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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이것이 참, 안사람한테 못할 일을 참 많이 했어요. 한두 해도 아니고 팔 년이나, 그래요. 팔 년이었어. 팔 년이나 안사람을 안 본다고 밖에서 딴 여자와 딴 살림을 살았다고. 사람한테는 말이지. 특히 여자한테는 애간장이라는 것이 있다는디, 우리 집사람은 지금 그것이 하나도 없을 겨.

 

그때의 그 죄를 갚을 기회라도 주는 것인지, 집사람이 지금은 풍으로 쓰러져서는 두 발로 걷지도 못하고, 내 나이가 벌써 일흔여덟이니께, 앞으로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거든. 그러니께 이것을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여튼 이제는 내가 집을 비워서는 안 돼. 내가 불안해서 집을 비울 수가 없어. 사실은 고마운 일이지. 죽기 전에 안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도 말이지. 그래요. 지금도 그날의 일이 눈앞에서 어른어른할 때는 그냥 어디론가 가고 싶어지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이놈의 꿈아 얼른 깨어나라 하고 손에 닿는 아무 것이나 내던지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요."

 

기억이란 참으로 훌륭하다. 육십 년이나 세월을 파먹었으면 이제 그만 물러설 만도 하건만 아직 멀었다고 한다. 하긴 그래서 역사라고 하는 것일 게다. 바위에 핏물로 그린 암벽화처럼 가슴에 새겨져 버린 그것을 누가, 무엇이 어떻게 감쪽같이 지워내고 아무 일도 없었어, 할 것인가.

 

1951년 1월 5일,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선산 마을 뒷산에서 대대적인 학살작전이 펼쳐졌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이 그 임무를 맡았다. 11사단은 잔비토벌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영천에서 급조된 부대였다. 구성원의 대부분은 인민재판으로 희생된 가족을 두었거나 굶주림을 해소할 목적으로 지원한 청년들이었다. 따라서 군인정신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원한과 적개심 그리고 공명심 같은 것으로 무장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에 따라 포상의 종류가 결정되는 것이었다(전북도의회 특별위원회 보고서 및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결정문 참조).

 

그리하여 그날,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진행된 그날의 학살작전은 최소 200명에서 최고 500명에 달하는 시체를 남기는 전과를 올렸다(숫자에 차이가 많은 이유는 살아남은 가족이나 친척들, 특히 부녀자들이 개별적으로 시신을 수습해 간 이후 마을을 떠나버린 까닭으로 직접적인 증언 청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마을 사람들은 5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고, 당시에 깃발을 들고 국군에 참여했던 전 고창문화원장 이기화씨는 200명 정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살해 당한 사람은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인접한 마을에서 새끼줄에 묶여 끌려왔거나 혹은 토끼몰이 방식의 덫에 걸려 피난을 한다고 한 것이 하필 죽음의 자리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등잔 맡이 어둡다고 했던가. 모두가 산으로 도망을 할 때 들판으로 뛴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젊은 남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순간의 선택으로 학살 장소와는 반대 방향으로 뛰었던 까닭에 살아남은 황판옥(당시 17세)씨는 짙푸른 다복솔 사이에 꿩처럼 웅크린 채로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어서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매일반이라는 심사로 다복솔 밑을 빠져 나왔다. 새벽 4시쯤에 감히 일어서지도 못하고 네 발로 기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군인들은 모두 잠들고, 산짐승들조차 잠든 그 시각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 것처럼 바스락 소리 한 번에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두꺼비가 파리를 나꿔채듯이 그를 끌어들였다.

 

"집에 와 보니께 숙부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총상을 입은 채로 가마니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쌀가마니 행세를 하고 계시는 거여. 치료랄 게 뭐 있간디. 산천이 푸르다면야 이것저것 약초라도 은밀하게 뜯어다가 어떻게 해 봤을 테지만, 동지섣달 즈음에 뭐가 있어야지. 겨우 한다는 것이 늙은 호박을 쪼개서 총 맞은 자리에 대고 기적이나 바라고 있는 것이여."

