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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을 지나 여름 바람도 섞여 부는 주말 오후, 남편에게 온 문자가 급하다.

"한 시 반."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한시 반까지 병원 앞에 와서 당직실에 쌓아 놓은 빨래감을 수거하고 집에서 속옷과 양말을 공수해 달라는 이야기다. 그 시간에 환자 상태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근 한 달 만에 함께 식사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물론 그 사이에 전화가 오면 먹던 밥숟갈 내려놓고 당장 뛰어 올라가야 하겠지만.

의사와 결혼한 나의 신혼생활 "글쎄요..."

당신의 주치의는 어젯밤 어디에서 얼만큼 수면을 취했을까요?
 당신의 주치의는 어젯밤 어디에서 얼만큼 수면을 취했을까요?
ⓒ taken from aa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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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남친에서 남편이 된 그는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레지던트(전공의) 1년차다. 결혼한 직후에 그는 '인턴'이었고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3월, 레지던트가 되자 으레 그러하듯 병원은 3월과 4월 풀당(Full 당직)을 명령했고 병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더욱이 풀당이 풀린 5월 그의 일정은 병동 주치의. 역시 병원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한 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도대체 답을 하기가 민망한 것은 그래서다. "신혼생활은 좀 어때요?"라는 흔한 질문에 나는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글쎄요, 결혼 하고 나서 열 번을 채 못 만나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달까요." 그 몇 번의 만남도 흔히 생각하는 '신혼생활'을 구성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새벽 두시 반에 병원 앞에 차를 대 놓고 30분을 기다려서 만난다든가, 24시간 근무하고 아침에 퇴근해 저녁 10시까지 잠들어 있는 남편을 관찰한다든가, 하여튼 그리 낭만적이지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하기사 레지던트와 결혼했다면 이런 상황은 현실상 당연하다(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전공의들의 상황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애초에 레지던트(Resident)라는 용어 자체가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나가지 않고 환자를 본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전문의 제도가 확립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미국의 수련제도의 성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40~1950년대 미국에서 레지던트들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일주일에 100~150시간을 일하는 레지던트들의 업무 능력이 떨어지고 실수가 잦아 의료의 질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레지던트가 병원 밖으로 휴식을 취하러 나갈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기간이 걸렸다.

환자가 죽어서야 알게 된 의사들의 살인적인 근무시간

실질적으로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이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84년  리비 지온(Libby Zion)이라는 대학 신입생이 뉴욕 병원(New York hospital)의 응급실에서 레지던트와 인턴에게 진료를 받고 사망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변호사였던 리비의 아버지는 딸의 사망 책임을 의사들에게 돌리면서 이를 '살인사건'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회의 관심을 받게 된 이 사건에서 뉴욕 시민들은 당시 병원의 의사들이 36시간씩 근무를 한다는 데 경악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인턴과 레지던트는 리비를 진료하자마자 다른 환자들을 보러 뛰어다녀야 했으며 이런 열악한 근무환경이 의료의 질에 현저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1989년 뉴욕시에서는 벨 위원회(Bell commission)의 제언에 따라 레지던트의 일주일 근무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연속 근무시간을 24시간으로 제한하도록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다. 어린 의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유지할 수 있는 대형병원들이 불쌍한 전공의들을 위해 더 많은 인력을 고용했을까? 많은 반론이 제시되었고 특히 이런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비용의 거대함을 성토하는 연구들이 줄을 이었다. 많은 병원들에서 이런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세상은 좋아지기 마련인 걸까. 미국수련평가위원회(ACGME)는 2003년 모든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에서 주당 근무시간을 80시간 이내로, 또 연속근무는 24시간으로 제한했다. 또 콜당직(in-house call 집에서 당직 전화를 받고 필요한 경우 병원에 가야 하는 당직)은 3일에 1번 이하로 제한하며 근무시간 사이에 적어도 10시간의 휴식을 줄 것, 7일 중 적어도 하루는 쉴 수 있게 할 것 등을 강제했다. 물론 이것은 최대 근무시간에 대한 제약이다. 지금 뉴욕에서 응급의학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는 나의 친구는 3일에 한 번 24시간을 근무하며, 나머지 시간은 공부와 연구 그리고 연애(?)에 쓰는 삶을 살고 있다.

복지부의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방침,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2013.4.26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2013.4.26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 보건복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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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전공의 수련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방침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복지부는 2014년부터 시행되는 주간 근무시간 80시간과 연속근무시간 36시간 제한 등의 안을 내 놓았다.

세 달째 집에서 만날 수 없는 남편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리고 인턴시절 받았던 고작 3일의 연가를 떠올려 보았을 때 이런 공식적인 복지부의 방침은 환영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불쌍한 우리 후배들(의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으로 연배까지 높은 우리 후배님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특히 이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과로사하는 전공의에 대한 소문은 좀 줄어들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럼 내년부터는 집에서 남편 얼굴을 좀 볼 수 있는 걸까? 반색을 해야하는데 그리 기쁘지가 않은 것은 이것이 얼마나 가능할지 여전히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막판까지 전공의협의회가 반발을 했던 것은 복지부가 제시한 위의 규정을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제안대로라면 병원이 위 규정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방침은 병원 수련현황을 분기마다 분석해 준수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전공의 정원 배정에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누군가가 주의깊게 고려해서 제안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악랄하다. 바쁘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병원에서 위의 사항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전공의들 본인이다.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규정이 위반되고 있음을 신고하여 병원의 수련 현황을 알려 전공의 정원 배정에 반영한다 함은 즉 아래 연차 전공의가 들어오지 않거나, 그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전공의 수가 줄어든다고 환자가 덜 오거나 수술을 덜 할까? 안 그래도 환자 쏠림 현상으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대형병원들이 전공의 수련 현황에 맞춰서 업무를 조절해줄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열악한 수련 환경을 보고하는 것은 자기살 깎기에 불과하다. 즉 같은 일을 더 적은 인력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며 심지어는 규정에 맞추기 위해 더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업무를 수행해야 할지도 모른다(어떻게 이것이 가능해질지는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만약 복지부의 규정이 그대로 잘 지켜지고, 전공의들은 행복하게도 주 80시간 근무를 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현실적으로 병원들이 이를 위해 새로운 인력을 고용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현재까지 그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럼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누구일까?

