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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형태 뱅꼬레 와이너리 대표
 하형태 뱅꼬레 와이너리 대표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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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신 첫 와인은 마주앙이었다. 20대 때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여러 차례 마주앙 화이트와인을 마신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화이트와인은 그때까지 내가 마셔본 술과 전혀 다른 맛이었다. 신비한 투명한 빛깔의 와인은 달콤하면서 상큼한 여운이 길게 남는 맛으로 마시면 마실수록 또 마시고 싶어지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오랜만에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은 영천의 '뱅꼬레 와이너리'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뱅꼬레는 꼭 가고 싶은 와이너리였다. '한국와인의 선구자'로 불리는 하형태 뱅꼬레 대표가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와인생산자들은 그의 이름을 한두 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그의 와인강의를 듣고 와인메이커가 된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와인생산협회장인 김지원 그랑꼬도 와이너리 대표다. 김지원 회장이 와인양조를 배운 스승이 바로 하형태 대표이다. 하 대표는 김 회장에게 와인양조를 가르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김 회장과 함께 그랑꼬도 와인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하형태 대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랑꼬또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1월 19일, 뱅꼬레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뱅꼬레 와이너리' 시음장에서 만난 하형태 대표는 로제 와인을 병입하고 있는 중이라며 활짝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하 대표는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하 대표는 지금도 '한국와인의 대표주자'라 일컬어지는 '마주앙'을 만나면서 와인 외길 인생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1983년이었다. 35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데, 어느 사이엔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뱅꼬레 와이너리
 뱅꼬레 와이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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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대표가 와인과 함께 한 인생을 차분하게 짚어보면 한국와인산업의 부침(浮沈)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와인산업은 주류 수입 개방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와 함께 그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는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도 와인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와인과 함께 한 인생을 돌이키면 왜 그를 '한국와인이 선구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와인 역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와인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2006년에 영천에서 와인회사를 설립할 때 회사명을 '한국와인'으로 했다. 주식회사 한국와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2015년부터 우리나라 와인, 즉 한국와인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혼동을 막고 한국와인의 글로벌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회사이름을 '뱅꼬레'로 바꿨다. 뱅꼬레 역시 한국와인이라는 의미다.

뱅꼬레는 연간 4만 병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기업형 와이너리로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로제와인, 아이스와인과 오디와인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형태 대표는 어떻게 '한국와인의 선구자'로 손꼽히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와인 외길 인생을 걷게 되었을까? 뱅꼬레 와이너리 시음장에서 그와 마주앉아 그에 대한 호기심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형태 대표의 와인 인생 출발점에 마주앙이 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OB맥주로 알려진 동양맥주주식회사가 있다. 그의 와인 인생은 동양맥주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35년 와인 인생은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그와 마주앉아 혹은 함께 와인설비를 둘러보면서 들었다.

대구가 고향인 하형태 대표는 경북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했다. 담당교수는 석사과정까지 마친 그가 학교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취업을 결정했다. 바깥 세상이 더 흥미로웠다고 한다. 1982년만 해도 취직하고 싶은 회사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지금 세상하면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맹꼬레 와이너리 시음장
 맹꼬레 와이너리 시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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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교수가 추천한 회사는 두 곳이었다. 삼성과 OB그룹(두산). 그는 OB를 선택했다. 동양맥주 이천공장에서 1년 남짓을 보낸 그는 1983년에 자원해서 마주앙 경산공장으로 옮긴다. 그렇게 해서 그의 와인인생이 시작됐다.

한국와인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마주앙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77년 5월이다. 동양맥주는 1976년에 마주앙 공장을 설립해 와인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과일로 와인을 만들자는 정부정책으로 한국와인 제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하형태 대표의 설명이다.

당시 와인사업에 동양맥주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진로와 해태 등에서도 와인을 생산했다. 마주앙은 국내 와인시장의 70% 정도를 점유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가 마주앙 공장으로 갔던 1983년만 해도 마주앙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때는 마주앙이 주였어요. 화이트와인이 가장 인기가 많았어요. 레드와인은 생산량의 10퍼센트도 안 됐고 90퍼센트 이상이 화이트와인이었죠. 레드와인은 (와인 초보자들이) 먹기 힘들어해요. 와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화이트와인은 상큼하고 맛있어서 마시기 좋죠. 마주앙이 잘 나갈 때는 구해달라는 청탁도 들어왔어요. 귀할 때는 맥주를 열 박스 정도는 사야지 마주앙 한 박스를 끼워주고 그랬을 정도였죠."

마주앙으로 옮긴 그는 와인 덕분에 해외출장을 자주 가는 행운을 누렸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인 1980년대에 프랑스와 독일 등의 와이너리를 둘러볼 수 있었으니,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하 대표는 그가 근무하던 당시 마주앙 연간 생산량이 100만 케이스에서 200만 케이스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케이스가 6병이었으니, 엄청난 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정부가 88올림픽을 앞둔 1987년에 주류 수입을 개방한 것이다. 그 조치는 결국 한국와인산업의 몰락을 가져왔다.

뱅꼬레 와인
 뱅꼬레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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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주류산업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죠. 특히 와인 부분에. 대기업들이 와인 생산을 했지만 외국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거든요. 완제품을 수입해서 팔면 굉장히 쉬워요. 마진도 엄청나고. 외국에서 1~2불짜리 와인을 사다가 열 배 정도를 받고 팔았거든요."

그 여파로 당시 와인생산 기업들이 지방에서 운영하던 직영포도농장은 전부 폐원해야 했다. 와인생산 기업과 포도를 계약 재배하던 농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때 포도산지에서는 와인 원료인 포도를 확보하려는 포도 전쟁까지 일어났지만, 다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1988년, 마주앙 경산공장은 와인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 설비를 증설했지만 주류 수입 자유화 후폭풍을 비껴갈 수 없었다.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던 한국와인산업은 순식간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한국와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와인생산은 중단되었고, 회사에서는 외국의 벌크와인 수입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우리나라 와인산업 1기는 대기업이 시작했지만, 주류시장 개방으로 몰락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외국와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내 와인시장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마주앙이 차지했던 인기는 고스란히 수입와인으로 옮겨갔다.

(다음 기사 : ② 국내 최초로 아이스와인 개발 성공한 비결)


태그:#하형태, #한국와인, #뱅꼬레, #영천, #마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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