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사람들이 '맥도날드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70대 할머니 한 분이 새벽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고 해가 뜨기 전에 자리를 뜬다는 이야기였다. 다음 날, 그 다음 날 새벽에도 할머니는 어김없이 패스트푸드에 출근도장을 찍었다고 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하나둘씩 맥도날드 할머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맥도날드 할머니' 관찰기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탔고, 어느새 방송과 신문에 오르내렸다. 매체들은 할머니의 일관된 행동을 '기행'으로 소개했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패스트푸드 가게에 70대 할머니가 매일 찾아온다는 것 자체를 기행으로 삼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꽤 흘러, 할머니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쯤, 안타깝게도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멋들어진 트렌치코트 차림에 영자신문과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여유롭게 세월을 보내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인지 갑작스런 그의 부고 소식이 믿기지 않았다.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명했고, 외로워보였던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지켜준 한 친구를 소개했다. 그 친구는 할머니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아닌 27살의 외국인 스테파니였다.

세대를 뛰어 넘는 그들의 우정.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방송을 통해 본 맥도날드 할머니와 스테파니였을만큼 두 이야기는 여러 모로 닮아 있었다. 영화 속 제인과 세이디처럼 맥도날드 할머니와 스테파니도 아주 우연한 만남을 통해 가까워졌던 것은 아닌지. 제인과 세이디만큼이나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보온병 하나로 맺은 인연, 60년 초월한 우정으로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영화 <스타렛>의 두 주인공, 베세드카 존슨과 드리 헤밍웨이(왼쪽부터)

▲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영화 <스타렛>의 두 주인공, 베세드카 존슨과 드리 헤밍웨이(왼쪽부터) ⓒ MUSIC BOX FILMS


건조한 일상. 제인(드리 헤밍웨이 분)은 방 분위기라도 바꾸기 위해 애완견 스타렛과 함께 자신의 방을 꾸밀 소품을 구하러 집 근처 벼룩시장을 찾는다. 이런저런 물건을 구입하다가 유골함인 듯, 꽃병인 듯 보이는 물건 하나를 발견한 제인. 주인에게 가격을 묻는다.

주인 세이디(베세드카 존슨 분)는 일단 그 물건이 유골함도, 꽃병도 아니라고 한다. 알고 보니 그것은 보온병이었다. 가격은 단돈 1달러. 환불은 절대 안 된다고 한다. 제인은 꽃병으로 쓸 보온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인은 꽃병으로 쓸 보온병을 씻던 중 그 속에서 돈 뭉치 여러 개를 발견한다. 약 1만 달러가량의 지폐. 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보온병을 돌려 줄 요량으로 세이디를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이후 괜한 죄책감을 느껴 세이디의 주변을 맴돈다. 둘은 그렇게 점차 가까워진다.

영화는 제인과 세이디의 만남을 돈이 든 보온병 하나로 주선한다. 세이디가 강제로 열 수 밖에 없었던 벼룩시장. 제인이 문득 방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니 생각은 했는데 차를 몰고 시장으로 가지 않았다면. 둘은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반대의 가정을 생각해봤을 때 둘의 사소한 인연이 끝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경이로운 느낌마저 든다.

20대 청춘과 80대 노파의 만남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성향, 직업, 놀이 문화 어느 것 하나도 닮아있지 않은 둘이 가까워지는 방법은 서로의 관심사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주는 일이다. 그 시작은 제인이 열었다. 처음에 제인은 자신이 노파의 돈을 가지고 있다는 죄책감에 여러 번의 우연을 가장해 그의 집을 맴돈다. 제인은 그렇게 세이디의 행동 반경이 마트와 교회가 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편, 세이디는 이런 제인의 행동이 마냥 달가울 수 없다. 불편하고 성가시다. 그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사람과의 교류가 익숙지 않은 세월을 오래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부여된 전사를 보자. 그녀는 오래전 남편과 사별했다. 그 이후 친인척 혹은 이웃과 별다른 왕래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낙은 마트에서 장보기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빙고게임을 즐기는 것이 전부다. 빙고게임, 철저히 혼자서 할 수 있는 게임이다. 다른 사람과의 협력이 필요치 않다. 자연히 그는 사람과 교류할 필요가 없다.

