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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살해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1987년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살해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 권우성

 
1986년 11월 '파랑새 사건'으로 서울영상집단의 홍기선(감독)과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이 구속된 이후, 다소 위축되는 면이 있었던 영화운동은 1987년에 들어서면서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과 맞물려 다시 분주해진다.
 
1987년이 시작되고 며칠 안 된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살해당한 것은 이후 6월항쟁이 도화선이 된 큰 사건이었다. 민심은 들끓었고, 2월 7일 열린 박종철 열사 추도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최대 시위가 됐다. 서울 도심 전역에서 대학생 시민들과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때 박종철 열사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를 제작한 것이 서울영상집단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였다. 49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만든 것이었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도 제작에 함께 했다.
 
이정하에 따르면 서울영상집단으로 제작 의뢰가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파랑새 사건' 여파로 서울영상집단의 활동이 제자리를 못 잡던 상황이라 처음 제작을 맡았던 이정하가 결국 편집과 녹음 등 최종완성까지 맡게 됐다. 취재 촬영단계에서는 배인정(전 노동자뉴스제작단 대표)이 초반에 함께했다. 음악은 노래 '광야에서' 작곡자인 문대현이 맡았다. 편집은 이정하의 자취방이었던 공덕동 골방에서, 녹음은 광화문 근처의 어느 교회를 활용했다.
 
영화 제목은 1987년 1월 20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추모제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한 추도시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후 2007년 같은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정하는 '파랑새 사건'의 발단이 된 연세대 영화패의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하는 산하>의 제작에 참여했던 일원이었다. 만일 당시 피검됐다면 조직사건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살해 규탄 투쟁에 영화를 통한 참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행히 홍기선과 이효인이 연행된 직후 잠적하면서, 경찰 역시 두 사람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고 영화법 위반 혐의로만 기소됐다.
 
경희대 '그림자놀이'를 만들었던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에 따르면 이정하는 안동규의 집에서 숨어있었다고 한다. 안동규는 "당시 서울 일원동에 살았는데, 홍기선과 이효인이 연행된 후 이정하가 우리 집에서 열흘에서 보름 정도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안동규는 1985년 홍기선과 이효인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등, 당시 영화운동의 전개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 이효인이 서울영화집단에 가겠다고 해서 외삼촌인 홍기선을 소개해 준 건데, 서울영화집단에 있던 대부분이 충무로나 한국영화아카데미 등으로 가고 홍기선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효인이 가겠다고 하니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안동규는 홍기선과 이효인이 구속된 후 석방운동에 참여하지도 재판 참관이나 면회를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안동규는 "당시에는 영화운동이 중요하고 누군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외삼촌이 하고 있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효인은 "수감 당시 이정하와 변재란이 면회를 오기도 했다"며 "일일이 인사를 잘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보다 이정하와 변재란의 옥바라지가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충무로 진입 통로가 된 한국영화아카데미
 
안동규의 언급처럼 1985년 이후 민중영화를 지향했던 서울영화집단은 홍기선만 전업 활동가로 남아 외로움을 겪던 시기였다. '파랑새 사건'을 전후한 시기, 한국영화의 재야에서 작은영화를 추구하며 주류 제도권 영화를 비판했던 영화운동이 하나둘 주류영화로 상징되는 충무로에 진입하게 된다.
 
 1984년 개원한 한국영화아카데미

1984년 개원한 한국영화아카데미 ⓒ 영화진흥위원회

 
여기에는 1984년 개원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80년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영화운동의 충무로 진입에 있어 통로가 됐기 때문이다. 개원을 전후로 한 시기는 영화운동이 활발해지던 때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8mm/16mm 영화를 주로 찍던 청년 영화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1983년 10월 27일 당시 문화공보부가 발표한 영화진흥계획의 일환으로 세워졌다. 국산영화의 질적 향상과 국제진출 강화가 설립 목적으로, 영화진흥을 위한 조사 연구 및 영화인 양성을 위한 교육 훈련을 전담할 전문기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84년 1기 입학생은 오진환(연세대 독문과), 황규덕(서울대 독문과), 임종재(서울시립산업대 조경학과), 이용배(서울대 조경학과), 오병철(중앙대 연극영화과), 장현수(중앙대 연극영화과), 이영호(한양대 연극영화과), 김소영(서강대 영문과), 김의석(중앙대 연극영화과), 박종원(한양대 연극영화과), 장주식(연세대 사회학과), 유지나(이화여대 불문과) 등 모두 12명이었다.
 
