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0 06:55최종 업데이트 24.03.20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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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하면서 듣게 되는 말과 시선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래도 이 직업이 나와 가족을 먹이고 살린다. ⓒ 픽사베이

 
"이런 거 하면 얼마나 벌어요?"

가끔 택시를 탄 손님들이 대뜸 던지는 질문이다. 묻는 사람은 '얼마나'에 방점을 찍겠지만 택시 운전사 입장에서는 '이런 거'에 방점이 찍힌다. 이런 거라니. 마음이 심란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택시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 질문 안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직장인에게 대뜸 '연봉이 얼마예요?'라는 질문을 먼저 하지 않는다. 무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상식의 문제다.  

택시 운전사에게 함부로 말하는 '얼마나'는 그 사람의 가장 내밀하고 민감한 정보다. 그런데 그걸 택시 운전사에게는 함부로 묻는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대뜸 얼마나 버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런 거라니.

'이런 거'라는 말 아주 오래전에도 들었었다.

30여 년 전, 스물일곱이었던 1992년 겨울에서 1993년 봄 사이 3개월 짧은 기간 스페어 택시 기사로 일했던 그때도 그랬다.

택시를 타면 너나없이 어떤 말이든 주고 받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도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다른 택시 기사들에 비해 새파란 나이였고, 아직 대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런 걸 해요?"
"이런 거 하지 말고 다른 걸 찾아봐요."


기본요금이 900원이던 때 짠한 마음에 천원 팁까지 얹어주며 했던 말이 30년 전에도 '이런 거'였는데 다시 시간을 거슬러 8년 전 제주에서 5개월 택시 운전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 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제주에는 이런 거 말고는 할만한 게 없긴 하죠."


직업에 대한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

30년 전이나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택시라는 직업은 '이런 거'라는 사회적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작년 9월 개인택시를 사서 직업으로 삼기 전 택시에 대한 내 관념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택시 하면 냄새와 노인이라는 두 단어가 먼저 떠올랐었다.  

택시가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문턱 없는 직업이긴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다양한 직업을 고려한 '어여쁜 말장난'이 아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의 근원은 사람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는 그렇다.

사회에서 직업에 귀천이 있고 없고는 교과서적이냐 현실적이냐에 따라 답변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교과서적인 답변을 원한다면 없는 거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말한다면 분명하게 있다. 그러니까 '이런 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말의 주인공이 남녀노소이고 악의도 없다. 생각 없이 무의식에서 나오는 '이런 거'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시민의식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예컨대 택시를 타고 가는 손님들이 전화 통화를 할 때 유형이 있는데 크게는 택시 운전사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과 존재로서 의식하는 유형이 있다.

굳이 계량하자면 없는 사람 취급하는 유형이 더 많은데 외부인이 듣기에 민망한 얘기들을 큰소리로 아무렇게나 한다. 택시가 아닌 카페 같은 곳이라면 남이 들을 새라 조용하게 나누었을 내용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것도 민망하고 괴로운데 말하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택시 운전사는 없는 존재다. 불륜 상대와의 민망한 전화 통화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곳이 택시 안이다. 때론 모멸감까지 드는 내용도 서슴없다. 

과거 건설 목수 일을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현장에서 못 주머니를 차고 일을 하는데 어린 아들과 엄마가 길을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렸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얘길 들어보면 다들 이런 비슷한 경험이 한 번씩은 있다.

목수든 택시든 진입장벽이 낮고 몸으로 하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뿌리가 깊다. 내가 그걸 스스로 실감한 사례가 있었다. 8년 전인 2016년, 다양한 국적의 해외입양인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한 글을 당시 포털 다음의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다.

인터뷰 당시 양부는 벽돌공이고 양모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프랑스 입양인의 말에 순간 신기한 마음이 들면서 놀란 나는 "교사하고 벽돌공요?"라고 되물었었다. 그 입양인의 반응이 '그게 왜?'라는 식이어서 한 번 더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에서 초등학교 교사나 벽돌공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그 나라의 직업의식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 무의식에 교사와 벽돌공은 부부가 될 수 없었다. 나 역시 사회적 편견이 던진 그물 속에 살고 있었다.

