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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최용창 할아버지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최용창 할아버지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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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서 손을 잡고 38선을 넘고 하는 걸 보니 기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고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워.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쳤어. 내가 나이를 먹어가지고 부모님이나 누님, 형님, 동생들 만날 수가 없어. 너무 늙고 아프고... 이제 영원히 못갈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헤어질 때 아버지 나이가 쉰 둘이셨는데 지금 내가 아버지 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네. 좀 더 일찍 이런 날이 왔으면 좋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기뻐. 김정은 위원장 노벨평화상 주라고 하고 싶어. 우리 자손들이 전쟁을 겪어서는 안 되니까. 이렇게 쭉 평화롭게 서로 왕래하면서 잘 지내면 좋겠어."

1933년생으로 올해 86세가 되신 최용창 할아버지. 1950년 12월 그 유명한 흥남철수 때 학도병 신분으로 군함을 타고 내려온 후 오늘까지 68년을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삭히며 살아오셨다.

"1950년 8월이 지금도 생생해. 우리 집은 청진 금호동 철도공장 뒤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공습경보가 길게 울렸지. 한 스무 번은 울렸던가.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얼른 방공호로 들어가라고 하셨어. 일본 놈들이 도시 계획하느라고 지하에 배수구를 팠는데 그 커다란 배수관을 방공호로 썼지. 숨죽이고 있다 두 시간 뒤 해제 사이렌이 나서 나와 보니 도시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거야. 그리고 나서 아버지와 성진(지금의 김책시)으로 피난을 내려왔지.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사람을 막 죽이고 그랬거든. 그 때 형님은 이미 인민군에 입대했고 누님은 결혼해서 청진에 살고 있었으니까 나와 배다른 동생 셋 그리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렇게 여섯 식구가 새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길주로 옮겨온거야. 그리고 그해 겨울 학도병에 자원했지. 아버지는 국군이 들어오는 걸 좋아하셨어. 아버지가 연희전문 출신의 의사 셨는데 북쪽에서는 인텔리들이 더 살기 어려웠어. 고통을 많이 당하셨지. 길주도 곧 국군들이 들어와 해방되니 그리로 가야 한다고 하셨거든. 길주에 들어온 국군들이 피우던 화랑담배 냄새가 지금도 생각나. 참 구수하고 향긋했던 것 같아."

4살에 친어머니를 잃은 최 할아버지는 서모(새어머니) 손에 자라며 많은 고통을 겪었다. 어쩌면 새어머니의 모진 매와 배고픔이 서러워 홧김에 학도의용군에 자원했는지도 몰랐다.

"그날은 어머니에게 얻어 맞고 어머니가 일러서 아버지에게도 매를 맞은거야. 내가 동생을 때렸다고 일렀거든.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 몰랐어. 밥도 잘 주지 않고 부지깽이나 몽둥이나 잡히는데로 나를 때리고 일만 시키고... 열여덟살이면 매를 맞고 살 나이는 아니잖아. 억울하고 화가 나서 사촌 네 가서 잤는데 마침 벽에 붙은 학도의용군 모집 공고를 본거야. 그래 이거다 하고 바로 신청을 했지.

열여덟 살이지만 너무나 못 먹고 구박만 받다보니 키도 작도 몸도 약했어. 심사하는 분이 가서 더 커서 오라며 돌려보내는데 무조건 넣어달라고 사정을 했네. 아버지도 처음엔 놀라며 말리시더니 내가 하도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가 없던지 매정한 녀석이라고 하시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더라구. 큰 아들은 인민군으로 작은 아들은 의용군으로... 더구나 서러운 마음에 자원했다니 아버지도 마음이 좋지 않으셨겠지.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그대로 아버지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 하고 나와서 지금까지야."

최용창 할아버지와 아내 홍정옥 할머니의 약혼 사진
 최용창 할아버지와 아내 홍정옥 할머니의 약혼 사진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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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본 고향, 그것이 마지막일 줄은...

간단한 훈련을 마친 학도병에게는 칼빈 소총과 담요가 하나씩 주어졌고 피난민들과 함께 짐짝처럼 흥남행 기차에 실려졌다. 눈이라도 붙였을까 소란함에 밖을 보내 어느새 눈보라가 치는 흥남에 도착했다. 기찻길과 역사 위에 놓여진 수많은 드럼통 사이를 지나 서로 태워달라는 피난민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정신없이 떠밀려 전함에 오르니 사흘 치 식량이라며 잼 한통과 건빵, 우유 한통이 보급되었다.

배가 항구를 떠나고 자정 쯤 되었을까 벼락치는 소리에 눈을 뜨니 조명탄이 바다 위를 대낮같이 밝히는 가운데 멀리 불바다가 된 육지가 보였다. 흥남이 불타고 있었다. 기차역에 놓여있던 기름을 가득 담은 드럼통이 폭죽처럼 하나씩 터지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때만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땅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남으로 기수를 돌리고 사흘 만에 묵호항에 도착해서 이번엔 육로로 후퇴를 하는데 1미터가 넘게 쌓인 눈길을 걸어서 대관령을 넘는 거야. 그때는 이미 중공군이 우리보다 앞질러 남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지. 횡성 거의 다 왔을까 '핑'하는 소리가 나는데 정신이 아찔해. 대퇴부에 총을 맞은 거야. 피를 철철 쏟으며 혼절 한 나를 친구가 업고 가는데 얼마 못가서 이번엔 친구가 총에 맞았어. 아이구 아이구 그때는 얼마나 겁나고 무섭고 가슴이 아팠던지... 그 친구 이름을 잊지 못해. 김석봉이었는데... 시신을 붙잡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

울다 정신을 잃은 그를 살린 건 북진하던 미군이었다. 전쟁에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인지 춘천야전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 서울 대전을 거쳐 대구까지 3천리를 걸었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도착한 대구는 배신감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듯 보였지만 여전히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고 학도병이었던 용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2 국민병으로 신분이 바뀌며 해산 명령을 받았다.  