 

"늙은 호박이 총상에 무슨 효험이 있는가요?"

"아따 참말로, 효험은 무슨, 뭐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간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아무 짓도 안 할 수는 없으니께, 약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있었다 해도 약 구한다고 돌아다니면 군인들이 뒤따라 와서 총질을 해댈 것이 뻔하니께. 그리서 그렇게 아무도 몰래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께 겨우 늙은 호박 한 덩어리가 눈에 띄었던 것이제. 그것도 군인과 경찰이 수시로 순찰을 나오니께 어머니나 할머니는 그 옆에 잘 붙어 있지도 못하고 아버님 혼자서 그렇게 총 맞은 자리를 끌어안고 있다가 금매, 열흘 가까이 사셨지. 그 꼴을 내가 본 것은 아니고, 들은 말이여. 나도 발각되면 즉결처분으로 죽어야 할 신세라, 잿간에서 거름처럼 웅크리고나 있었으니께."

 

잿간이란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난 뒤에 발생하는 재를 나중에 논밭이 뿌리기 위해 쌓아두는 일종의 거름창고였다. 재를 그냥 쌓아 두면 바람이 불었을 때 휘휘 날리니까 여기에 구정물을 끼얹기도 하고 소변이나 분뇨를 끼얹어서 거름으로서의 기대 효과를 높이는 게 당시의 풍습이었다. 때문에 오래된 재는 흙에 물을 섞어놓은 듯이 제법 단단하게 굳어 있기 마련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이 잿더미에 어머니와 할머니는 밤새 굴을 파고 대야에 흙과 돌을 날라다가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것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그리자면 아마 알래스카의 이글루를 한껏 축소시켜 놓은 것 정도가 될 것이다. 그는 거름 냄새가 콧속을 후비다 못해 창자까지 들어낼 듯이 고약한 그 잿더미 이글루 속에서 열흘을 살았다.

 

"내가 사변 전에 중학교를 다녔었는디. 말하자면 고창 읍내까지 유학을 했었던 거여. 그때 연극반 활동을 했었단 말이거든. 그것이 그냥 내 취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더라고.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뭔가가 있었던 게비여. 아따 참말로, 잿간에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어머니와 할머니가 서로 질새라 연극을 하시는디, 이떤 때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내 입에서 웃음까지 나오더라니께. 저 멀리서 군인들의 군홧발 소리가 저벅저벅 들리면 말이지. 어머니와 할머니가 울고불고 땅을 치면서 사립문 밖으로 달려가는 거여. 어머니는 서방 죽고 자식 죽고 시아제까지 죽었으니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통곡을 하시고, 할머니는 금쪽같은 손자에 아들이며 다 죽었으니 세상도 다 끝났다고 통곡을 하시고, 그러면 순찰을 돌던 군인들이 머쓱해서 집 안으로는 들어올 생각도 안 하고 그냥 가는 거여. 그렇게 살아남았어, 내가, 이 내가 말이지."

 

그가 잿더미 속에서 겨우 숨이나 쉬고 있는 동안 마을의 부녀자들은 날마다 군인들의 밥을 해주는 한편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군인들이 잡아놓은 돼지며 쇠고기로 밥을 해서 바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나무를 베어다가 발을 엮어서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부녀자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오늘은 누구네 가족들, 또 내일은 누구네 가족들 하는 식으로 얼어붙은 땅을 호미와 괭이로 판다기보다는 긁어내서 작은 구덩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 시체를 넣고 흙을 덮고 그 위에 다시 대나무 발을 얹어서 돌이나 흙으로 눌러놓아 산짐승들이 뜯어먹지 못하게 하는 임시방편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열흘쯤 뒤에 군인들은 인제 무장 해리 그런 쪽으로 다른 사람들 죽이러 떠나지 않았겠어. 그것 참, 세월이 숨도 못 쉬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것이 또 금방 가버리는 겨.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칠 수는 없는 일이라 농사를 지어야 할 철이 되었는디, 아 그란디 이놈의 농사를 지을 남자가 있어야지. 소가 있어야지. 동네를 다 둘러봐도 쟁기질할 소 한 마리 안 남아 있고, 남자라는 것은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나를 포함해서 열 명도 안 되는 거라."

