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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 한성은
네가 바라보는 세상이란
성냥갑처럼 조그맣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허전한 마음으로 돈을 세도
네겐 아무 의미 없겠지
날아오를 하늘이 있으니

너는 알고 있지 구름의 숲
우린 보지 않는 노을의 냄새
바다 건너 피는 꽃의 이름
옛 방랑자의 노래까지
네겐 모두 의미 있겠지
날아오를 하늘이 있으니

- 이상은, '새' 노랫말 중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온 세계를 떠돌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며 살았다. 그의 묘비에는 세 문장의 진실이 적혀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서른여섯 살 되는 해에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할 때 나는 혼자 책상 위에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계약직 노동자의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은 부모님께 드렸다. 다행히 농민들에게 친절한 은행이 나에게도 은혜로운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통장 잔고 0원인 백수가 남의 돈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들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처음 썼던 기사는 대형 포털 사이트에도 소개가 되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변명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고민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살 것 같았다. 잠시 멈출 필요가 있었다. 퇴근 후에 센텀시티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지만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통장 잔고가 늘어난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르바는 말했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요."

나는 지금 돈을 세는 것보다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 와서도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어도 모든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을 테니까. 그래도 나에게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맡았던 바람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여행 말고 다른 짓을 또 저질러 보면 된다.

그렇게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리며 산토리니 섬을 떠나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고속 페리는 2시간 만에 크레타 섬에 도착했다. 20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40분을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배낭 무게는 여행을 하면서 점점 무거워져 갔다. 배낭 무게가 전생의 업보라고들 하는데 나는 무슨 업이 이렇게 많은 걸까. 늘어난 무게는 모두 식료품이다. 외식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하지 않기 때문에 가방 속에는 늘 쌀, 감자, 파스타 소스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는 빠짐없이 페트병 가득 물을 받아 두었다. 배로 이동할 때에는 미리 슈퍼마켓에서 시리얼과 우유를 사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서러운 마음이 들어서 금방 지치기 때문이다. 유럽에 들어와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체감 물가가 치솟아 버려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다 보니 75리터 배낭에는 언제나 식료품이 가득했다. 짐을 줄여야 하는데 아직은 식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크레타 섬에 예약해 둔 헤라클리온(Heraklion)의 숙소는 현지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도미토리였는데 내가 있는 동안 다른 여행자가 들어오지 않아서 집 전체를 내 집처럼 지냈다. 무엇보다 냉장고가 있고 주방기구도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지내는 동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샤워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을 최고라 하던데 나는 주방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곳이 가장 좋았다.
헤라클레온의 중심 베니젤로 광장에 있는 모로시니 분수 ⓒ 한성은
유럽 어디나 그렇듯 아무리 물가가 비싼 동네라 하더라도 시장 물가는 늘 저렴했다. 짐을 내려놓고 집 앞 '베니젤로 광장(Plateria Venizelou)'으로 갔다. 광장 중앙에 사자상이 있는 모로시니 분수(Morosini Fountain)가 헤라클리온의 랜드마크이자 크레타 여행의 시작이다. 크레타를 여행하는 모든 사람은 이 광장에 모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내 중심 근처에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지역 상권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작은 도시일수록 항상 그랬다. 크레타에서도 중심가에서 한 블록만 이동하면 재래시장이 있었다. 정육점에서 빛깔 좋은 두툼한 돼지고기를 500g 샀는데 1.5유로였다. 2000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 순간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50유로 지폐가 딱 한 장 있었다. 50유로 지폐를 냈더니 동전 없냐고 묻는다. 주머니에는 50센트 동전 하나만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50센트만 주고 그냥 가란다.

돼지고기 한 근을 50센트만 내고 올 수는 없어서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옆에 있는 젊은 청년이 웃으며 괜찮단다. 상황을 보니 영업이 끝나는 시간이라 가게를 정리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우리의 대화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된 것은 아니었다. 1.5유로짜리 돼지고기를 사면서 50유로 지폐를 냈으니 참 난처했을 거다.

크레타 섬에서는 저녁 8시가 되면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9시면 도시 전체가 깜깜해진다.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상업 지구는 늦게까지 하지만, 나는 이미 동네 주민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곳은 나와 관계없는 곳이었다. 정육점을 나와 작은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쌀과 맥주 그리고 페타(Peta) 치즈를 샀다. 뭐든 1유로 정도밖에 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주워 담았다. 너무 조그만 가게라 또 작은 쌀 한 봉지만 사고 50유로 지폐를 낼 수가 없었다.