이중 황규덕(감독)은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을 했고, 김의석(감독)도 '서울영화집단' 초기 회원이었다. 김소영은 서강대 '영화공동체'가 태동할 때 선배로서 조언과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학에서 시작된 영화운동의 초창기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인물들 다수가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실질적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만들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2기 김정진(감독)에 따르면, 당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이를 촬영하고 기록할 영상기사 양성이 설립 이유 중 하나였다.
 
1987년 입학한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이정향(감독)은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올림픽을 겨냥해서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그 당시 줄기차게 들었다"며 "1987년도 2월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1988년 2월에 수료하고, '88 올림픽 공식 필름' 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또한 "공식 필름 (official film) 팀은 거의 문화공보부의 '문화뉴스' 감독님들이 중심이었고, 그 밑에 조감독들이 (퍼스트 한 명, 세컨드 두 명) 세 명씩 포진해있었다"면서 "퍼스트 권칠인 감독, 세컨드는 나와 4기 동기인 김태균 감독과 셋이 한 팀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이용배(이용배(계원예술대학교 교수)가 장산곶매 대표로 <파업전야>에 출연했을 당시 모습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이용배(이용배(계원예술대학교 교수)가 장산곶매 대표로 <파업전야>에 출연했을 당시 모습 ⓒ 장산곶매

 
1980년대 후반 영화운동단체 '장산곶매'에 참여해 대표를 맡기도 했던 이용배(감독,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는 한국영화아카데미를 통해 영화운동에 뛰어든 특별한 경우다.
 
이용배는 대학 재학 당시 영화운동보다는 미술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83년 4학년으로 복한한 뒤 대학 미술반 활동을 마감하고 '애니메이션 제작과 우리의 현실'을 주제로 서클 세미나를 하는 등 애니메이션 업계로 진로를 굳히게 된다.
 
이는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하청회사에 입사하여 애니메이션을 배운 경험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청회사에 그렸던 것은 <로보트 태권V>로 유명한 김청기 감독의 <혹성로봇 썬더 A>의 동화 컷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 수원의 서울농대 도서관에서 미대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던 중 한국영화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뒤늦게 영화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영화 서클 '얄라성'이 있었으나 잘 몰라 가입하지 않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하고 나서야 황규덕(감독) 등을 비로소 알게 됐다.
 
이용배는 "아카데미 면접 보면서 '어찌 영화를 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애니메이션을 했었는데 영화 연출을 배우면 스필버그 같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종합하는 디즈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으며 엄청난 문화적 충돌을 겪고 많은 각성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카데미 졸업 후 1986년 아시안게임에 뛰어들어 육상 필드 부문 기록팀 조감독과 성화 봉송 기록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1988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 1986 아시안게임에서 국가적 예비 운영과 공식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대대적으로 하자고 해서 국립영화제작소 주관으로 공식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꾸려졌다"라던 그는 "'대한뉴스' 제작의 한 가운데 뛰어든 셈인데, 공무원 관행, 권위 등이 보여 고통스럽던 기억만 있었다"고 회상했다.
 
의식있던 청년 영화인 모인 한국영화아카데미
 
한국영화아카데미는 개원 이후 대학 영화서클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대학에 영화과가 드물었던 시절,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학생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한국영화운동의 분기점 같은 역할을 했던, 1984년 7월 열린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발표회'에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들 여럿이 주체적으로 참여했고, 당시 김의석(감독, 전 영화진흥위원히 위원장)이 집행위원장 역할을 맡은 것도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1985년 영화마당우리의 '작은영화워크샵'을 수료한 권칠인(감독, 전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이 2기, 고려대 '돌빛'을 만든 정병각(감독)이 3기, 외국어대 영화동아리 '울림'을 만들고 졸업한 김태균(감독), 서강대 영화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했던 이정향(감독), 부산에서 대학영화운동을 했던 오석근(영화진흥위원장)이 4기. 외국어대 '울림'의 장기철(감독)이 6기로 입학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김의석(감독)이 재학 중 만든 단편 <창수의 취업시대>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김의석(감독)이 재학 중 만든 단편 <창수의 취업시대> ⓒ 한국영화아카데미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이정향(감독)이 재학 중 만든 단편 <내이름 상우>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이정향(감독)이 재학 중 만든 단편 <내이름 상우> ⓒ 한국영화아카데미

 
대체적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온 학생들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과 함께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의식이 있던 청년 영화인들이었다. 대학에서 영화를 즐겨보면서 깊이 있게 학습하고 기존 전공보다는 영화를 택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매력 있는 학교였다.
 
이정향은 "대학 2학년 때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곳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꼭 거기에 들어가겠다는 열망으로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도 마다하고, 졸업 학년을 보냈다"며 "한국영화아카데미가 2년 연속 여학생을 뽑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 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대학 4년 동안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영화를 좋아하고 딴짓을 했던 게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을 하는 데, 더 도움이 된 것 같다"면서 "기술적인 건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배웠지만 때늦은 감은 전혀 못 느꼈다"고 전했다.
 