추측하건대 그가 사람과 잘 교류하지 않는 이유는 그 주변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기 때문일 거다. 80세를 넘게 살아가면서 그는 많은 죽음과 이별을 목격했을 것이다. 제인이 세이디에게 자신의 애완견 스타렛을 처음 맡겼을 때, 세이디는 스타렛을 잘 돌보다 스타렛이 사라지자 사방을 헤매며 찾아다닌다. 그리고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80대의 노파가 잠시 맡고 있던 강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는 세이디가 안고 살아온 지난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면이다. 그녀는 잠시라도 자신과 온기를 나누었던 어떤 것들이 사라진다는 데에 강한 두려움을 느낀다. 마트 주차장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기로 한 제인이 잠시 나타나지 않았을 때 세이디가 혼란스러워하던 장면. 기다려야 할 택시가 사라지고 없을 때 당황해하던 장면 모두 그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기능하고 있다.

그가 가진 두려움은 반대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이야기한다. 세이디가 처음 제인의 거듭된 호의에 의심을 품었던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그가 남편과 사별 후 다른 어떤 누구와도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반대로 누군가의 노크에 거부감과 경계심이 생겼다. 세이디가 제인을 바라보는 장면들. 그의 눈빛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게 묻어난다.

하지만 제인은 세이디와 반대다. 그는 사람과의 교류와 스킨십에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그는 세이디보다 젊다. 주위 사람의 죽음, 이별에 대한 경험이 적어 두려움이 없다. 두 번째로 그는 애완견 스타렛을 정성으로 키울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애정을 쏟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그의 직업이 설명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두 사람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20일 개봉한 영화 <스타렛>의 한 장면. ⓒ MUSIC BOX FILMS


제인과 세이디의 관계 변화를 드러내는 데 스타렛이 요긴하게 쓰인다. 처음 제인과 세이디가 마주 앉아 있는 장면을 보자. 둘의 대화는 툭툭 끊긴다. 세이디는 제인이 자신의 집에서 빨리 나갔으면 좋겠고, 제인은 이 상황이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앵글은 두 인물로 꽉 차 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제인 옆에 늘어지게 자고 있는 스타렛이 보인다. 스타렛이 둘의 관계가 지루하고 어색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차례 이들이 싸웠을 때, 스타렛은 집안을 어지럽혔다. 제인이 숨겨뒀던 돈의 출처가 친구 멜리사에게 드러났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제인과 세이디가 가까워졌을 때, 야외에 앉아 있는 이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고 자세는 편안해졌다. 앵글은 저만치 빠져 풍광 속에 인물을 놓는다. 이들 주변에 스타렛과 동네 강아지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강아지들의 어울림이 제인과 세이디가 서로의 곁을 내줄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그 소중함에 대해서 말한다. 사람 안의 상처애는 사람이 유일한 치료법이 될 수 있다는 익숙한 진실을 영화는 제인과 세이디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제인이 처음 세이디를 찾아갔을 때는 죄책감이 행동의 근거가 됐겠지만, 이후 그는 진정으로 세이디의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 세이디 역시 마찬가지. 멜리사의 이간질로 잠시 제인의 진심을 의심했지만, 이내 제인과 함께 파리로 떠날 여행 채비를 서두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제인은 끝까지 자신의 직업을 세이디에게 숨겼지만, 세이디는 자신의 비밀 하나를 슬쩍 제인에게 꺼내놓았다. 처음 모습과 달라진 둘. 처음에는 제인이 다가갔지만, 이제 세이디가 제인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서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인연이 지속되는 비밀은 이와 같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이해하며, 자신의 속을 보일 때 우리는 보온병 하나로 시작된 인연도 길게 가져갈 수 있다. 영화 <스타렛>은 그렇게 우리에게 '인연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션 베이커 드리 헤밍웨이 베세드카 존슨 스타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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