마음은 급한데 그 와중에 페타 치즈가 정말 일품이었다. 대형 마트에서 예쁘게 포장된 페타 치즈만 보다가 우리나라 손두부처럼 생긴 커다란 페타 치즈를 직접 보니 정말 신기했다. 크기도 엄청 컸다. 주인아저씨는 페타 치즈를 두부를 담듯이 종이에 싸서 다시 비닐 봉투에 담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받아 냅다 뛰었다. 정육점 불은 이미 꺼져 있고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헉헉거리며 1유로를 건넸다. 아저씨가 웃으며 "땡큐!"란다. 뭔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크레타 섬의 재래시장에서 제대로 된 페타 치즈를 만났다. ⓒ 한성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탁 앞에 앉아 감개무량했다. ⓒ 한성은
숙소에서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이고 흰 쌀밥을 지어 진수성찬을 만들었다. 미코노스와 산토리니에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서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니 텅 빈 뱃속이 떨려왔다. 맛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릇에 밥을 담고, 접시에 고기를 올렸다. 이대로 크레타 섬에 머물러 살아도 되겠다 싶을 만큼 기분 좋은 밤이었다. 밥그릇에 밥을 퍼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지금까지는 몰랐다. 여행을 하면서 점점 바라는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는 없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라는 것을 숙소 밖에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거리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몹시 낯설었다. 아무리 휴일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라지만, 이곳은 시내 중심가이자 여행자 거리다. 거리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보니 참 어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민족 대명절이라는 설날에도 이렇지는 않다. '일요일은 쉽니다'라는 말보다 '연중무휴'라는 말이 더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아테네에서 그랬고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이 휴일이면 대부분 영업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업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금전적인 손해가 생기겠지만, 삶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일요일마다 쉬는 가게들 때문에 불편하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 한성은
다행히도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Heraklion Archaeological Museum)은 일요일에도 개관했다. 여러나라를 다니며 유명한 박물관은 가능하면 빼놓지 않고 다녔는데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은 지금까지 갔던 박물관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아테네의 신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 현대적인 세련미로 마치 미술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크레타 섬이 가지고 있는 미노아 문명의 유물만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박물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3단 팸플릿도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가득했다. 보통 박물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팸플릿은 상설전을 관람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한 장 집어 들긴 하는데 내용이 알찬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이곳의 팸플릿은 전체 전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각 전시실이 어떤 흐름을 갖고 배치되어 있는지, 중요한 유물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입장하기 전에 별생각 없이 펼쳤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정독하고 박물관에 들어갔다.

미노아 문명은 청동기 시대에 번성했던 문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라고 하면 멀리 잡아도 기원전 1500년 정도인데 반해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이전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었다. 출토된 일부 유물들은 무려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유물들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기원전 7000년이란 숫자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했다. 전시를 시기별로 하지 않고 주제별로 먼저 구성한 후 시대순으로 정리해 놓아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쉬웠다.

크레타 섬은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다. 왜 고대사 하면 그리스를 이야기하는지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나라도 청동기 문명을 갖고 있다. 자랑스러운 고조선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건 수준이 달랐다.

사실 그동안 서양 고대사는 단지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졌고, 모든 학문이 서양 중심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지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눈부신 고대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관심이 부족해서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노아 문명은 정말 눈부시게 훌륭했다. 특히 기원전 1800년에 사용된 프라이팬과 전골냄비를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 사용하는 것과 그 모양과 기능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미노아 문명의 상징인 선형문자B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후 선형문자B는 심지어 음절문자라고 했다. 이미 1950년대에 모든 음절에 대한 해독도 끝났다고 한다. 이 문자가 이후 그리스 문자로 발전한 것이다. 미노아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인류 문명의 유산이었다.

