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0 12:04최종 업데이트 24.01.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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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택시는 그랜저다. ⓒ 김지영


개인택시를 샀다. 지난 9월이었다. 2023년 2월 택시비가 인상되고, 이틀 일하면 하루 쉬어야 하는 부제까지 해제되면서 오랜 기간 8000만 원대였던 서울 개인택시 면허 시세가 9000을 넘기고 1억을 향해가고 있었다. 사회적 정년인 60세를 3년 앞둔 나이였다.

계속 오를 것 같은 면허 시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내게 구매 요인이 되지 못했다. 어차피 면허값은 등락은 있지만 사라지는 돈이 아니었다. 그게 1억이든 아니든 관계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남은 인생을 함께할 택시 운전사라는 직업이었다.


마흔한 살 때 더 이상 조직(회사) 생활은 내 인생에 없다는 선언과 함께 귀농을 시작으로 여러 지역과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말은 프리랜서지만 실상은 낭인 생활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이들을 먹이고 집을 건사하며 생활은 해나갔는데 노후보장의 꽃인 연금까지 활짝 피워올리는 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아내는 100만 원도 안 되는 연금으로 살아갈 노년에 대해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나는 노동하는 삶을 멈출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설사 연금이 넉넉해도 나는 그것만 받아먹으면서 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꿈꾸던 60세 이후 인생은 읽고 쓰고 노동하는 삶이었다. 돈은 단순하게 벌고 공부와 성찰을 멈추지 않는 삶. 그래서 더욱 나이 들어서까지 내 노동을 근로계약서 안에 구겨 넣고 싶지 않았다. 노년의 노동까지 자유의지를 빼앗길 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택시는 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비교적 적은 돈을 투자해서 자본론에서 말하는 생산수단까지 소유했으니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느닷없는 부르주아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3개월 만에 그만둔 첫 택시 기사 생활

택시 운전사가 내게 뜬금없는 직업은 아니었다. 택시 운전은 20대부터 시차를 두고 몇 번에 걸쳐 내 인생의 마디를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그 처음은 스물일곱 푸르고 푸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푸르고 푸르러야 할 그 시절 집안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나는 이른바 86세대 운동권 학생으로 경찰에 쫓기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졸업도 마치지 못하고 군에 갔다 온 직후였다.  

1992년이었다. 이미 같은 학번 동기와 밑에 후배들까지 학생운동을 졸업하고 노동 현장에 위장취업 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일찍부터 투쟁 현장에 섰던 경력으로 대중운동가로 진로가 정해졌고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상근비라야 고작 몇만 원이던 시절 가난한 집안 살림까지 보태야 했던 당시 택시회사 문을 두드린 건 대중운동가가 아닌 운수노동자로의 삶에 대한 적합성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생산직으로 위장취업 해서 노조설립을 주도하는 불순분자(?)들에 대한 검거 소식이 9시 저녁 뉴스에 오르내리던 시절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최종학력란에 고등학교 졸업을 써서 이력서를 냈다.

면접이랄 것도 없이 와보라는 연락을 받고 도착한 회사에서 50대로 보이는 배차 전담 상무란 사람이 대뜸 반말로 내일 오전에 한번 나와보라고 했다. '나와 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건 다음 날 오전에 나가서 알았다.

말하자면 나는 취업에 성공은 했지만 정식 택시 기사가 아니라 출근하지 않은 택시 기사를 대신하는 '스페어 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스페어 기사가 많은데 출근하지 않은 택시 기사가 적으면 나왔다가 빈손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신세였다.

사회생활이 거의 처음이라 나는 고분고분 성실하게 일을 했고 상무는 꼬박꼬박 군말 없이 사납금을 채워주는 나를 기특하게 생각했는지 다른 사람보다 배차를 우선해 줬다. 배차의 원리는 어떤 기준이나 매뉴얼이 아니라 상무의 재량이었다.