"전쟁 중이라 무법천지였어. 자기네 맘대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다가 집으로 가라니 도리가 있나.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무조건 북쪽을 향해 걸었지. 가다가 가다가 충청도에 멈춰 한 일 년 머슴을 살기도 하고. 전방은 전투가 한창이라 갈 수도 없고 일단은 먹고 잘 곳이 필요했거든. 그러다 미군부대 군속이나 해 볼까 기웃거리다 쫓겨나서 미군트럭에 실려 서울역에 던져지고 어찌 어찌 다른 미군부대에 들어가 얼마간 일을 하다가 또 쫓겨나 다시 서울역에 버려지고, 그때마다 울면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전방으로 전방으로 고향을 향해 걸었던 기억이 생생해. 정말 눈물젖은 미아리 고개였지."

고향을 향해 걷고 또 걷던 용창의 눈에 현역군인을 모집 한다는 공고가 들어왔다. 며칠을 굶었을까 너무나 배가 고팠다. 군인이 되면 굶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 스무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군번이 있는 정식 군인이 된 것이다.

북에서 내려와 18년간 군인으로 살았다. 형님은 인민군으로 본인은 국군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시대였다. 이제 더 이상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불행한 날 들이 없었으면 기도한다.
 북에서 내려와 18년간 군인으로 살았다. 형님은 인민군으로 본인은 국군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시대였다. 이제 더 이상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불행한 날 들이 없었으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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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초등학교 벽에 붙은 공고를 보고 지원 했더니 군산으로 보내더라구. 거기서 다시 제주도 훈련소로 보내졌는데 고향에선 더 멀어지고 언제 육지로 갈 수 있을까 막막했지. 방법을 생각하다가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기로 했어. 임관 후 부산 보충대에서 춘천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어쩌다가 또 카투사가 됐네. 그렇게 군복무를 하다가 53년 7월 정전협정과 동시에 휴전이 되고 그 후에는 파주에서 군복무를 했지. 그렇게 18년간 직업군인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 낳고 살다보니 여든여섯이 됐네. 남북이산가족찾기 때마다 신청하고 기다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찾을 수가 없고. 이제 내 생전에는 못 만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지."

최근들어 부쩍 건강이 좋지 않아 응급실을 찾는 일이 잦아진 최 할아버지. 몸이 아프고 코 앞에 다가 온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때마다 어린 시절 따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진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했던 훌륭한 분이셨는데... 집에서 환자에게 줄 우황청심환을 빚으시던 모습도 생각나고 내가 감자엿을 좋아하니까 한 근 씩 사다가 쓱 밀어 주셨던 기억도 나고... 새어머니 때문에 생긴 오해로 날 때리는 바람에 내가 집을 나와 학도병에 갔지만 그건 그날 따라 그러신 거고. 가족에게도 환자들에게도 참 따뜻한 분이셨어."

1차 남북이산가족 찾기 행사가 있기 전까지 최할아버지는 북에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았다. 혹시나 월남한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부모님이든 형제 든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북에 계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임진각으로 달려가곤 했다
 북에 계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임진각으로 달려가곤 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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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쪽에 피해가 갈까봐 북에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살았어. 하지만 아버지가 배를 곯고 계시는 건 아닌지 아프지는 않으신지 힘들게 살고 계신 건 아닌지 늘 마음에 걱정이 떠나지 않았지. 참다 참다 정 아버지가 뵙고 싶으면 임진각으로 달려가곤 했지. 거기서 북쪽 하늘이라도 바라보면서 그리움을 달래는 거야.

이제 이렇게 남북정상이 만났으니 나도 북에 있는 아버지 산소라도 찾을 수 있으려나. 기차타고 청진에 가 볼 수 있으려나. 내 아내, 아들, 딸 데리고 손자 손녀들 데리고 고향에 가볼 수 있으려나.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버지 죄송해요. 이제 돌아왔습니다. 홀홀 단신 힘들고 외로웠지만 아버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용창이가 왔어요.' 말 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그렇게 되면 소원이 없으련만..."

북에 두고 온 아버지 생각, 형제들 생각, 고향 생각에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시는 최 할아버지.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그리움과 외로움 한 번에 복받치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이번 회담이 당신 생에 가져 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며 잠시도 TV뉴스에서 눈을 떼지 않는 여든여섯 실향민 최용창 할아버지. 더 늦기 전에 더 힘이 없어지고 더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두고 온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기를, 그리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더 이상 두고 온 고향과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고통 되고 응어리 되지 않기를 함께 기도한다.

눈 감기 전에 아내와 함께 고향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북에 있는 형제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에 부푼 최용창 할아버지.
 눈 감기 전에 아내와 함께 고향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북에 있는 형제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에 부푼 최용창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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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2018남북정상회담, #실향민, #이산가족, #흥남부두, #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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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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