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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들의 공간, 화랑대 캠퍼스

육사 교정의 호국비
 육사 교정의 호국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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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신도비를 보고 우리는 연병장을 돌아 육사 화랑대 캠퍼스 쪽으로 간다. 그쪽은 육사 생도들의 교육공간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 쓰인 호국비(돌기둥)이다. 육사 창설 30주년인 1976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라고 한다. 그 뒤에는 당시 육사교장이던 정승화 중장의 건립문이 있다.

"사관생도는 겨레의 꽃이며 자라나는 나라의 간성이다. 무릇 군인의 충의는 국운을 좌우하는 근원이니 세찬 의기로써 정도를 밝히고 뜨거운 충절로써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 끊임없는 수련과 정진은 오로지 이 본분을 다하기 위함이니 사관생도는 덕성과 지성을 함양하고 의지와 체력을 연마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몸바침은 군인의 길이며 정신적 지표이기에 […] 화랑대의 실천적 좌우명으로 삼는다."

건립문
 건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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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건립문의 마지막에 새긴 '육군 중장 정승화 씀' 부분이 좀 이상하다. 고친 흔적이 있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다. 1980년 12․12사태 이후 계엄사령관이었다 체포된 정승화 대장의 이름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국보위에서 정승화라는 이름을 지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이 끝나고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정승화라는 이름을 다시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문제가 되는 것은 늘 정치성과 당파성이다.

호국비를 지나면 서쪽으로 학교 건물들이 있고, 그 앞 동쪽으로 화랑대 연병장이 펼쳐진다. 연병장의 서쪽 가운데에 연단 형식의 사열대 건물이 있다.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이다. 이곳 안에는 화랑대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서예가 손재형이 1966년 가을에 쓴 것이다. 아주 특이한 필체다. 또 건물 벽에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모사되어 있다. 수렵도가 인상적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연병장 건물: 사열대
 팔작지붕 형태의 연병장 건물: 사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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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을 따라 길은 북쪽으로 이어진다. 길 왼쪽으로 말을 탄 화랑 동상을 볼 수 있다. 육사생도들이 신라시대 화랑을 그 모범으로 삼고 있어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병장 주변으로는 고사포, 헬기, 프로펠러기, 탱크 등 주로 6․25사변 때 사용되었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60년 전의 것들로 한 시대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육사 생도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4년 동안 교육을 받고, 겨레의 꽃, 나라의 간성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폐쇄된 화랑대역

육사를 나온 다음 우리는 폐쇄된 철로를 따라 경춘선 화랑대역으로 간다. 화랑대역은 경춘선이 복선화, 직선화되면서 2010년 12월 20일 폐쇄되었다. 그래서 철로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경춘선 열차는 상봉역에서 출발한다. 경춘선 철도는 1939년 7월 25일 개통되었다. 화랑대역의 처음 이름은 태릉역이었다. 그러나 1958년 1월 육사의 다른 명칭인 화랑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폐쇄된 화랑대역
 폐쇄된 화랑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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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대역은 2006년 12월 등록문화재(제300호)가 되어 보호받고 있다. 그것은 서울시내에 위치한 근현대 간이역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간이역이 일자형 평면위에 십자형 박공지붕을 올려놓는 형태를 하고 있으나, 화랑대역은 비대칭 삼각형 구조의 박공지붕을 가지고 있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도 원래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화랑대역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려 사진과 영화의 촬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충숙 근린공원이 뭐지?

우리는 이제 충숙 근린공원으로 가야 한다. 화랑대역에서 그곳까지는 걸어서 4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그동안 벌써 꽤나 많이 걸었기 때문에, 걸을 것인지 아니면 교통기관을 이용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회원이 걷는 걸 힘들어 한다. 그래서 버스와 전철을 타고 하계역까지 가기로 한다. 하계역에서 내린 우리는 걸어서 충숙 근린공원으로 향한다.