조화로움을 완성하는 수많은 직업
 

조화로운 사회 안에는 조화로움을 완성하 수많은 직업이 있다. ⓒ 픽사베이


침을 뱉은 후 밀봉해서 보내면 유전자를 분석해 주는 시장이 있다. 수십만 원 하는 비용을 내면 인종, 혈통, 예상 질병, 탈모 등이 포함된 수십 가지 DNA 정보를 분석해 주는데 놀라운 건 대상자의 키와 몸무게뿐 아니라 직업 유형까지도 맞춰낸다. 단지 침을 뱉어 보냈을 뿐인데.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아주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본인이 차은우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본인 잘못이 아니고 차은우 본인도 자기 의지가 아니다. 그저 순전히 우연이 만들어낸 껍데기다.

거기에 각자의 성향과 취향 노력 가족 환경 등 삶에 영향을 주는 많은 변수들이 개입되면서 한 개인의 인생이 완성되어 간다. 유전형질은 개인의 선택이 배제되었지만 그 외의 변수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자기 삶의 가능성과 희망의 싹을 틔운다.  

내 인생 경험으로 공부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몸을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복잡한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있고 단순한 일에 최적인 사람이 있다. 직업군을 가르는 가장 큰 요소다. 이는 본인의 선택적 변수가 아닌 타고난 형질에서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 최고의 글쓰기 전문가이고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인 유시민 작가의 고백처럼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김훈이 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의 임계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김훈이 유시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유감스럽게 차은우도 김훈도 유시민도 될 수 없지만 다행인 것은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가 사랑하는 나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가장 큰 이유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각자는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이런 소중한 개인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존중되는 온도가 민주시민사회의 척도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교양은 그러니까 상대에 대한 배려가 포함된 존중이다. 있는 그대로의 개인에 대한.

조화로운 사회 안에는 조화로움을 완성하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의사, 목수, 교사, 벽돌공, 공무원, 택시 기사 등등이 직업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이 사회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몸을 쓰는 거의 모든 직업과 함께 택시 운전사는 과거로부터 존중되지 못한 직업이다. 개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빠진 자리는 자동으로 차별과 편견이 차지한다. 존중되지 못하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존심은 높아진다. 자존감은 자기에 대한 신뢰이고 자존심은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차별적인 언어와 편견 어린 시선에 자주 노출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런 방어본능 때문이다. 그럼 또 택시 기사들은 버럭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더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차별과 편견은 고착된다. 그러니 택시 기사는 30여 년을 변함없이 '이런 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인 우리나라의 우울증 문제가 심각하다면 대표적 항우울제인 '프로작' 처방률이 월등하게 높은 북유럽 국가 중 아이슬란드 역시 그 심각성이 내재되어 있다.

대신 아이슬란드는 인구 대비 독서율과 작가군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은데 열악한 기후환경과 우울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결국 같은 우울증 병인을 가진 사람이 어떤 나라에서는 작가가 되고 어떤 나라에서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교사와 벽돌공이 부부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나를 오히려 의아해하던 입양인의 나라 프랑스에서 인권선언 초안이 작성된 해는 1789년이다. 지금으로부터 235년 전, 조선 정조 13년일 때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인권을 헌법으로 새긴 해는 그로부터 159년 후, 제헌의회가 열린 1948년이었다.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사회로의 진전을 이루긴 했지만 그만큼의 시민의식은 고양되지 못했다. 역사 발전에 '스킵'은 없고 세대를 뛰어넘는 시민의식의 발전 또한 불가능하다. 

인간의 인식 체계는 자기 경험 안에 머물고 집단 경험이 세대 의식을 형성한다. 형식적이나마 민주화 이후 세대의 집단 경험이 우리 사회의 주류의식으로 대체되는 시기가 멀지 않았다. 민주화 이전 야만의 시절, 주위를 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던 각자도생의 시민의식이 밀려나는 자리에 스며들어야 하는 건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이런 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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