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3 05:47최종 업데이트 23.11.23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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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도서출판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있다. 2018년 6월 출간돼 국내에서도 50만 부 이상 팔린 데 이어 17개국 이상 수출된 베스트셀러다.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진 1990년생 저자의 솔직한 토로가 많은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인기 비결로 꼽힌 또 한가지 요인은 '제목의 힘'이었다. 말 그대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아이러니한 젊은 세대의 '기분'이라는 것을 절묘하게 캐치한 제목이었다.

이후 출판계에서는 이 책과 닮은 역접형의 문장형 제목이 계속해서 인기를 끌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 <꿈은 모르겠고 돈이나 잘 벌고 싶어> 등이 줄줄이 출간됐다. 비슷한 문장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없는 게 없는 무한도전'에도 있다. 오랜 기간 명언으로 회자되는 개그맨 박명수의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는 2013년 8월 방송분에서 전파를 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다른 이유

최근 문제가 된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 문구도 이들 책 제목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같은 것들(함께 내놓은 문구에는 '11.23 나에게온당',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나?'도 있다). 민주당이 '2023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이라는 콘셉트로 제작해, 지난 17일 공개한 현수막 문구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이들 책 제목의 구조는 그대로 차용해 왔을지언정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참을 수 없이 울적하다가도 배가 고파서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빛과 그늘, 행복과 우울이 공존하는 애매한 기분에 관한 적확한 묘사다.

'꿈은 모르겠고 돈이나 잘 벌고 싶어'는 거시적 전망을 세우는 대신, 당장에 원하는 바를 쟁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 마디로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않겠다'에 가깝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는 더없이 솔직한 마음의 토로다. 당사자가 직접 발화한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듣는 이에게 쾌감마저 준다.
 

17일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공개한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더민주 갤럭시 프로젝트' 현수막. ⓒ 더불어민주당


그러나 민주당 현수막에 실린 문구들은 결이 다르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는 '공동체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정도의 얘기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책무 등은 무시하고 나 하나는 잘 살겠다는, 기득권 정치 세력이 청년 세대에 대해 곧잘 품어온 '정치를 혐오하는 이기적인 청년'의 서사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당사자성 또한 찾을 수 없다. 민주당에 따르면 '외부 업체가 제작한',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업체가 제작하고 민주당이 '컨펌'했을 그 문구에는 청년들이 직접 발화한 데서 오는 쾌감보다는 '청년들은 이럴 것'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불온한 상상력이 듣는 청년의 분노를 촉발한다. 그 문구를 '업체'의 '청년'들이 제작했다 한들, 기본적으로 민주당이라고 하는 공당이 품은 청년상을 그대로 반영하기에 더욱 그렇다.

민주당이 말하는 '정치 혐오'는 한국 사회에서 제기된 지 오래된 문제다. 그러나 그것을 청년들 전체로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는 한편으로, 청년들 사이에 정치 혐오가 있다면 거기에서 민주당의 잘못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민생보다는 당리당략이 우선했던 여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 청년이 배제된 '청년 정치'로 인한 효능감 상실, 에는 민주당도 한 몫 톡톡히 했다.

해명 과정에서의 꼬리 자르기야말로 축적된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청년 비하'라는 비판에 민주당은 "당의 행사를 위해 업체가 내놓은 문구를 당에서 조치해 준 것뿐"(한준호 홍보위원장)이라고 해명했다가, 파문이 커지자 나흘째 되던 지난 20일에서야 사과했다. 애초에 '당의 행사를 위해 업체가 내놓고, 당에서 조치해 준 문구'가 당 차원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자가당착이자 어불성설이다.

불 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최강욱 민주당 전 의원의 '설치는 암컷' 발언이다. 최 전 의원은 지난 19일 광주에서 열린 민형배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 "(검찰) 공화국도 아니고 '동물의 왕국'이 됐다"며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도 보면 그렇게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고 이러는 거는 잘 없다"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최 전 의원 발언 자리에 함께 한 김용민 의원과 민 의원도 함께 웃었단다.

그 자리에서 그가 다급하게 덧붙인 말은 "암컷을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고 설치는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었다. '암컷'이라는 단어에 이미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놓고, 다만 '설치는 암컷'을 줄여 그리 부른다는 얘기인데 그게 해명 축에 들어갈 수 있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본인이 갖고 있던 여성 혐오적 인식을 그대로, 혹은 확대 재생산 시킨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암컷'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월 국회에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관련한 김건희 여사 특검 촉구 농성을 벌이던 중에도 예의 '암컷'을 또 언급했다. 유시민 작가가 윤 대통령을 두고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 같다"고 말한 사실을 언급하며 "지금 코끼리가 하는 일은 도자기가 어떻게 되든 암컷 보호에만 열중인 것"이라며 김 여사를 겨냥해 말했다. 문맥상 '설치는 암컷' 발언의 타깃도 김 여사인데, 두 발언 모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고릿적 속담에 담긴 여성 혐오적 인식과 맥락이 같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 민주당의 진정성 있는 행보란

현 민주당에 어울리는 속담은 사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샌다'일 것이다. 일련의 일들은, 입으로는 '청년 정치'를 말하고 겉으로는 '윤석열 정부가 여성 인권을 후퇴시켰다'고 하는 민주당이 실제 청년‧여성을 대하는 인식과 방식을 여실하게 알 수 있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맨입으로 하는 사과는 이래서 부족하다. 청년과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할 제도 마련이야말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다. 세부적으로는 청년‧여성 정치인을 발굴‧육성할 수 있는 로드맵을 내놔야 한다. 더불어 선거철마다 신데렐라처럼 청년‧여성 정치인을 '반짝' 기용해서 표를 결집시키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고립시키는 정당 내 패거리 악습에 대한 통렬한 반성도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 내놓는 사과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유권자들의 유일한 잣대가 될 것이다.

사족: 이런 글을 쓰면 꼭 달리는 댓글 가운데 하나는 '왜 여당 문제는 거론 안 하느냐'는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윤 정부를 비판하면 '민주당 인사들의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선 왜 얘기하지 않느냐'가 언급되듯이.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민주당의 청년 배제와 여성 혐오를 논하는 것이 곧 '국민의힘이나 정의당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 전반의 여성‧청년에 관한 배제와 차별을 하나의 글에서 다루기에는, 다만 시간과 공간과 여력이 부족하기에 다음으로 미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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