갑자기 인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다. 인류에 대한 자부심이라니. 너무 거창한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약 5000년 전의 인류가 음절문자를 사용하고 프라이팬에 요리를 하고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었다는 것을 몰랐다. 고대 인류는 그저 의식주 해결에 급급한 동물에 가까운 존재라 생각해 왔었다. 내가 얼마나 역사에 무지한지 알게 되었다. 인류는 정말 위대했다. 어떻게 불과 1만년 만에 지구를 완전히 정복한 종(種)이 됐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기원전 3000년에 음절문자를 사용하고 전골냄비에 요리를 하고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었다는 미노아 문명 ⓒ 한성은
기원전 16세기의 보석세공술이라 믿기 힘든 유물들과 크노소스 궁전 모형 ⓒ 한성은
박물관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한 시간쯤 앉아서 쉬었다가 다시 들어가서 또 서 있기 힘들 만큼 오래 걸어 다녔다. 알차고 뿌듯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이 모든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크노소스 궁전(Knossos Palace)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벌써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박물관을 나와서 뭉친 다리도 풀 겸 좀 걸어볼까 해서 베네치아 성채로 향했다. 베네치아 성채와 성곽은 크레타가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오스만튀르크와의 싸움을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10여 개의 보루를 성곽으로 이어서 헤라클리온 전체를 완전히 감쌌다고 했다. 그래서 시내 곳곳에 지금도 베네치아 성곽이 남아 있다. 자동차들은 성곽 아래로 다니고, 사람들은 성곽 위에서 산책을 즐겼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도 베네치아 성곽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문화재청이 나서서 서울성곽 복원계획을 세우고 계속해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구간은 복원이 완료되어 '서울성곽길'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혜화동에서 서울성곽에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참 좋다. 나는 헤라클리온에 있는 베네치아 성곽을 걷기 위해 크레타의 중세시대를 간략하게나마 찾아서 읽어보았다. 덕분에 지중해를 둘러싼 과거의 역사를 알게 됐다.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알리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능동적으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알게 한다면 좋을 것 같다.

한양은 600년간 한 나라의 수도였다. 우리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역량은 결코 서양의 것에 비하여 부족하지 않다. 잊히고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고 이어 나가는 일은 상징적 가치뿐만 아니라 훌륭한 관광 콘텐츠가 되어 경제적 가치도 발생시킬 것이다.

박물관에서 바닷가에 있는 베네치아 성채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바닷바람을 쐬며 걷기에 딱 좋은 곳이다. 성채 내부도 들어가 볼 수 있는데 입장료도 있고 입장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내부를 보지는 못했다. 대신 성채에서 길게 이어지는 방파제 끝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방파제는 제법 길었다. 방파제 위에 올라가 걸을 수도 있는데 폭이 좋은 데다 별도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 없어서 혹시 바다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섬사람들이라 그런지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방파제 끝에 걸터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내 발끝이 찌릿찌릿했다.
베네치아 공국 시기에 만들어 진 성채와 성벽이 헤라클리온 전체를 감싸고 있다. ⓒ 한성은
베네치아 성채 뒤로 이어진 방파제는 시민들이 많이 찾는 산책 코스다. ⓒ 한성은
베네치아 성채에서 이어지는 방파제는 생각보다 길어서 천천히 걸으니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지만, 바람이 내리쬐는 햇볕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며 출발했던 걸음이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며 체력을 다 쏟는 트레킹이 되어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좋은 자리에 앉아서 우아하게 책이라도 읽어볼까 했지만, 햇볕을 피해 앉아서 쉴 만한 자리가 없었다. 물론 해변을 따라 멋진 우아하고 카페들이 이어져 있었지만 가게 앞 메뉴판에 적힌 가격표를 보고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크레타 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크노소스 궁전이다. 나 역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과 함께 크레타 섬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했다. 크노소스 궁전은 1년 내내 관광객들로 미어터지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궁전으로 갔다.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과 크노소스 궁전은 통합 입장권을 사면 같은 날짜가 아니어도 입장이 가능했다.