충숙공 이상길 묘역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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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 근린공원은 조선 중기 문신인 이상길(李尙吉: 1556-1637)의 시호인 충숙(忠肅)을 따서 이름 붙여진 공원이다. 충숙 근린공원에는 이상길의 묘와 신도비, 벽진이씨 사당과 재실, 영정각 등이 있다. 우리는 먼저 재실인 동천재(東川齋)로 가보려고 한다. 그런데 문이 걸려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바로 묘역으로 들어가 홍살문 앞에 선다. 홍살문 위로 묘역이 펼쳐지고 홍살문 오른쪽에 신도비각이 있다.

나는 먼저 신도비를 들여다본다. 전액으로 '충신증의정부좌의정(忠臣贈議政府左議政)'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신도비에는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충(忠)으로 일관했던 이상길의 행적이 적혀 있다. 그의 신도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 때문이다.

이상길 신도비
 이상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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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고, 이에 분개한 이상길은 1637년 1월 26일 종묘와 사직에 절을 한 다음 목을 매 순절했다. 이에 인조는 정려(旌閭)와 충숙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좌의정에 추증했다. 신도비는 현종 2년(1661)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이조참판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송시열이 지은 명(銘)에 보면, 이상길은 순후한 성품 호방한 기품(質醇氣庬)에, 그 소신이 굳센 것(其執則剛)으로 나타나 있다. 신도비는 대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은 보편적인 형태다.

충숙공 이상길은 어떤 사람인가?

이상길과 그의 부인 경주이씨묘
 이상길과 그의 부인 경주이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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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를 보고 나서 이상길 묘로 올라간다. 묘는 쌍분으로 이상길과 그의 부인 경주이씨가 묻혀 있다. 묘 앞에는 문인석이 있다. 이상길은 자는 사우(士祐), 호는 만사(晩沙)·동천(東川), 본관은 벽진이다.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호조·병조·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하자 예조정랑이던 그는 함경도에 들어가 수복을 도모하자고 주청했다. 1597년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싸웠다. 그 뒤 그는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02년에는 정인홍(鄭仁弘) 일파의 모함을 당해 유배를 갔다. 그는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 유배에서 풀려나 회양부사를 지냈다. 그 후 안주목사, 호조참의 등을 거쳐 1617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618년 후금의 군사가 요동 지역을 점령하자, 명나라 모문룡(毛文龍)이 요동 백성을 이끌고 평안도 철산의 가도(椵島)로 들어왔다. 이상길은 왕명을 받들어 식량을 운송하여 그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그는 비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광해군과는 다른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길은 용천부사를 거쳐 1623년(인조 1년) 병조참의가 되었고, 모문룡 도독의 접반사 역할을 했다. 1624년에는 평안감사가 되었으며, 1625년에는 호조참판이 되었다. 1626년에도 모도독의 문안사를 했고, 그 역할을 1628년까지 한 기록이 나온다. 이상길은 1631년 대사간이 되었고, 1632년 대사헌이 되었다. 1635년 그는 공조판서가 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그는 이처럼 친명반청의 입장을 견지한 정치가여서, 후대 송시열 등 소중화주의자들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상길 초상화
 이상길 초상화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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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묘소를 보고 우리는 그의 아버지 이희선(李喜善)과 어머니 창원정씨의 묘를 찾아간다. 이희선은 동몽교관을 지냈을 뿐이지만 아들 덕에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이상길 묘역 근방에는 이상길의 아들 이경(李坰)의 묘소도 있다. 경은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부인은 파평윤씨다. 그러므로 충숙 근린공원은 벽진이씨 3대 묘역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이곳 충영각에는 충숙공 이상길의 초상화(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9호)가 보관되어 있다는데 볼 수가 없다. 자료에 따르면, 비단에 그린 채색 초상화로, 실물과 같은 크기인 가로 93㎝, 세로 186.5㎝라고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사모를 쓰고 엷은 홍색의 단령을 입고 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맷자락 안에 넣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초상화로, 모사본이 아닌 실제본이어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태그:#육사 호국비, #화랑대, #화랑대역, #충숙공 이상길, #묘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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