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4 10:50최종 업데이트 24.03.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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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8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에 신흥무관학교 107주년을 맞아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 이희훈

 
윤석열 정권은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를 항일독립운동에까지 대입한다. 북한·중국·러시아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연계된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한다. 이로 인한 대표적 사건이 육사 홍범도 흉상 철거다. 이는 한미일을 '선'의 축, 북중러를 '악'의 축에 두고 현재뿐 아니라 과거 역사까지도 이 틀에 끼워 맞추는 윤 정권의 역사인식을 반영한다.

만약 대한제국이 이 명칭에 걸맞게 대한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외국 침략에 나섰다면, 한국과 일본을 한데 엮는 역사인식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으므로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로 독립운동을 재단하는 시도는 역사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구도로는 독립운동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백범 김구 및 이동휘(임시정부 국무총리)와 더불어 김립이 관련된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김립 사건, 모스크바자금 사건, 코민테른자금 사건, 국제공산당자금 사건 등으로 지칭되는 이 스캔들은 중국과 소련을 적대 진영에 놓고는 한국 독립운동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건의 주역인 김립은 대포동 미사일 혹은 무수단 미사일이 발사되는 동해위성발사장 부근에 있는 오늘날의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1880년에 태어났다. 임오군란 2년 전에 출생한 그의 본명은 김익용(金益瑢·金翼瑢·金翼庸)이다.

익용 대신 립(立)이라는 외자를 가명으로 쓴 것은 조국을 해방시켜 입헌군주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김입헌으로 하지 않고 김립으로 한 것은 훗날 독립운동가 겸 인권변호사가 될 막역한 그의 친구에게 헌(憲)을 넘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립의 고려공산당 동지인 김철수는 1989년 여름호 <역사비평>에 실린 '김철수 친필 유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립과 허헌 사이는 일본 동경 유학 시에 장래 조선을 입헌군주국으로 하자는 심맹(心盟)으로 입자(立字)와 헌자(憲字)로 양인(兩人)의 명(名)을 삼았던 것으로 그만치 돈의(敦誼)의 막역(莫逆)이었다 한다."

일본 유학 전에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서 공부하고 서북학회 및 신민회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한 김립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 초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 뒤 홍범도나 최재형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했다. 2006년 12월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린 반병률 외대 교수의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은 "1911년 6월 1일 최재형·홍범도의 지원을 받아 권업회 발기회를 결성하고 총무로 취임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획력과 조직력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한인사회당도 창당하고 소련 민병대인 적위대와의 연합군사훈련도 성사시켰다. 1918년에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인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그는 이 당을 1921년에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했다.

그런데 1919년에 몽골 북쪽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전로(全露)한인공산당도 1921년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됐다. 두 개의 고려공산당은 이 시기 독립운동사를 헷갈리게 만든다. 상호 경쟁한 두 당은 편의상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린다.

김립이 참여한 고려공산당이 상하이파로 불린 것은 3·1운동 뒤에 이들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고자 제국주의의 반대편인 공산주의를 활용했던 이들이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 명칭이 붙게 됐다.

김립 사건
 

상해파의 사진. 맨 첫줄 오른쪽에 앉은 이가 김립이다. ⓒ 임경석 제공

 
김립 같은 능력자가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이념과 사상에 개의치 않고 상하이로 모여든 것은 독립운동의 전망을 밝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진영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얼마 안 가 분열됐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권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분열상을 노정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것이 김립 사건이다.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측은 1919년 8월에 사람들을 소련에 보내 40만 루블 혹은 400만 루블의 선전비를 받았다. 하지만 이 돈은 이르쿠츠크파에 탈취됐다. 탈취 시도가 실패했다는 설도 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총리였던 그해 11월에 상하이파는 소련에 자금 지원을 재차 요청해 60만 혹은 200만 루블을 약속받고 일차로 60만 루블을 받았다. 이동휘의 밀명으로 이 돈을 인수하러 간 한형권은 20만 루블은 소련 외교부에 맡기고 40만 루블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전달했다. 이 돈의 가치는 훗날인 1948년을 기준으로 4억 원에 해당한다.

이 상황에서 '배달 사고'가 발생했다. 김립이 건네받은 자금은 임시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반병률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인 '김립과 항일운동'(<한국근현대사 연구> 2005년 봄호)에 따르면, 이르쿠츠크파는 김립이 그 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고 주장했고, <김철수 친필 유고>에 따르면 그 돈은 이동휘와 김립의 대일 투쟁에 사용됐다.

김철수의 증언은 한인사회당이 1921년에 고려공산당으로 개편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해 위의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은 "1920년 말 이후 이동휘와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상해 임정의 개혁을 위해 진력하였다"고 한 뒤 "모스크바 자금을 고려공산당 조직과 활동 자금으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금 사용에 대해 크게 격분한 인물이 백범 김구다. <백범일지>는 김립이 그 돈을 공산주의운동에도 썼지만 가족들과 첩에게도 썼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얼마나 확산됐는지는 꼿꼿한 선비의 대명사로 통하는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심산 김창숙은 1951년경에 쓴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이동휘와 김립을 가리켜 "두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 뒤 "김립은 창녀를 끼고 상해의 조계에 숨어"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 같은 부정적 인식은 임시정부가 김립을 공격하는 상황으로 귀결됐다.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은 "상해 임정은 1922년 1월 26일자로 국무총리 신규식 등 각원(閣員) 명의로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라며 "보름이 채 안 된 2월 10일 아침 김립은 오면직·노종균 두 한인 청년에 의하여 피살되었다"고 서술한다.

오면직·노종균은 김구가 파견한 청년들이다. 김립의 행위는 임시정부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그 돈을 고려공산당을 통한 독립운동에 썼다 해도 그와 이동휘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독립운동권의 분열을 촉진시키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국가보훈부가 김립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시비를 걸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역사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한 김립의 독립운동은 돈 문제로 인해 빛이 바래졌지만, 그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소련·중국과의 협조 속에 전개되던 시절을 반영한다. 그 시절에 독립운동진영은 김립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소련의 도움을 받았지만, 언제나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다. 소련 정권 역시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고 조동걸 국민대 교수의 <선열의 길과 유적>은 소련 정권이 러시아 내 한국인들의 지원을 받은 사실을 거론하면서 "혁명군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고 토지 분배를 외치고 있어 한인 동포와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립 사건은 그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한국 독립운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진영 내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매개로 상하이에서 뭉쳤다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이다.

이 사건은 '한미일 대 북중러'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한러중 대 일본의 잣대를 대야만 이해할 수 있다. 소련 자금을 받지 못해 김립을 공격한 임시정부와 김구의 행동은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윤석열 정권이 내세우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는 오늘날의 동북아 정세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언정 위와 같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방해만 된다. 이런 관점을 고집하면 홍범도 같은 피해자만 양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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