크노소스 궁전을 잘 몰라도 그리스 신화를 덕분에 이미 미로 궁전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미로 궁전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그를 죽이고 실을 이용하여 미로를 빠져나온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이 크노소스 궁전을 바탕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크노소스 궁전은 고대 왕궁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전이라고 한다. 미노아 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18세기부터 16세기까지라고 했는데 궁전이 조성된 시기를 생각하면 그 거대한 규모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기대를 잔뜩 하고 궁전 내부로 향했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인지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신화 속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궁전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 에반스가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불과 35년 만에 이 거대한 궁전의 발굴과 복원을 모두 마무리했다고 한다. 당시 유적 발굴과 복원 기술이 현재와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에 35년은 그리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단다. 직접 눈으로 봐도 허술하게 복원해 놓은 벽화들이 많았다. 물론 진품들은 모두 박물관에 있으니 그곳에서 보면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크노소스 궁전 ⓒ 한성은
크노소스 궁전의 하수 시설과 왕의 방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특히 눈길을 끌었다. ⓒ 한성은
그래서인지 궁전처럼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1000개가 넘은 방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직접 걸으며 봐도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물관에서 보았던 복원 모형이 더 감동적이었다. 수많은 방 중에서 '왕의 방'이 다행히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성수기에 관광객들이 몰리면 이 왕의 방을 보기 위해서 긴 줄을 서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방이라지만 특별한 것도 없었다. 왕의 방에 있는 고래가 그려진 벽화는 카잔차키스의 작품에도 등장하는데 아는 것이 없어서 특별히 보이는 것도 없었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왕의 방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2m가 훨씬 넘는 거대한 항아리들이었다. 곡식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렇게 큰 항아리를 실제로 사용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 역사에서는 민무늬 토기도 겨우 청동기나 초기 철기 시대까지 가야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데, 대체 이렇게 큰 항아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손잡이가 여러 개 붙어 있기는 했지만, 딱히 운반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키가 훨씬 컸거나, 힘이 무진장 셌나? 혼자 감탄하며 질문을 만들어 갔지만,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저 큰 항아리를 어떻게 만들고 사용했을까? ⓒ 한성은
영어를 잘했더라면 꼭 이용하고 싶었던 크노소스 궁전 가이드 ⓒ 한성은
그래서인지 크노소스 궁전 입구에는 영어로 가이드를 해주는 유료 프로그램이 있었다.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이기도 하고 몇 명이 모이면 가격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유료 가이드를 해볼까 싶었는데, 영어 가이드를 하면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나올 텐데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싶어 미리 포기했었다. 이것저것 질문도 많이 하고 싶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면 끝나고 더 속상할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누군가 세계 일주를 준비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가장 먼저 영어 공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여행이 힘든 것은 아니다. 어차피 여행 중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돈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돈만 있으면 불편한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필요 없지만, 역사와 문화 앞에서는 딱 아는 만큼만 보인다. 여행하는 중에 아는 것이 없어서 보이는 것이 없는 속상한 순간들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 참 슬펐다. 그리스 여행을 마치면 몰타에서 2개월간 짧게나마 어학연수를 하려고 계획을 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마지막 목적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으로 향했다. 그런데 올 때와 버스 요금이 달랐다. 올 때는 1.7유로였는데 버스 기사는 2.5유로를 달라고 했다. '외국인이라고 더 받나?'싶었다. 버스 기사와 승강이를 벌일 수도 없고 그냥 달라는 대로 주고 버스표를 받았다. 버스에 타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내에 있는 티켓 자판기에서 버스표를 사는 가격과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 기사에게 사는 가격이 달랐던 것이다. 버스 안에는 친절하게 두 가지 요금이 각각 적혀 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항상 느끼게 되는 '사람의 노동 가치'인 것 같았다. 무려 1유로 가까이 비싼 버스비 때문에 좀 억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람값이 제일 싸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참 맞는 말 같다. 가난한 여행자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지만, 사람의 노동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그들이 부러웠다. 아무튼, 이후로는 타야 할 버스를 그냥 보내더라도 꼭 자판기에 가서 티켓을 사서 버스를 탔다.
어디에서 버스 티켓을 사느냐에 따라 같은 거리라도 요금이 달라진다. ⓒ 한성은
시내에 내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아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구글맵에도 잘 나와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덤이 성곽 위에 있는 것을 몰라서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만 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표지판을 찾아 걸어가니 성곽 위에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 서니 헤라클리온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사는 동안 자신의 신념을 따라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불교 사상에 심취했고, 정계에 진출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백혈병으로 독일에서 숨을 거둔 카잔차키스의 시신은 아테네로 이송되었지만, 그의 작품 <최후의 유혹>이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렸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오르는 등 그리스 정교회와의 갈등 때문에 결국 헤라클리온으로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스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으며 다녔었다. 그의 묘비명은 아마 여행을 꿈꾸거나 여행길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문장일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곧 내 삶이 오롯하게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 아닐까.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들마저 내려놓고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의 끝은 곧 행복의 끝이 된다. 여행의 끝이 다시 고통스러운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면, 여행이란 그저 현실 도피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동안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일상 속에서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잠깐 길을 벗어나 보니 '내가 그렇게 살았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 정말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뭘까? 아직은 질문만 가지고 있고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갈증 속에서 늘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되돌아가도 내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세계 일주 배낭여행이 신비의 묘약은 아니다. 아마 다시 직장을 구해서 월급을 받으며 살 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고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때 내 삶을 오롯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힘은 돈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산책을 나온 동네 사람들도 많았다. 헤라클리온에 있는 국제공항 이름이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크레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무덤에 앉아서 내 마음도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더 가벼워져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직은 배낭 무게도 줄이지 못해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수하물 무게를 초과할까봐 조마조마하지만, 앞으로 조금씩 가벼워지지 않을까.
힘들게 찾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곁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 한성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배낭여행, #세계일주, #크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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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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