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스물네 번째로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김조광수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25일 부산국제영화제 총회에 참석한 영화계 인사들. 좌측부터 영화단체연대회의 이춘연 대표,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 김조광수 감독, 방은진 감독, 유지태 배우 등

지난 2월 25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총회에 참석한 영화계 인사들. 좌측부터 영화단체연대회의 이춘연 대표,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 김조광수 감독, 방은진 감독, 유지태 배우. ⓒ 성하훈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으로 지긋지긋하던 군사독재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더불어 저의 학생운동 10년도 끝을 보았습니다. 학생운동의 마지막을 민주정부와 함께 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영삼은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아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무늬만 문민정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 국민들에게 화답하듯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같은 개혁적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내란죄로 구속하면서 자신이 군사독재의 후예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려 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영화계에 불어온 봄바람

군사독재가 사라지면서 한국영화계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사람들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볼만한 영화가 많아지면서 관객들도 늘어났고 더 새로운 영화, 더 다양한 영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학교를 떠나 영화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후배들이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영화제작소 청년'이라는 독립영화단체에 발을 들였습니다. 주말에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돈을 모아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꿈을 키워갔습니다. 배고픈 나날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영화제작을 한다는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1996년, 외국에서 열리던 국제영화제에 가 본 사람이 국내에 채 100명도 안 되던 그 시절에 대한민국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렸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첫해부터 대성공이었습니다. 한국 영화인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영화인들도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부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외국 영화인들은 자기 영화를 보러 몰려온 관객들에 둘러싸여 함박웃음을 지었고 항구도시 부산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흥분한 건 영화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 있던 관객들도 열광했습니다. 수백편의 영화들이 한꺼번에 극장에 걸렸고, 그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잡지에서나 보던 국제영화제에 직접 참여해본 관객들은 새로운 영화 세상을 만끽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한계가 있었지만, 문민정부였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동성애 커플.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한 장면.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상영 당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 청년필름


저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첫해에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줄 서서 표를 예매하고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루에 서너 편은 기본이었죠. 밥을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밥보다 영화가 먼저였습니다. 부산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죠. 첫해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을 키웠습니다. 언젠가 제가 제작한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을요.

부산국제영화제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의 노력에 정부와 부산시,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뜻을 모아 지원하고 응원한 결과였습니다. 대통령이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는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그 원칙은 영화제를 키워내는 바탕 되었습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행복했으며, 부산 시민들은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해피 투게더>, <크래쉬> 같은 영화들이 검열 문제로 한정 상영되기도 했고, 북한 영화를 상영할 때도 비슷한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협의를 통해 해결점을 찾았고, 영화제의 심의 조항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문제'를 협의를 통해 해결해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산국제영화제는 국내외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2002년, 저에게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청년필름이 제작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것입니다. 영화 일을 시작한지 10년 만이었습니다. 게다가 영화제는 뉴커런츠상까지 안겨주었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10년을 달려 온 저와 청년필름 식구들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습니다. 자기 색깔이 분명했지만 상업적인 흥행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던 영화들을 만들어왔던 우리들에게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영화를 만들라"는 지지였습니다.

그 뒤로 <귀여워>, <후회하지 않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은하해방전선> 등 많은 영화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또 우리는, 큰 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저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었습니다. 감독이 되어보겠다고 만든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것입니다. 관객으로 시작된 인연이 제작자로 또 감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감독의 꿈을 응원해준 부산국제영화제 덕분에 단편을 또 연출할 수 있었고, 장편 데뷔작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던 부산국제영화제와 저의 인연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2014년에 시작된 일입니다.

먹구름

 24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감독들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장엔 김동원, 김조광수, 박석영, 이송희일, 부지영, 이수진 감독 등이 자리했다. 총 148명의 영화 감독들이 부산영화제를 지키고 싶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지난 3월 24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감독들이 기자회견을 가졌을 당시 사진. 현장엔 김동원, 김조광수, 박석영, 이송희일, 부지영, 이수진 감독 등이 자리했다. 총 148명의 영화 감독들이 부산영화제를 지키고 싶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 성하훈


영화 <다이빙 벨>을 상영하지 말라는 압력에서 출발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지원 예산을 줄이더니 결국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고발, 해임(재위촉하지 않은 형식이었지만 명백한 해임입니다)하고 여전히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은 무너졌습니다. 오히려 "지원한 만큼 간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만들어진 1996년보다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저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1996년 첫 해부터 2015년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관객으로 제작자로 감독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여해 왔는데, 올해는 못 가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예산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내 것처럼 좌지우지 하려는 박근혜 정부와 부산시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저는, 우리 영화인들은, 부산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누구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사랑하는 저와 영화인들은 참담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제 영화 인생을 받쳐준 건 부산국제영화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작한 영화 11편과 감독한 영화 3편(단편 2편 포함)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관객들로부터 받은 질타와 응원이 큰 힘이 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쳐 해외 여러 나라의 관객들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부산국제영화제인데, 올해엔 그곳에 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던 국민들이 1996년에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해주었듯, 2016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96년에 문민정부가 있었다면 2016년에는 여소야대 국회가 있으니까요! 아직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김조광수 감독은 누구?

김조광수 감독은 영화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단편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감독 데뷔했고, <와니와 준하>(2001) <질투는 나의 힘>(2002) <조선명탐정> 시리즈까지 다양한 문제작과 상업영화를 두루 제작해왔다.

그가 연출한 단편 <친구사이?>, 옴니버스영화 <환상기담 묘>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역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⑪ 김진도] 부산 뒷골목, 노숙자 같은 남자가 세계적 거장이었다
[⑫ 김진황] BIFF에 대한 믿음, 흔들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⑬ 서은영] 자부산심 : 우리는 부산을 가졌다는 자부심
[⑭ 김태용] 해외영화인들이 계속 묻는다 "BIFF는 괜찮아요?"
[⑮ 홍석재] 영화제는 꿈! 꿈은 결코 당신 마음대로 꿀 수 없다

[16 정윤석] 서병수 시장님, 성수대교 참사 유가족이 제게 묻더군요
[17 민용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나무를 기어코 베려 한다면
[18 김동명] 거짓말 같은... 결단코, 부산국제영화제
[19 이용승] 정치야, 축제에서 꺼져주면 안될까?
[20 김진열] 평범한 시민들이 BIFF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21 안선경]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미 이겼습니다
[22 김용조] 서 시장님, 전 자격 없는 영화인인가요
[23 양익준] 씨발 진짜... 욕을 빼고 글을 쓸 수가 없다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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