이어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할리우드 키드의 기나긴 독학 시절에 비해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운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선택된 자로서의 의무감, 책임감을 배웠기에, '하다가 아니면 말고' 식의 생각은 할 수 없었다"며 "당시 40만 원을 내긴 했으나 국비 장학생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도 있었고, 국비로 배우는 만큼 충무로에 진출해 한국영화를 격상시키는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1985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를 졸업한 황규덕과 김의석이 1985년 충무로에 연출부로 들어가면서 재야에 머물던 영화운동은 자연스럽게 하나둘 충무로로 진입하게 된다. 김의석은 1985년 장영일 감독의 <왜 불러>에 연출부로 들어갔는데, 얄라셩 출신으로 처음 충무로에 들어간 황규덕도 이 영화에 기획으로 참여한다.
 
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에서 "한국영화가 정부에 의해 사망선고를 받았고, 사회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충무로 상업영화를 맹비난했던 세대들이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쳐 이른바 주류 영화로 대표되던 충무로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이후 1990년 중반 한국영화 중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들의 영화는 기존 한국영화의 문법과는 다른 시도로 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를 빛냈다는 평론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사회성 있는 작품들이 점차 증가했고, 기존 충무로의 제작 관행을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종원은 <구로 아리랑>(1989)으로 데뷔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을 만들었고, 김의석의 데뷔작 <결혼이야기>(1992)는 5기 박헌수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최초의 기획영화였다. 황규덕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1990), 김태균의 <박봉곤 가출사건>(1996), 이정향의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등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게 된다.
  
 부산영화제 초기 와이드 앵글 파티에서의 춤을 추는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

부산영화제 초기 와이드 앵글 파티에서의 춤을 추는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 ⓒ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은 한국독립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김태균에 따르면 1988년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1990년대 충무로에 사무실이 있을 때 당시 해외 영화계 관계자들이 영화운동 청년들의 8mm/16mm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였다. 그는 자비로 처음 한국영화, 특히 독립영화에 관심을 갖고 들어온 평론가였다. 당시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가 남산에 있었는데, 토니 레인즈가 누군지 잘 몰랐던 영화진흥공사는 오히려 작품을 보여주지 않고 박대했다고 한다.
 
김태균은 "내가 영화진흥공사에 같이 가서 이 사람 해외에서는 유명하다고 말해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당시는 대부분 상업영화로 가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나와 몇 명 만이 독립영화에 치중할 때여서 당시 만들어진 작품들이 거의 내 사무실에 있었고 해외 인사들은 비디오 등으로 시사를 했다"고 말했다.
 
김태균은 "이후 한국정부 초청으로 온 뉴욕현대미술관(NoMA)의 영화담당 큐레이터 래리 카디쉬는 영화진흥공사에서 한국영화를 보고 토니 레인즈의 소개로 내 작업실에 와서 독립영화들을 보게된 경우였다"고 덧붙였다.
 
래리 카디쉬는 1996년 11월 뉴욕한국문화원과 함께 한국영화제를 개최해 유현목 신상옥 임권택 3인전을 개최했고, 임순례 감독의 첫 장편 <세친구>도 뉴욕현대미술관이 주최하는 1997년 신인영화제에 초청하는 등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 공헌한 인사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공로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흑역사, 시나리오 검열에 정보기관 사찰
 
하지만 한국영화아카데미는 1989년 11월 6기생들의 졸업작품 시나리오 검열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된 사건으로, 당시 학생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겨레> 1989년 11월 22일 자에 따르면 연출전공 담당이었던 최하원 감독은 연출전공자 시나리오 중 <슬픈 시>, <아리랑 고개 넘어>, <별이 되어 만나리>가 사회적이고 정치성을 띠었다는 이유로 반려한다. 문제는 3편의 시나리오 반려가 작품성이나 미학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닌 소재 제한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었다.
 
홍준석의 <별이 되어 만나리>는 실종된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의 여자 친구를 통해 풀어가는 이야기였고, 금보상의 <아리랑 고개 넘어>는 1989년 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전 국회의원)의 언니 임윤경씨를 주인공으로 세워 분단 극복을 위한 사랑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작품이었다. 김은주의 <슬픈 시>는 어느 학원 프락치의 갈등과 고뇌를 소재로 삼고 있었다.
 
