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3일, 포탄이 빗발치는 흥남부두에서 한 척의 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60인승 미국 화물선인 그 배에는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만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역사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람들, 이들을 추적해 한 편의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올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 방송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1년여에 걸쳐 방송 제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편집자말]
1950년 12월 25일, 벌리 스미스는 평생 잊을 수 없었던 21살 생일날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위에서 맞고 있었다. 그나마 배가 포탄이 빗발치는 함흥 앞바다를 무사히 빠져나와 거제도 가까이까지 다가왔다는 사실만이 한 가지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섬에 있는 교회로부터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종소리가 배까지 들려왔다. 이 작은 섬은 정처 없는 피난민들을 위해 문을 열어줄 것인지 배 위의 선원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며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3등 기관사 멜스미스

당시 사진을 보며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3등 기관사 멜스미스 ⓒ 추미전

 
다행히 얼마 후 하선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거제도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선착장까지 접근할 수 없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배는 할 수 없이 거제도 장승포항 앞에 있는 작은 섬 지심도 앞에 정박했다. 장승포항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올해 83살 주수권씨도 그때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화물칸 안에 타고 있었다. 23일 밤, 배에 올랐던 그들은 벌써 배 안 화물칸에서 사흘째를 맞고 있었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탔죠. 그냥 따뜻한 남쪽나라 간다. 그것만 알고 탔죠.

피난민들을 받아준 거제도

드디어 하선 방법에 관한 연락이 왔다. 전차상륙함인 LST가 메러디스 빅토리호까지 와서 피난민을 싣고 내륙항인 거제도 장승포항까지 수송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대의 LST가 태울 수 있는 피난민들은 많지 않았다. 하선을 하는 데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심도에서 장승포항까지 피난민을 실어나른 LST함

지심도에서 장승포항까지 피난민을 실어나른 LST함 ⓒ 추미전

 
그러나 모든 방법이 결정되자 바로 하선이 시작됐다. 배에 가장 늦게 올라 갑판에 있던 피난민들부터 하선이 시작됐다. 갑판 위의 피난민들이 모두 내리자 드디어 화물칸의 피난민들이 하선을 할 차례가 됐다.

그러나 벌리 스미스와 멜 스미스를 비롯해 모든 선원들은 화물칸을 여는 것이 두려웠다고 한다. 화물칸을 닫은 이후 사흘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어떠한 문제도,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조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주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화물칸 안에서 죽었어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

그러나 화물칸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들의 염려는 기우라는 것이 밝혀졌다.
 
화물칸을 열 때 밑으로 내려다보면서 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제히 위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물칸 한 칸을 비우고, 다음 판자를 치우고 다시 밑의 화물칸을 열었습니다. 더 아랫칸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지 않을까, 염려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히 위를 쳐다보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온전히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마실 물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등 기관사 멜스미스
 
 화물칸 한 간을 3칸으로 나눠 탄 피난민들

화물칸 한 간을 3칸으로 나눠 탄 피난민들 ⓒ 추미전

 
더 놀라운 일은 갑판이 아니라 지하 화물칸에서 김치 2,3,4,5가 태어난 것이다. 누구도 죽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들이 배에서 내리던 모습은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에게도 잊을 수 풍경이었다.
 
그들은 선원들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렸어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그 자세에서 느껴졌어요.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 

배에서 내리던 당시의 모습을 주수권씨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좀 더 작은 배로 옮겨 탔어요. 그런데 일단 날씨가 함흥과 엄청 달랐어요. 함흥은 칼을 에는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날렸는데 거제는 바람이 따뜻한 거예요.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12시경 시작된 피난민들의 하선은 늦은 밤이 돼서야 끝이 났다. 혹시 배에 남은 사람들이 있지나 않은지 선원들은 배를 순찰했다. 
 
피난민들이 내린 뒤 우리는 배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어떠한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창구 밑에는 피난민들이 남기고 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물건들, 그리고 오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선실마다 오물들이  거의 2미터 정도는 쌓여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죠.   -3등 기관사 벌리 스미스  

지독한 오물들을 보자 새삼 피난민들이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사흘을 버틴 건지 새삼 놀라웠다고 한다. 배 전체에 냄새가 배인 것도 큰 문제였다. 배를 일본 사세보로 가져가 오물을 제거하고 청소를 하는 데만도 한 달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항해사들도 삽을 들고 내려가서 (청소 업체) 사람들과 배설물을 삽으로 퍼냈습니다. 그리고 소방 호스를 가지고 각각의 창구를 소금물로 씻어냈죠. 그리고 일본인들이 준 레몬 파우더 포대를 창구에 뿌려서 냄새를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죠.   - 3등 항해사 벌리스미스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원들의 노력

한 달 동안 배 청소를 했지만 냄새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결국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오물 냄새가 너무 심해 다른 화물을 받지 못하고 화물을 싣지 않은 채 미국으로 향해야 했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면 배가 많이 흔들립니다. 배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흔들렸어요. 매우 불편한 항해였습니다. 우리 배는 시애틀에 들어갔는데 시애틀에 있는 사람들이 악취 때문에 배가 도착하기 20마일(32km) 전부터 배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배의 악취는 정말 심하고 오래 갔습니다.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 
 
 정박 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정박 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 ⓒ 추미전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살리기 위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원들의 노력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누구도 이 일을 생색내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기적의 배'로 불리기 시작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그 많은 수고를 스스로 감내한 본인들은 자신의 배가 기적의 배라고 불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벌리 스미스에게 질문을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 배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흥남 앞바다에는 피난민들을 실어 나른 크고 작은 배들이 많았습니다. 일본 배도 있었고 영국 배도 있었고 미국 배도 있었죠. 작은 어선들도 있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는 흔치 않은 숫자를 태웠기에 많은 주목을 받았을 뿐이죠. 그러나 메러디스 빅토리 호도  그 많은 기적의 배들 가운데 한 척일 뿐입니다.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 

목숨이 오가는 전장의 바다에서 쉽지 않은 선택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이들의 겸소한 대답이 마음을 울렸다.
라루선장의 마지막 항해 난민수송작전 기적의 배 레너드 라루 마리너스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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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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