그때도 택시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지금처럼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밑바닥 막장 등의 단어가 아무렇게나 쓰이던 직업 중 하나였다. 물론 당시 일부 택시종사자들의 행태도 단단하게 한몫하고 있었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 하나는 한겨울 새벽 일을 마치고 돌아온 회사 차고 구석진 곳에 드럼통 난로와 카바이트 불을 밝히고 멍석 위에 둘러앉아 화투장을 돌리던 기사들의 모습이다. 매일 현금으로 받은 수입을 놓고 벌이는 도박판이었다.

내 첫 택시 기사 생활은 3개월 만에 종말을 맞았는데 두 건의 연이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한 번은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으로 다른 한 번은 브레이크 고장으로 앞차를 들이받았는데 회사 정비부장은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내게 '그럼 내가 정비를 잘못했단 말이냐'며 쌍욕을 퍼부었다. 그때 내가 몰던 택시가 지금은 전설이 된 '포니투'였다.  

사납금도 채우기 어려운 구조의 법인택시 현장에 절망하고 열두 시간 맞교대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며 금쪽같은 하루를 운전과 잠으로만 등분하는 삶에 좌절하고 있던 차였다. 스물일곱의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사회적 과업도 미치도록 많았기에 스페어 딱지를 떼지 못한 채 택시 기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운수노동자로서의 삶은 종지부를 찍은 줄 알았다.

과로가 필수였던 법인택시 운전
 

제주 택시 내부. 당시에는 지역콜과 호출앱을 동시에 사용했었다. ⓒ 김지영


시간이 흐르고 흘러 40대 중반 제주도에 살 때였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며 평범한 회사원으로 30대를 보낸 후 40대가 되자 이른 귀농을 했다. 거기서 딸을 입양하고 4년이 지나는 시점에 나와 맞지 않은 농사를 접고 제주도로 흘러들었다.

아내는 펜션을 운영하고 나는 목수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이 시작되고 일은 떨어지는데 개인택시를 하는 지인으로부터 제주에서 법인택시를 해도 목수 일당은 벌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마침 한겨울 제주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새벽 현장에서 부들거리던 생생한 기억에 겨울만 지나자는 생각으로 냉큼 택시 자격증을 따서 법인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20대 법인택시 경험은 20년이 지났어도 며칠 만에 나를 능숙한 택시 운전사로 변모시켰다. 몸으로 익힌 건 금방 되살아난다. 2015년이었다.

1992년과 2015년 사이 법인택시 환경은 낡고 도태된 채로 변해 있었다. 택시 기사는 줄어들었고 택시는 남아돌았다. 낡고 남루해진 회사 건물에 온기는 사라지고 빈 책상으로 썰렁한 사무실엔 습기가 밑돌았다. 스페어 기사라는 단어는 옛것이 되었고 내게 차 한 대가 바로 지정되었다.

열두시간 맞교대도 아니었다. 차를 한 대 줄 테니 알아서 운행하고 1주일에 두 번 회사 방문해서 사납금만 맞추라고 했다. 시작할 때부터 겨울만 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일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냐면 일을 그만두기까지 내 하루 일과표는 정확하게 운전과 잠 두 개로만 구성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한 달이 지나자 상무가 회사로 나를 불렀다. 지금도 택시에는 유류 보조금이 지급이 되는데 넣은 만큼의 20~25% 정도가 환급된다. 많이 넣으면 많이 받고 적게 넣으면 적게 받기 때문에 지정된 가스충전소에서 순위가 확인되고 택시는 달린 만큼이 매출이기 때문에 그 순위는 바로 매출 순위가 된다.

나를 부른 상무가 대뜸 말했다.

"김 기사. 이번 달 유류 보조금 액수로 제주도에서 넘버 투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당신 이렇게 1년 하면 죽어요."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다. 택시업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으로 실제 그렇게 일하다 죽은 사람 많이 봤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겨울만 날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1년까지 하다 죽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봄까지 5개월을 하고 살아서 그만두었다.