반려된 시나리오 모두 사회성 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한국영화아카데미 학생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언론에 알리며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장기철(감독)과 김은주(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장기철(감독)과 김은주(감독) ⓒ 김은주 제공

 
<슬픈 시>를 반려당했던 김은주(감독)은 "그때 뜻을 같이했던 9명이 모두 졸업작품을 거부했다"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이 정도의 작품도 수용 못 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대학 때 운동권 아니었냐? 왜 이런 시나리오를 썼냐?' 등등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김은주는 "나는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었고 영화가 좋아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인데, 대학 때 만들고 싶었으나 여건이 안 돼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만들려고 한 작품이 막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며 "끝까지 졸업작품을 만들지 않아 졸업식 때 졸업장을 못 받고 이후에 수료증을 받았다"고 말했다.
 
1985년 외국어대 울림 창립의 주축이었던 장기철(감독)도 9명 중 하나였다. 장기철은 "본질을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영화진흥공사(사장 김동호, 현 영화진흥위원회)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제출해 검열을 받은 것이었다. 이를 시간이 흘러 문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장기철에 따르면 1999년 영화아카데미 총동문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 발전방안을 위한 기획서를 한국영화아카데미 사무국과 만들던 과정에서 보관된 모든 입학-성적 등 기록을 열람했다. 거기서 시나리오 검열과 일련의 사태 및 수업을 거부한 9명의 사찰기록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보고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장기철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한 진상조사가 있었으면 좋겠고, 결국 졸업작품 거부로 졸업이 안 되고 수료 처리된 9명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라며 "당시 졸업을 한 동기들과 그렇지 못한 9명 동기들 간에 거리감이 생기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1990년 졸업식에서 항의문을 낭독한 후 졸업식을 중단하고 강의실로 돌아온다. 장기철은 당시 항의의 뜻으로 상가 상주 복장을 한 채로 참석했다. 
 
 1990년 아카데미 6기 졸업식에서 시나리오 검열 항의의 뜻으로 상주복장을 하고 참석했던 장기철(가운데), 왼쪽 한명구 배우, 오른쪽은 홍원기 배우

1990년 아카데미 6기 졸업식에서 시나리오 검열 항의의 뜻으로 상주복장을 하고 참석했던 장기철(가운데), 왼쪽 한명구 배우, 오른쪽은 홍원기 배우 ⓒ 장기철 제공

 
장기철은 "지금이라도 영화진흥위원회가 조사를 했으면 한다. 비록 당시 검열과 사찰에 관여한 사람들이 현직에 없더라도, 사과를 해주길 바란다"며 "한국영화아카데미가 학생들의 시나리오 검열 항의를 끝까지 무시했던 것은 당시 영화진흥공사와 국가안전기획부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한국영화아카데미 나한태 원장과 연출을 지도했던 최하원 감독은 소재 제한을 당연시 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소재 제한이 한국영화의 진흥을 담당하고 있는 영화진흥공사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는 데 슬픔을 느낀다"며 "기성영화의 검열을 법제화한 영화법조차 교육기관 안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검열을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졸업식에서 항의문 낭독, 영화제작 강행

소재 제한과 검열에 반대하며 졸업작품을 거부했던 한국영화아카데미 장기철(감독), 김은주(감독), 김명화(프로듀서) 등 6기 9명은 <아리랑 고개 넘어>를 별도로 만들게 된다. 영화는 <슬픔을 자르고>라는 제목으로 1990년 3월 독립영화협의회의 주최로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열린 1회 독립영화제에서 상영했다.
 
<한겨레> 1990년 3월 24일 기사는 <슬픔을 자르고> 상영 소식을 전하며 "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씨 가족들이 방북 직후의 충격과 갈등, 어려움에서 벗어나 꿋꿋하게 서가는 과정을 언니 윤경씨의 시각으로 그린 20분짜리 16mm 색채영화"라고 소개했다.
 
또 "임수경씨 가족의 양해와 협조로 임씨의 집에서 직접 촬영을 했고, 잔잔하고 조용하게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그려나갔으며, 습작으로는 깔끔한 소품"이라고 평가했다.
 
 <슬픔을 자르고> 촬영 현장인 임수경 씨 집 안방에서 부모님과 식사하고 있는 촬영팀

<슬픔을 자르고> 촬영 현장인 임수경 씨 집 안방에서 부모님과 식사하고 있는 촬영팀 ⓒ 장기철 제공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는 "졸업을 인정받지 못한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학생들이 외부에서 촬영장비를 마련하고 제작비를 각출해 <슬픔을 자르고>를 만들었다"며 "1회 독립영화제는 검열을 무시하고 개최한 것이라 다른 작품들과 함께 상영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부당한 시나리오 검열을 거부한 한국영화아카데미 힉생들의 저항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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