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 tvN

 
빨간 우산을 든 한 남자가 거리를 활보한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이상한 존재, 거침없이 그것을 쫓아간 그는 그들을 제압한다. 한때는 백두대간을 다스리던 산신, 그러나 현재는 내세 출입국 관리소의 하명을 받는 공무원으로 내세의 법을 어긴 요괴들을 잡으러 다닌다. 바로 <구미호뎐>의 주인공 이연(이동욱 분)이다. 시즌 1에서 이무기와의 혈전을 승리로 이끌고 드디어 현세로 환생한 600년을 잊지 못한 여인 아음을 만나 사랑을 이루었는가 싶었는데, 웬걸 시즌 2의 시작과 함께 1938년 경성에 와있다. 
 
구미호가 딱 있어야 할 곳, 바로 1938년

현대 요괴 세계의 방위군 역할을 하던 구미호가 1938년이라니, 그런데 그럴 만도 하다. 일본 총독부의 실권자인 경무국장 가토 류헤이가 알고보면 노회한 일본 요괴 텐구라면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온 '문명'은 부정한 것들을 묻어둔 땅을 파 문화주택을 짓는다. 땅에 스며들었던 부정한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사람도 살기 힘들어 자신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세상에 재래의 신들이야 어떻겠는가. 업신이 금광 채굴을 위한 도구로 채근을 당하는 처지이다. 

이렇게 <구미호뎐>은 현대 세계의 균형을 위한 수호자였던 이연을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혼돈에 빠진 조선으로 '이직'시킨다. 업둥이로 들어온 업신을 찾아온 일본 형사들, 일제시대에서 마적단 두목이 된 동생 이랑(김범 분)이 이연에게 말한다. '밟을까?', 그러니 이연이 밝게 답한다. '그래, 밟자!', '공권력 남용, 피도 눈물도 없는 과잉진압'으로 현대 세계에서 원성이 자자하던 무자비하지만 책임감 넘치는 여우 전사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공간'이 어디 있을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600년을 기다렸다는 애절한 순애보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이연의 사랑일 필요는 없다. 이연의 앞에 나타난 류홍주(김소연 분), 이제는 경성 최고급 요릿집 묘연각의 사장이 되어 있다. 4대 산신 중 하나인 수리 부엉이, 홍주는 이연이 나타난 순간부터 '넌 내 거해라'라며 그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어디 이연에게 뿐이랴. 내 거를 괴롭히는 이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홍주의 소신은 자신이 운영하는 요릿집 기생을 괴롭히는 일본군에게는 더욱 자비란 없다.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 tvN

 
그런데 사랑 이야기는 자고로 꼬일수록 재미있는 법, 이연과 함께, 아닌 엄밀히 말하면 과거 자신의 형을 죽인 이연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는 또 다른 산신 백두호랑이 천무영(류경수 분)이다. 그런데 자신이 찾는 것을 위해 부호의 집을 턴 무영은 자신이 필요치 않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그런가 하면 또 필요에 의해 장산범같은 거물 요괴를 불러들여 화를 자초하기도 한다. 장산범을 불러들이고, 또 그 장산범을 찾으러 삿된 길에 자신을 던지고, 거기에는 그 오랜 시간 잊을 수 없던 홍주와 이연이 있다. 

드라마는 이연의 순애보 대신, 오래 전 산신 수련 과정 속에 의남매와 같은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산신 천무영과 홍주의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를 끌어들인다. 돌아가려는 이연과, 그에 집착하는 홍주 그리고 이연에게 복수를 하려하면서도 홍주와 이연과의 오랜 인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영, 이렇게 세 사람의 애증을 극중 주요한 갈등 관계로 삼는다. 

구미호 버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하지만 이런 세 사람의 애증만이 드라마의 주된 갈등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는 1938이라는 시대가 더 주요하다.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한반도에 상륙한 모던의 그늘 아래,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그리고 제국주의에 무참히 스러져 가고 있다. 그곳에 나타난 백두대간 지킴이 세 산신이 그걸 두고 보겠는가. 그래서일까 막강한 세 신을 소환한 드라마는,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이 된 일본 요괴를 불러들이며 타임 슬립 활극을 표방한다. 

드라마는 묘하게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각종 작품을 '오마주'한 듯 풍성한 이야기거리들을 채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각시탈>을 떠올리게 하는 홍백탈,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그는 그 예전 각시탈처럼 부유한 이들을 털어 가난한 이들의 배를 채우려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나눠준 금붙이를 빼앗겠다며 일본 요괴를 앞세운 일본군들은 도륙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지현이 분했던 <암살> 속 안윤옥의 여운을 선우은호에서 찾을 수 있다. 시즌 1에서 러시아 여우였던 기유리는 이제 비행기를 일제에 바치는 재력가의 딸로 등장한다. 일본군과 결혼을 한 후 죽은 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폭발물 전문가가 되어 독립 운동을 한다. 기유리가 선우은호가 되었으니, 기유리를 사랑하던 이연의 진돗개 구신주(황희 분)가 빠질 수 없겠다.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tvN <구미호뎐 1938>의 한 장면. ⓒ tvN

 
이연을 따라 1938년으로 온 구신주는 이연을 잃고 먹고 살기 위해 냉면집 배달부가 된다. 홀로 경성 거리를 떠돌며 그는 조국을 잃고 일제에 고통받는 이들을 목도한다. 그래서 어렵사리 이연을 만난 그의 첫 마디가 '총 한 자루 사주세요'이다. 그런 그의 마음은 현세의 아내와 같은 선우은호를 만나 자연스레 독립운동의 길에 합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군자금을 맡는 우렁각시와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을 봐왔지만 전쟁에, 노역으로 동원되는 조선 백성을 참을 수 없다며 합류한 삼도천 문지기 현의옹을 만난다. 

수리 부엉이 산신 홍주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힘든 산신의 수련을 견뎠다. 하지만, 돌아간 그곳에 가족들은 이미 굶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굶주림에 대한 트라우마는 자신의 곳간과 자신이 거느린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일본군을 죽인 자기 대신 끌려간 기생을 위해 이연과 이랑을 시켜 조선총독부를 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머무는 1938년이 가진 시대적 비극을 접합하여 일제와 산신들의 대결이라는 조선 활극의 얼개를 만들어 간다. 구미호라는 고전적 요괴담을 현대에 이끌어 신선한 서사를 확장시켜냈던 시즌 1은 이제 일제시대라는 이보다 더 요괴들의 활약이 필요한 곳이 없다 싶은 시간적 공간을 열어 그 상상력을 만개시킨다. 긴 칼을 휘두르며, '나, 힘센 년"하는 홍주나, 나쁜 놈 앞에서는 거침없이 '밟아버려'를 외치는 이연, 그리고 빛과 그림자가 오가는 천무영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구미호 버전같은 절묘한 조합이다. 과연 이들과 일본 요괴와의 일전은 어떨지, 부디 일관성있는 상상력의 서사로 잘 마무리되길 기대해 본다. 
구미호뎐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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