 

수소문을 해서 멀리 다른 마을의 소 한 마리를 빌려왔다. 열 마리가 있어도 모자라는 판이라 소 한 마리는 대번에 싸개가 났다. 나도, 나도, 모두가 나도, 나도를 외치는 판이라 소는 한 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달이 있을 때는 아예 철야까지 했다. 무지도 그런 무지가 없었다. 소는 보름 만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나서 뱀을 잡아다가 풀에 싸서 먹였다.

 

그러나 소는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보통은 뱀을 풀에 싸서 목구멍 깊이 넣어주면 알아서 적당히 소화를 시키는데 하도 지쳐 버려서 그것조차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소는 죽어 버리고, 결국은 몇 남아 있지 않은 남자들이 소 대신으로 쟁기질을 해서 대충 어떻게 형식적인 모내기를 마쳤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에서는 징집 영장을 보내왔고, 집에서는 할머니가 씨라도 받아야 한다고 결혼을 서둘고 나섰다.

 

"금매, 결혼을 전후한 시기는 내가 하나도 기억을 못해. 무슨 꿈을 꾸었던 것도 같고, 도깨비에 홀렸던 것도 같고, 신통할 정도로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 한 마디로 말해서 엄벙덤벙 어떻게 남의 일 치르듯이 했던 것이제, 결혼을.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말이지. 군인을 십만 명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 사람들 주장을 존중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징병제를 만들었다가 폐지했었단 말이거든. 그런데 사변이 터지고 군인이 많이 필요하게 되니께 그것을 도로 부활했단 말이거든. 말하자면 내가 인제 반드시 군대를 가야 할 처지가 된 것이어. 아 그란디 내가 군대를 갈 수가 있어야제. 군인이란 게 하는 일이 사람 죽이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두 눈으로 봐 버렸는디 어떻게 군대를 갈 것이냐 이거야.

 

그리서 안 갈라고, 이것저것 수를 꾸미다 보니께 전시학생증이란 것이 있더라고. 그것이 있으면 군대가 연기되는 거여. 그때 광주 지산동에 수의고등학교가 있었어. 나중에 전남대학교 수의과로 간판을 바꾸는 학교였는디, 거기 쫓아가서 등록금 내고 전시학생증 달라고 했더니 주더라고. 그래서 군대를 안 갔어. 몇 년 뒤에는 내가 지원해서 갔지만, 하여튼 그때는 군대란 치가 떨려서 안 가고 싶었다고."

 

그토록 치가 떨리던 군대가 어느 날 문득 하나의 도피처로 다가왔다. 할머니께서 무엇무엇 다 급해도 씨를 받아놓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다고 서둘러 결혼을 시키는 바람에 신랑이 되고 만 그는 앞날이 캄캄했다. 미래에 대해 무슨 그림을 그려놓은 바는 없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연극을 할까 음악을 할까 고민도 했었지만 난리를 치르고 난 뒤에 어쩔 수 없이 농사일에 매달리면서 희망도 고민도 다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 마침표를 찍듯이 결혼까지 하고 보니 인생이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인데 인생이 다 끝나 버렸고, 끝나버린 인생을 버리지도 못하고 붙잡고 앉아 있는 꼴이었다.

 

이 암담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군대를 지원했고, 군대 중에서도 군대랄 할 만한 특수부대를 또 자원했다.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진 게 있기는 있었다. 어느새 태어난 아이들이 보고 싶어지고 있었고, 농사를 지을 만한 남자가 한 명도 없는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내가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괴로웠다. 제대를 해서 농사를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주인의 입장으로 한다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막상 제대를 하고 보니 또 그렇지도 않았다. 뭐냐. 도대체 이것이 뭐냐. 농사 아닌 다른 일로 돈을 벌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는 결국 광주로 나왔다. 그리고 광주의 어느 다방에 만난 여자와 살림을 차리게 된다.

