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대 위 노년의 삶은 결코 무대 밖 아파트 안에 살고 있는 노년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좁은 보폭의 느린 걸음걸이는 문턱에 걸려 넘어질세라 가슴 조마조마했고, 맥 놓고 앉은 쪼그라든 어깨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까 또 가슴 조마조마하다.  

 

북에서 피난 내려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어렵게 마련했을 집 한 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아비 없이 자란 손자를 위해 집을 처분하고 만다. 일일이 손으로 짜맞추어 지은 한옥은 돈벌이에 눈이 빨개진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보배다. 마룻장을 뜯어 그대로 책상으로, 찻상으로 써도 될 정도다. 그들은 집에 담긴 이야기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일이면 집을 떠나야 하는 할아버지 옆에는 귀엽고 고운 할머니가 있다. 맨날 뜨개질 코를 빠뜨리면서도 할아버지 카디건을 뜨고, 봄이 왔다며 창호지로 새로 문을 바르자고 서두른다. 뒤에서 할아버지를 껴안아주기도 하지만 잔소리를 쉬지 않는다 무뚝뚝한 할아버지도 귀찮지만은 않은 듯, 두 사람의 웃음과 주고받는 몸짓 눈짓은 (죄송하지만) 귀엽기까지 하다.   

 

한켠에서는 업자들이 와서 마룻장을 뜯어가고, 한켠에서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오가며 할아버지의 인생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오래 전 매정하게 부모 곁을 떠나버린 아들, 의지하며 살다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린 아내, 제 앞가림 하기에도 벅차보이는 손자, 증손자를 낳아 안겨주기는 했지만 사느라 고달픈 손자며느리 등.

 

집을 내준 할아버지는 '거기 가면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입혀도 주는' 요양원 입소를 앞두고 있다. 입소 전날 만두 한 통을 사들고 찾아와 죄송하다며 우는 손자며느리에게 할아버지는 거듭 말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아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고도 뭐가 미안하고 고맙단 말인가. 아비 정 모르고 자란 손자의 허랑함이 미안하고, 그런 남편과 살아보려고 애쓰는 며느리가 그저 고맙다. 

 

이른 아침, 가방 하나 들고 집을 나서는 할아버지 뒤로 뜯겨나간 마룻장 속에 들어와 누운 노숙자 황씨를 내려다 보며 할머니는 말한다. "나는 집을 잃었고, 너는 집만 남았구나."

 

삶과 몸과 집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떠난 사람은 집인 몸을 잃고, 넋이 나간 노숙자는 집인 몸만 여기 남아 있는 것.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뼈대만 남은 것도 모자라 뜯겨 나가는 집과 할아버지는 하나다. 그런 집과 몸을 다 내주고 길을 나선 할아버지의 걸음은 언젠가 할머니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화가 난다. 그래도 누구한테 화를 내야 될지 모른다. 말없이 세상 떠난 아내가 원망스럽고 그립다. 비록 집이 뜯겨 나가는 것을 봐야 하는 처지는 아닐지라도 이 땅에서 노년의 일상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화가 나 있지만, 누구에게 어디에 화를 내야 할 지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러니 연극과 일상은 하나다. 이것은 전적으로 69년 동안(백성희), 65년 동안(장민호) 무대를 지키며 스스로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노(老)배우, 대(大)배우의 힘이다.

 

사람의 남은 자리와 떠난 뒤가 '눈 녹듯이, 꽃 지듯이' 소리 없고 자연스럽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의 흔적은 여기 저기 남아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된다. 그래서 할머니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할아버지 카디건은 못 다한 사랑, 못 다 나눈 정이다. 아내를 잃고 한 팔이 떨어져 나간 듯 가슴이 아픈 할아버지는 미완성 카디건을 몸에 걸치고 길을 나선다.

 

 

객석을 가득 메운 중년과 노년의 관객들이 중간부터 코를 훌쩍인 것은 노년의 삶이 애닯고 안타까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 삶과 몸이 뼈대만 앙상한 집처럼, 그리고 언젠가는 뜯겨져 나갈 마룻장처럼 허약하며 위태롭고 그것이 너무도 명확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닥 위안은 함께 걸어갈 사람들이 있고, 저토록 오래 우리 곁에서 자신의 길을 지켜 걸어나가는 인생의 선배들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어둠 속 불 밝힌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글씨가 눈물에 번져 보인 것 역시 이런 까닭이다.

 

연극이 끝난 후 객석을 향해 인사하실 때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드린 것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배우로 계셔달라는 바람에 더해 이 땅에서 고단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계신 모든 어른들을 향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랬다.

덧붙이는 글 | 연극 <3월의 눈> 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 / 출연 : 장민호, 백성희, 오영수, 박혜진, 이호성 등 (~ 3월 20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태그:#3월의 눈, #노년, #백성희, #장민호, #국립극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