바로 환자이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업무를 수행하는 전공의들이 아무리 고생스럽다고 하더라도 사실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체계 내에서 병원이 보게 되는 손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처방과 더 많은 진료는 병원에 더 큰 수익을 가져다 준다. 반면 한 의사가 진료해야 할 환자 수가 늘어나는 만큼 환자는 의사 얼굴 보기가 어려워 진다.

서두르는 진료와 짜증섞인 설명은 환자와 보호자들을 화나게 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키운다. 리비 지온은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리비들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어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업무 부담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업무시간만을 규제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공의 정원 배정과 연결짓는 것은 환자에게 미칠 위험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혹은 무관심한) 방침이다.

기술적으로 하자 없는 의사 양산하는 전공의 수련 과정
과도한 업무부담이 전공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대체로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사회적인 인식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나라 의사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일하는,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전공의들의 과도한 노동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다.

전문의를 따고 나면 받게 되는 금전적인 보상이 수련기간 동안의 고된 일과를 보상받는 셈이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들이 이후 받게 될 금전적인 성취에 대한 대가로 젊은 시절의 가혹한 착취를 견뎌내겠다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고려해야 할 점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의사들은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밟는다. 환자 70명의 주치의를 하는 의사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성실하고 친절하기 어렵다. 한 사람 당 2분씩만 이야기를 나눠도 140분, 소위 모범생 콤플렉스 혹은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그녀는 절망에 빠진다.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교수님에게도, 심지어는 그녀 자신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은 모범생이었던 그녀를 비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만든다.

어떻게든 잘 해 보려하지만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비난받는 상황을 겪어나가면서 성격이, 또 행동이 변해간다. 웃음과 공감은 최소한의 여유가 있을 때 길러질 수 있는 성질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전공의 수련 과정은 비인간적이지만 기술적으로 하자가 없는 의사를 양산해나가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은 어딘가에서 노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목받지 못하던 전공의 수련 환경에 대해 보건복지부가 보도자료를 내게 된 것이 어디인가. 게다가 전공의 협의회에서 조직하고 있는 '전공의 노조'에 대한 기대도 빠질 수 없다.

미국에서도 벨 위원회가 제안을 한 1989년부터 전국적인 수련프로그램을 관장하는 ACGME가 공식적으로 근무시간을 강제하는 2003년에 이르기까지 14년이나 걸렸다. 그렇다면 보건복지부의 공식 제안이 나온 것이 2013년(물론 미국의 1980년대 수준의 제안이지만), 뭐든 빨리빨리 해내는 우리나라이니 14년보다는 조금 더 당길 수 있지 않을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신혼 기분 좀 냅시다

그래도 의사들의 로망은 남아 있다
 그래도 의사들의 로망은 남아 있다
ⓒ Fox.com, grey's anat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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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남편이 병원에 잡혀있는 지금 당장, 규정대로 해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불쌍한 우리 남편, 그레이스 아나토미 사진에서처럼 수술복만 입고 다녀서 빨래할 것이 속옷과 양말 뿐이라는 건 정말 편하지만 퇴근 좀 시켜주세요.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신혼 기분 좀 내어 봅시다,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이 사람 잠 좀 재워 주세요. 이런 소망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다행스럽게도 병원 앞 국밥집에 앉아 후루룩 점심을 먹는 사이 병동의 환자 상태가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밥 다 먹어갈 때즈음 환자의 ABGA(동맥혈가스 분석) 결과를 다시 체크하라는 윗년차의 전화가 오기는 했지만. 가벼워진 내 옷차림에 "봄이 왔어?"를 묻는 남편이 안타깝다.

날씨도 뉴스도 모르고 다만 오늘 새로온 환자가 몇 명이고 내 환자 검사 결과가 뭐였는지만 기억하며 살아가는 4년의 레지던트 생활 동안 그가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네 시간이나 잤다며 싱글싱글 웃으면서 병원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응원을 날린다. 그래, 성격 버리지 말고 힘내시게나, 닥터 송. 당신의 로망은 내가 기억해두고 있을게.

참고문헌
1. BELL COMMISSION REQUIREMENTS: DOCTORS OR FACTORY WORKERS?* ; R. GORDON DOUGLAS, JR. and (by invitation) JOSEPH G. HAYES,**
RICHARD B. ROBERTS, and CHARLES L. BARDES
2. en. Wikipedia.org 검색어 Libby Zion law, Medical Resident work hours
3. 보건복지부 보도참고자료, 전공의 수련환경 주당 80시간 추진



태그:#전공의, #수련규정, #내남편을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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