죽음을 경고받을 만큼 열심히 일해 받은 돈이라야 대기업 초임에도 미치지 못한다. 법인택시 운전해서 먹고살려면 과로가 필수인 셈이다. 대단한 수준도 아니고 그저 먹고 사는데도 그렇다. 이런데도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은 안 하려 든다는 탓만 한다. 

택시는 시대를 반영한다

2022년 서울로 무대가 바뀐다. 제주에서 7년을 살다 정착할 생각으로 고향에 짐을 풀었는데 1년 만에 다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국회에서 발의 직전 공개된 법 하나가 문제였는데 이전부터 관련된 글을 써오고 책을 냈던 내게 관련 단체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회사원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난 지 12년 만에 시민단체 활동가로 다시 돌아왔다. 서울은 변함없이 사람들로 북적였고 집값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과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 밑으로 들어가는 돈과 생활비도 터무니없다.

활동비로는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아내가 맞벌이해서 아이들 키우고 생활은 하겠는데 문제는 곧 닥칠 노후였다. 조금이라도 아내를 안심 시킬 생각으로 투잡을 시작했고 하필이면 그게 이번에도 택시였다. 다만 차이라면 서울에만 있는, 호출앱으로 운행하는 대형택시회사였다.

주말이나 심야에 시간제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다른 일에 비해 보수도 좋았다. 이른바 플랫폼 택시인데 일반 법인택시와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말하자면 택시업계의 스타트업이다. 기존 택시 문법을 벗어난 새로운 택시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이 내 눈에도 보였다.

2022년 봄에 시작해서 2023년 여름까지 1년 6개월 투잡을 하다 그해 9월에 개인택시를 샀다. 그 전 1년 동안 개인택시 자격증을 얻기 위해 치열한 양수교육 예약에 성공하고 8개월을 기다려 경북 상주로 가서 1주일 교육을 수료한 후에 서울시에서 별도로 하는 이틀짜리 교육까지 받은 후였다.  

대형택시로 투잡을 하는 동안은 국회의원실에서 주로 일하던 시기와 겹쳤는데 오전에는 국회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오후에는 택시 운전대를 잡으면서 극한의 직업환경을 오가기도 했다.

스물일곱에서 쉰일곱까지, 법인택시에서 플랫폼 택시와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기까지 1평짜리 택시 안에서 겪은 자잘한 사건들은 곧 시대를 반영한다. 택시 승객이 당연하게 먼저 앉는 좌석이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바뀌었고 택시를 타면 10분 안에 서로의 족보까지 알게 되던 대화가 사라지고 침묵이 상식이 되었다.

택시를 타려면 큰길로 나가던 사람들이 골목 집 앞에서 기다리게 되었고 서울역 길게 늘어선 빈 택시 앞에서 어떤 젊은이는 스마트폰 호출앱을 로그인한다. 대리운전과 배달일로 법인택시 기사는 줄어드는데 오전 근무로 채우기 벅찬 사납금 구조는 30년 동안 변함없다.  

자율주행시대가 멀지 않았어도 개인택시 면허값은 오르고, 30년 전 900원이던 택시비가 4800원이 되었어도 법인택시 기사의 가정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30년 전 택시 안에서 너나없이 피우던 담배가 불법이 되었어도 어떤 택시 기사는 손님 없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어떤 손님은 기사 몰래 차창 밖으로 전자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빈 택시가 길에서 손드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고 호출로 부른 택시를 기다리던 손님은 눈에 띈 빈 택시를 타고는 떠나버린다. 그때나 이때나 뉴스에선 이유 없이 폭행당하는 택시 기사 소식을 전하고, 스마트폰을 빌린 잠깐 사이 택시 기사 돈을 빼돌린 신종 수법을 경고해 준다. 택시는 시대를 반영한다.

아이들 크면 고향에 내려가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친정 식구들이 즐비한 서울을 이젠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아이들은 절대로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고 내게 통보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고향에 내려가 독거노인으로 살 생각까지 없었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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