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형제의 밤> 포스터 (연출 : 조선형 / 작가 : 김봉민 / 출연 : 김중기, 권요한, 정성일, 유용, 이종현, 이상홍, 권오율, 이원철 / 극장 : 세우아트센터 / 제작 : 으랏차차스토리)

▲ 연극 <형제의 밤> 포스터 (연출 : 조선형 / 작가 : 김봉민 / 출연 : 김중기, 권요한, 정성일, 유용, 이종현, 이상홍, 권오율, 이원철 / 극장 : 세우아트센터 / 제작 : 으랏차차스토리) ⓒ 으랏차차스토리


19세기 말 미국 사교계의 명사였던 워드 매칼리스터는 뉴욕 무도회장에 자주 나타나는 저명인사 400명의 명단을 정리해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뉴욕시에서 알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여기 400명뿐이지"

이 말을 들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작가 오 헨리의 본명)가 답하길 "뉴욕에서 알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400명이 아니라 400만 명이라네"라고 했다.

대학로 세우 아트센터에서 지난 4월 1일부터 공연되고 있는 연극 <형제의 밤>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형제의 밤'이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연극은 어느 형제의 하룻밤 이야기를 다뤘다. 1시간 반의 공연시간 동안 출연하는 배우는 단 두 명이다. 이야기도 몇 시간의 내용이 고작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적인 내용도 적지 않지만 세상만사가 늘 그렇듯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것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워드 매칼리스터가 이 연극을 봤다면 '쓸데없는 연극 한 편을 봤다'고 했을 게 틀림없다. 이 작품에선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인물이나 인기스타가 등장하지 않고 숭고한 주제의식이나 특출난 연출적 기법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갈등으로부터 희망과 화해로 변해가는 한 편의 드라마가 두 배우의 연기 위에 펼쳐지지만 그 내용은 세상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인간사 희로애락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의미 있는 건 이 도시에서 오직 400명의 인간만 가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뉴욕에 살던 400만 명의 시민들에겐 400만 개의 이야기가 있었고 오 헨리는 이 모두에게서 나름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지금 서울엔 적어도 1000만 개가 넘는 가치 있는 이야기가 있을 테고 <형제의 밤>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그중 하나일 게 분명하다.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특별한 하룻밤

 연극 <형제의 밤> 출연 배우들은 2인 1팀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 <형제의 밤> 출연 배우들은 2인 1팀으로 무대에 올랐다. ⓒ 으랏차차스토리


연소와 수동은 재혼가정의 배다른 형제다. 고등학교 때 만나 13년을 함께 살았지만 좀처럼 서로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아 온 이들이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연극의 주요한 줄기다. 극은 부모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지금껏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또 한 명의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맺는다. 대단할 것 없지만, 우리 안에 내재한 깊은 감정을 끌어올려 확인할 수 있는 감동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핀란드로 생애 첫 여행을 떠나려던 부모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 하늘 아래 둘만 남겨진 연소와 수동이지만 둘을 잇던 부모라는 유일한 끈이 사라지자 관계는 파행으로 치닫는다.

부모님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수동은 집을 팔고 돈을 나누자고 요구했고 연소는 남겨진 빚이 있으니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맞선다. 연소는 수동에게 "어머니 시체 팔아 재테크 하냐"고 화를 내고 수동은 연소에게 "네가 운전한 차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상처가 벌어질수록 형제는 멀어진다.

어머니의 그림과 아버지의 우산을 두고도 다툼을 벌이던 형제는 점차 부모님이 남긴 비밀에 다가선다. 연극은 이 과정을 결코 무겁지 않은 한 편의 소동극으로 꾸몄다. 재치 있는 대사와 슬랩스틱코미디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힘이다. 웃음의 역치가 높은 관객들에게조차 비교적 높은 성공률로 다가설 법한 유머가 작품 곳곳에 배치돼 있고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안정적인 드라마가 뒤를 받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7번째 공연의 주역으로 낙점된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는 관객으로부터 웃음과 감동을 끌어내기 충분할 듯하다.

2013년 초연된 이래 벌써 7번째 정식 공연이지만 무대는 단출하기 짝이 없다.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은 형제가 사는 집 하나가 전부다. 들어선 소품 역시 문과 창틀, 소파와 의자 몇 개 정도가 고작이다. 두 명의 배우가 한 시간 반 동안 제한된 소품을 활용해 펼치는 이야기지만 시종일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장난과 몸싸움에 관객은 지루할 줄 모른다.

부모의 죽음과 유산 분할, 갈라진 형제와 남겨진 비밀까지. 극단 으랏차차스토리의 연극 <형제의 밤>은 형제를 둘러싼 무거운 문제들을 유쾌하게 풀어가는 연극이다.

6월 19일까지 대학로 세우아트센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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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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