 

"제대하고 바로 광주로 나온 것은 아니고, 몇 년 동안 마을 구장을 했는디, 요새 이장이 그때는 구장이었거든. 야튼간에 선거 때가 되면 구장한테 이것저것 지시가 막 내려와요. 면에서, 군에서, 경찰서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 저럴 때는 저렇게 저렇게 하라, 뭐 그런 것들이 엄청나게 있어. 해서는 안 될 일이 엄청나게 있다고. 속에서 막 피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 내가 그때 그 지시사항들을 조목조목 다 모아서 신민당으로 가져갔어.

 

아 그란디 이런 호랭이나 물어갈, 신민당에서 그것으로 무슨 일을 벌이기도 전에 경찰이 먼저 알고 나를 찾아와서는 수갑을 딱 채워 버리는 거여. 그란디 그 즈음에 내가 마을 구장 말고 또 뭔 일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반공연맹이라고 있단 말이거든. 이 연맹에서 내가 총재 표창도 받고 아주 열성적이었단 말이거든. 내가 만일 반공연맹에 관계하지 않았다면 경찰은 나를 아마 좌익으로 몰아서 징역을 살렸을 것이여. 하여튼 그때 경찰서 유치장을 이틀 정도 구경만 하고 나왔는디, 그 뒤에 유진오 총재가 나한테 표창을 한다고 서울까지 올라오라고 연락이 왔더만.

 

말하자면 그때부터 나는 골수야당이 되었던 것이제. 평상시에는 열정적으로 반공을 하고, 선거 때는 골수야당을 하고, 그런 인생이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으로까지 쭈욱 이어진 거여.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혼자서 시소를 타는 인생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영판 개운치가 못한디, 야튼간에 나는 사람의 뱃구레를 죽창으로 찔러서 죽이는 인민군도 봐버렸고, 떡매로 사람의 머리통을 깨서 죽이는 국군도 봐버렸고, 안 봐야 할 것은 다 봐버렸단 말이거든. 그렁게 뭣이냐 하면, 이쪽도 저쪽도, 아무것도 나는 안 믿어. 못 믿어. 그냥 내 가슴이 저것은 아니다, 하면은 달려가서 멱살잡이 하는 것이제."

 

"만약에 선거가 해마다 치러졌다면, 그러니까 할 만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면 굳이 광주까지 가시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군요?"

 "내 말이 그것이여. 팔뚝 걷어붙이고, 목숨 걸고, 그렇게 할 일이 계속 있었다면 딴 생각 안 했을지도 모르제. 반공연맹이란 것은 사실 할 일이 별로 없거든. 궐기대회 할 때 나가서 앞장서는 것 정도란 말이여. 그것도 하루나 이틀뿐이고. 그란디 선거는 몇 달씩 걸린단 말이거든. 그런 선거가 매년 있을 것 같으면, 허헛, 웃기는 얘기제. 핑계일 뿐이여.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핑계일 뿐이여.

 

내가 좀 더 인생에 대해 성실하고, 내가 좀 더 진실된 사람이었더라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어. 나 하나 보고 시집이랍시고 온 사람을, 풍으로 쓰러질 때까지도 모르고 딴 짓이나 하고 있었으니 잉? 안 그러겠는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제. 그런 짓을 내가 저질렀던 거여. 한두 해도 아니고 팔 년씩이나 딴 여자를 봤으니.

 

인제야 겨우 철이 들었는가 어쨌는가, 요새는 아침에 안사람 화장실 데려가는 것이 일 중에서도 제일로 큰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밥 하고 반찬 만드는 것이 제일로 보람스런 일인디, 금매, 생각하면 눈물이 찌걱찌걱 날 일이제. 죽을 날을 생각하며 준비를 해야 할 사람이 인제사 겨우 일다운 일을 찾았구나 싶어지니 이것이, 잉? 이것이 뭔 일이여. 나이 팔십에 말이여."

 


태그:#양민학살, #고창11사단 사건, #부부,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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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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