로 표현된다. 앞으로 나아가고 다음 게임으로 올라가는 성장을 하지 않으면 내일도 없다. 신자유주의 게임장에서 살아서 나가려면 상대방을 괴멸시키고 나를 강하게 키우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 0번 넷플릭스는 디즈니,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경쟁자와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세상은 이미 오징어 게임판이 되었다. 이 게임의 진정한 승자는 참가자가 아니다. 주최자나 VIP도 아니다. 도저히 끝낼 수 없게 커져 버린 게임을 돌리고 굴리는 이 끔찍한 시스템이야말로 진정한 승자가 아닐까.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게임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자랑스러운 경쟁자 중 한 명으로 참가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류동협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ryudonghyup)에도 실립니다.
그림: 류정화 (www.instagram.com/ryujeonghwa)
드라마 넷플릭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오징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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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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